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아바나 대학. 정문 건물 앞에 있는 지혜의 여신상 밑에 라틴어로 ‘모교’를 뜻하는 ‘Alma mater’가 써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아바나 대학을 방문하다

6월 26일 금요일, 새벽 3시에 잠이 깼다. 화장실에 갔다. 피곤하다. 다시 잤다. 5시 30분에 잠에서 깼다. 몸이 너무 가렵다. 두드러기다. 결국 약을 먹는다. 바나나도 한 조각 먹는다. 남은 바나나 다 먹어야지.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 다시 눕는다.

8시 30분에 기상했다. 아침 식사는 과일, 커피, 수프, 빵, 계란후라이다. 라보카 해변 까사에서 먹었던 그 수프가 나왔다. 원장님이 식사를 못해서 부탁했던 것이다. 심심하지만 후룩후룩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역시 우리는 국물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LA의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문자가 안 들어간다. 어떡하지? 연락을 해서 시간 확인을 다시 해야 되는데. 할 수 없다. 내일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다시 연락해야겠다.

9시 30분, 집에서 나와 환전소를 찾았다. 바로 숙소 옆에 있었다. 그 사실을 미처 몰랐다. 이곳 환전소는 지난 센트로 아바나 지역의 은행과 달리 금방 일을 처리한다. 저번에 거기는 회계 교육을 좀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숙소 주변에도 100년을 넘은 유서 깊은 건물들이 많다. 우리가 무지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아바나 대학에 가보기로 했다.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보려면 대학을 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바나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택시를 탔다. 5꾹(CUC)에 흥정이 되었다.

아바나 대학 정문에서 내렸다. 왼편과 오른편에 수위실이 있다. 수위도 제복 같은 건 안 입고 있다. 왼편 사무실로 들어갔다.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관광객이 온 모양이다 하고 바라보고만 있다. 말을 걸어보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다. 수위실에 개들만 잔뜩 있다. 개를 좋아하는 원장님이 그냥 못 지나친다. 아는 체하고 대화를 나누더니 사진을 한 장씩을 찍는다. 원장님은 개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너무 좋아한다. 길고양이 밥주는 게 일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냥이맘’이다.

대학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간다. 그때 남녀대학생 2명이 지나가며 우리를 쳐다본다. 우리는 서로 ‘올라~’라고 인사한다. 원장님, 그 학생들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꼬레아에서 온 여행객인데, 아바나 대학 안내 좀 해줄 수 있겠느냐?”고.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남학생의 영어가 유창하다. 아바나 대학교 역사(철)학과(Historia Philosopia) 5년 중 3년차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1989년생이고 군복무 1년 뒤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안드레스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 학생은 상당히 똑똑했다. 그 학생의 안내로 우리는 학교의 연혁을 금방 알게 됐다.

아바나 대학은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 신학부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창설자는 신부였는데, 그의 흉상이 학교 안에 있었다. 그곳에는 철학부와 역사학부를 만든 인물, 쿠바 혁명의 정신적 지주인 호세 마르티의 정신적 스승이 된 인물의 흉상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학교의 연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들이라고 한다. 특히 호세 마르티에게 큰 영감을 준 사람은 펠렉스 모랄레스라는 신부로 역사와 철학 교수였다고 한다. 역시 역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표가 나를 가리키며 ‘역사학자’라고 소개한다. 나는 약간 머쓱했지만 그냥 웃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 대표가 자신은 철학과 출신이라고 소개한다. 원장님과 교수님도 간단히 소개했다.

▲ 아바나 대학 정문.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길 건너편 작은 공터에 있는 기념탑과 흉상. 1957년 3월 학생운동 지도자이며 공산주의자였던 호세 에체바리악이 이끄는 무장대원들이 방송국과 대통령궁을 습격한 뒤 아바나 대학으로 후퇴하다가 35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정문 왼편 수위실에서 본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의 초상 사진이 소박하다.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생이 갖고 있던 책 표지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 국제공산주의 지도자들과 호세 마르티,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쿠바 혁명가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임영태]


아바나 대학촌을 돌아보며

학생의 안내로 아바나 대학의 역사와 더불어 혁명운동의 요람이 된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카스트로가 연설했다는 학교 건물과 수백 년이나 된 장수나무, 학교 안에 놓여 있는 장갑차 등을 돌아보며 설명을 들었다. 혁명 후 체 게바라가 학교를 방문한 이야기, 카스트로가 피그스만 침공사건이 났을 때 한 연설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2010년 9월 3일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 대학 방문하여 대규모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주1) 피델은 85세의 노인이지만 정정했다. 그는 45분 동안 쉬지 않고 연설했다. 과거 젊은 시절의 그 폭발적인 연설은 아니었지만 열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특유의 손짓과 제스처도 그대로였다. 그는 정문 앞 계단과 거리를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청중들은 피델의 유머에는 웃었고, 심각한 내용이 나올 때는 경청했으며, 중요한 대목이 끝나면 박수로 환호하며 답례를 보냈다.

피델은 자신의 젊은 대학시절 이야기, 청년의 열정과 순수함에 대한 자각과 긍지, 스페인의 쿠바 지배와 그에 대항한 독립운동, 미국의 개입과 식민지화, 바티스타 독재 정권과 그에 저항한 혁명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현재 세계의 주요 과제인 환경 문제, 이란에 대한 미국과 서방 제재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청년학생들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했다.

피델은 자신이 대학을 다닐 때는 아바나 대학 하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20대의 청년은 정의와 진리에 대해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이다. 그러한 자각과 긍지가 세상을 바로 세우는데 중요한 힘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늘 쿠바 대학생들은 어떤 긍지와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우리는 그 한 사례를 만났다.

우리는 남녀학생의 안내로 카스트로가 공부했다는 법학대학 건물도 보았고, 약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건물도 보았다. 아바나 대학에는 의학부가 없고, 아바나 의과대학이 독립돼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주2)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 중심의 아바나 대학의 학생수는 1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쿠바 인구를 감안하면 상당히 규모가 큰 편이다. 아바나 대학에는 동양인도 100여명이 유학하고 있는데 대부분 중국학생이고 북한 학생이 10명 정도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학교를 간략히 돌아본 다음, 다른 문으로 나와 학교 주변 대학촌을 돌아보았다. 기숙사, 학교 주변의 학생들이 생활하는 거주지, 쿠바의 전통술 레젠다리아(Lendaria)를 만드는 술공장 등을 돌아보았다. 너무도 열정적이고 세련된 남자학생의 설명에 우리는 감동했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 어디 식당 같은 곳이라도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를 느꼈다.

우리는 학교 근처의 한 바에 자리를 잡았다. 공간이 좁았다. 다른 손님들이 있어서 우리 모두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조금 기다리니 자리가 났다. 모두 자리에 둘러앉아서 시원한 음료수를 한잔씩 마셨다. 맛이 약간 달달한 게 꿀이 들어간 약한 도수의 칵테일 음료 같았다. 쿠바 사람들은 칵테일을 많이 마셨다. 설탕이나 꿀이 들어가 달콤하면서 알콜이 약간 들어간, 그래서 술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 음료라고 해야 하는 게 잘 모를 그런 종류를 많이 마셨다. 우리가 마신 것도 그런 종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름도 못 물어봤지만 맛이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음료 가격은 한잔에 4꾹으로 생각보다 비쌌다. 우리 일행 여섯 명이 총 10잔을 마셨다. 교수님을 제외하고 각각 두 잔씩 마신 것이다. 나는 두 번째는 맥주로 대신했다. 맥주는 2꾹이었으니까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우리는 음료비용으로 총 42쿡을 지불했다. 조금 비용이 더 들더라도 차라리 식사를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의 벽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그림에는 네 개의 술잔이 놓여 있다. 왼편에는 백색 술잔만 두 개 놓여 있고, 오른편에는 백색 술잔과 검은색(진홍색) 술잔이 놓여 있다. 이 그림은 혁명 전과 혁명 후의 쿠바 상황을 설명해준다고 그 학생이 말한다. 혁명 전 쿠바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였으나 혁명 후 쿠바는 흑백, 황색 등 인종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로 융합한 사회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학생은 흑인(혼혈)으로 얼굴이 오바마를 닮았다. 쿠바는 혁명 후 인종차별 정책을 완전히 없앴다. 심지어 쿠바는 인구조사에서 인종에 따른 분류통계를 내지도 않고 있다고 한다.(주3) 쿠바에는 피부색, 인종과 상관없이 쿠바인이 있을 뿐이라는 이유이다.

▲ 아바나 대학 교정과 건물 1.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교정과 건물 2.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교정과 건물 3.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교정과 건물 4.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교정과 건물 5. [사진제공-임영태]

 

▲ 동물학자로 쿠바 자연과학의 기초를 놓은 펠리페 포에이 이 알요이(Felipe Poey y Aloy)의 흉상.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은 최초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문을 열었다고 한다. 아바나 대학의 창설자로 알려지는 인물의 흉상. [사진제공-임영태]

 

▲ 라몬 잠브라나 발데스(Ramon Zambrana Valdes)의 흉상. 그는 의사이자 언론인, 시인, 법률가였으며 법의학의 개척자였다. 그는 아바나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철학, 세계 역사, 문학과 문법, 철학, 식물학, 의료 병리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가르치며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사진제공-임영태]

 

▲ 펠릭스 바레야 이 모랄레스(Felix Varela y Morales)의 흉상. 그는 성직자, 교사, 작가, 철학자, 정치가로 쿠바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아바나 대학에서 철학 강좌를 열었고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스페인 왕정체제를 비판했다. 그는 쿠바의 독립 운동을 촉진하는 활동을 펴다가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고, 그곳에서 후세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사상은 호세 마르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제공-임영태]


“그대가 쿠바의 미래다”

우리는 그 청년과 쿠바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학생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고, 경제 개방과 경제 개혁의 필연성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자본이 들어올 경우 쿠바 경제가 미국자본에 종속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관타나모 기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그 문제는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문제라고 단호히 말했다. 쿠바로 되돌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피델과 체 게바라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특히 체가 최고라고 손을 치켜세운다. 라울에 대해서도 물었더니 노코멘트다.

그 학생은 영어 구사, 설명 능력, 세상을 보는 눈뿐만 아니라 생각도 반듯했다. 졸업 후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역사교사’라고 답한다. 교사의 보수가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지위나 돈보다는 정신, 역사의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보수는 관료, 군인, 관광종사자, 의사 등이 좋다고 대답한다. 이 학생이 군인의 수입이 좋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쿠바의 경제개혁과 개방정책을 이끌고 있는 것은 군부이기 때문이다. 피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라울 카스트로는 오랫동안 2인자이자 국방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 모델에 상당히 관심이 높았다. 쿠바의 경제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쿠바 군부는 국방비를 줄여 그 돈으로 노약자와 어린아이, 부녀자에게 최우선적인 배려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의료와 교육, 사회보장제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라울은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에 물러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쿠바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후계지도자의 윤곽도 어느 정도 잡혀 있다. 라울의 퇴진 이후 쿠바의 정책이 현재의 점진적인 개혁과 함께 쿠바식 사회주의 체제를 지켜갈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그 학생은 체 게바라가 묻힌 산타클라라에서 역사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산타클라라가 고향인데 6년간이나 못 갔다고 말한다. 우리는 똑똑하고 반듯한 그 학생에게 ‘네가 쿠바의 미래다’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교수님은 그에게 감동받아 ‘한국에 유학을 올 생각이 없느냐? 생각이 있으면 좋은 길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제안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외국에 나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답한다.

그런데 그에게 들은 재미있는 사실 하나. 쿠바의 유명한 술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은 3년 전부터 미국으로 주조권이 넘어갔다고 한다. 사실일까?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그런 내용은 확인할 수가 없다. 아마도 주조권이 아니라 해외판매권을 미국계 회사가 확보했다든가, 아니면 술의 주조과정에 기술적인 제휴가 있다든지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다. 쿠바 정부가 쿠바를 대표하는 상품의 주조권을 미국에 넘겨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그 친구는 그러면서 쿠바의 전통술은 ‘레헨다리오(Legendario)’밖에 없다고 말한다. ‘몬테크리스토(Montecristo)’ 시가와 함께 체 게바라가 즐겨 마신 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함께 다니던 여학생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디로 갔나 궁금했는데, 한참 있다가 그 여학생이 몬테크리스토 시가와 레헨다리오 술병을 가지고 왔다.

우리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아마도 술 이야기를 하다가 그걸 보여주기 위해 가져온 것이겠거니 했다. 이게 얼마냐고 물으니 담배는 80꾹(10만원), 술은 10꾹(12,500원)이란다. 우리는 그 학생이 가져온 담배와 술을 하나씩 샀다. 술은 LA에서 먹었는데 굉장히 달았다. 37도나 됐지만 단맛 때문에 독한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담배는 국내까지 가져왔다. 영수증까지 만들어주어서 그걸 가지고 들어왔던 것.

학생들과 헤어지기 전 그들이 밤에 학교 주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한 클럽에서 페스티벌이 있는데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우리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우리는 밤 8시 30분에 아바나 대학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옆에서 교수님이 내일 새벽 3시에 떠나야 되는데 저녁에 올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신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말에는 그다지 신경을 안 쓴다. 비행기에서 자면 되니까.

▲ 아바나 대학 주변 거리 모습 1.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주변 거리 모습 2.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대학 주변 거리 모습 3. [사진제공-임영태]

 

▲ 우리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는 오바마를 닮은 그 청년에게 우리는 ‘네가 쿠바의 미래다’라며 칭찬해주었다. [사진제공-임영태]

 

▲ 젊은 친구들에게 우리가 산 레헨다리오 술과 몬테크리스토 시가. [사진제공-임영태]

 

▲ 우리가 들어간 바. [사진제공-임영태]

 

▲ 우리가 들어간 바에서 마신 차. [사진제공-임영태]


사회주의적 인간형과 자본주의적 인간형

돌아오는 길, 택시를 타려고 했으나 도무지 탈 수가 없다. 번화가여서 그런지 택시들이 모두 만석이다. 네 명이나 되니 합석도 불가능한 상태. 아무리해도 택시는 탈 재간이 없다. 걸어갈 수 있는지 물어보니, 중앙공원까지 적어도 5km가 넘는다고 말한다. 이 거리를 걸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뙤약볕에 걷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택시가 안 되면 버스라도 타야한다. 우리는 일단 걸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기로 했다. 얼마간 걸으니 버스 정류장이 나타났다.

거기서 버스를 기다렸다.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갔다. 우리는 버스 번호와 행선지를 열심히 보았지만 어떤 버스를 타야할지 알 수가 없다. 그때 원장님이 한 아주머니(할머니)에게 센트로 아바나 가는 버스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녀가 어떤 버스인지 가르쳐 준다. 버스비가 얼만지 물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자신이 갖고 있던 동전을 준다. 네 명의 버스값이다.

우리들은 그 분의 친절에 감동한다. ‘사회주의적 인간형’이란 이런 사람일까? 물론 자본주의에도 이런 사람은 있다. 지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우리도 많았다. 나도 시골에서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는 그처럼 순박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약간은 냉소적이고 차가운 도시의 남자가 됐지만 말이다. 아마 우리 세대와 윗세대의 한국인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지금은 그들도 바뀌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그 할머니 덕분에 그래도 수월하게 중앙공원 근처까지 버스를 타고 올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쿠바 시내버스도 한번 타보고 좋은 경험을 했다. 버스는 덥지만 타고 다닐만했다. 서울 시내버스처럼 시원한 냉방시설은 없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감수하며 살 만하다고 생각됐다. 건강한 사람들은 짧은 거리는 걸어서 이동하고 약간 먼 거리는 버스를 타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차량 수단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중앙공원 근처에 내린 우리들 다시 Sloppy Joe's Bar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좀 더 오래 아바나에 머물렀더라면 단골이 되었을 뻔했다. 어쨌든 우리가 만난 식당으로서는 그만큼 시설도 괜찮고 맛도 양도 좋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다만 음식을 시키면 좀 늦게 나오는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카드가 되느냐고 물었더니 되긴 되는데 수수료가 30%란다.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태. 굳이 카드를 쓸 이유가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잘 모르겠는데, 은행에서 그렇게 수수료를 붙인다고 했다. 아마 미국자본이 들어오면 이런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어찌 될는지?

그런데 오늘따라 손님도 많고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온다. 배도 고픈데 말이다. 정말 한참 후에 햄버거와 샌드위치가 나왔다. 콜라와 음료수를 함께 마셨다. 그 바람에 마이클하고 약속한 2시까지 숙소에 가지 못했다. 마이클 부인이 한국 팬인데, 한류 팬들이 모이는 한국박물관(주4)에 가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마이클이 아는 기사의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해서 약속이 돼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마이클이 화가 나 있다. 우리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3시 가까이 돼 있었다. 당연히 기다리던 택시는 돌려보낸 상태였다. 마음이 불편해진 원장님이 마이클을 달랬다. “미안하다. 식사가 너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 대신 택시비는 지불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화 풀어라”라고 했던 것.

그러자 마이클이 “택시비는 괜찮다. 정 그렇다면 담배를 하나 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원장님도 마이클에게 시가를 한 통 사게 된다. 가격은 80꾹(CUC). 역시 쿠바에서는 담배가 제일 중요한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제품 중에서 그래도 시가가 비싼 축에 속하니까 아마도 마진도 가장 높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들은 웃었다. 이제 짐을 정리해야 한다. 내일 새벽 3시에 택시가 올 것이니, 저녁에 짐을 다 싸 두어야 한다.

▲ 대학가 근처에서 본 국영상점. [사진제공-임영태]

 

▲ 국영상점에 설치된 배급가격표[사진제공-임영태]

 

▲ 대학가 바에 걸려 있던 혁명 이전과 이후의 흑백 인종 정책의 차이를 보여주는 그림. 쿠바는 혁명 후 흑백간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진제공-임영태]

 

▲ 대학 근처에 있던 전국대학생연맹(FEU: Federación Estudiantíl Universitaria; University students federation) 사무실. [사진제공-임영태]

 

▲ 전국대학생연맹 사무실 내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대학 근처에 있던 아바나 라디오 방송국(Canal Habana). [사진제공-임영태]

 

▲ 라디오 방송국(Canal Habana) 건물. [사진제공-임영태]


그 학생들은 왜 안 나왔을까?

저녁 6시, 우리는 집에서 나왔다. 식사를 하고, 말레꼰 해변을 구경한 뒤 그 대학생들을 만나서 페스티벌 구경을 가야 한다. 비에하 광장 근처에 있는 정통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시켰다. 새우, 돼지고기, 바다가재(랑고스타)가 들어간 볶음밥을 2인분만 시켰다. 2인분만 해도 충분한 양이다. 가격은 2인분에 30꾹이다. 역시 약간 폼이 나 보이는 식당이어서 그런지 약간 비싸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바에 도착한 첫날밤에 먹은 그 식당과 비슷한 가격이었다. 맥주하고 콜라를 곁들였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다. 민망하게도 4인조 보컬그룹이 열심히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거 다른 사람들이라도 있어야 팁이라도 좀 받지. 우리가 줘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음식을 먹으려니까 목이 막힌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나오면서 약간의 팁을 주었다. 손님 많은데 찾아가서 열심히 연주하길 바라면서.

식사 후 교수님은 아무래도 쉬는 게 좋겠다면서 숙소로 돌아가셨다. 세 사람만 말레꼰 해변으로 갔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였다. 해변 인도를 따라 걸었다. 분위기가 죽인다. 사진을 찍는다.

사람들이 해안 곳곳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다. 해변 간이술집에서 맥주는 마시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인다.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 보이다. 오늘은 금요일. 여기도 ‘불금’(불타는 금요일)인가? 어쨌든 낚시질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 같다. 바다로 석양이 지고 있다. 하지만 수평선 바로 위에 구름이 약간 끼어 있어서 해가 떨어지는 그 순간은 보지 못한다. 7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7시 40분이다. 이제 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 왠지 가고 싶지 않다. 어떤 예감이 있었던 것일까? 막연하지만, 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대표에게 그냥 가지 말자고 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가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탔다. 5꾹을 부르는 택시를 보내고 두 번째로 잡아서 3꾹에 합의를 보았다.

택시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8시 33분이다. 3분이 늦었네. 설마 간 건 아니겠지? 택시에서 내리며 눈을 잽싸게 돌려보았지만 안 보인다. 우리는 내려서 열심히 찾는다. 그래도 안 보인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한다. 어디에도 낮에 봤던 그 학생들과 닮은 사람은 없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나는 우비를 꺼내 입고, 이 대표는 우산을 꺼내 쓴다. 원장님은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펴본다. 그래도 없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 정문 계단에는 들어갈 수 없음을 알리는 쇠줄이 쳐져 있다.

원장님이 학교 수위실로 간다. 우리도 뒤따라간다. 왼쪽 수위실은 문이 닫혀 있고, 오른쪽 수위실만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경계도 없다. 내부에는 피델, 라울, 체 게바라 등의 사진이 벽에 붙어있다. 그냥 비닐에 쌓인 채 붙어 있어서 우리 시골집에 내걸린 사진틀보다 나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쿠바 최고의 국립대학교 정문 수위실에 이런 사진이 내걸리다니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표가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나도 덩달아 찍었다. 원장님이 수위와 뭐라고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상상이 발동을 한다. 각기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진짜 학생은 맞겠지?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전문적인 가이드를 하는 학생들인가? 학생으로서 술과 담배를 판 게 찔려서 안 나타났나? 먼저 왔다가 없으니까 바로 가 버렸나? 허탈하다. 웃음이 계속 나온다. 맹렬한 기세로 상상력이 가동된다. 소설가라면 한편의 소설이 가능할 듯하다.

그 와중에도 원장님은 교수님 걱정을 한다. 어떻게 설명하지? 설왕설래하다가, 사실대로 말씀드리기로 했다. 약간 늦었더니 없었다라고. 원장님이 어떻게 말씀드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날 교수님이 한 마디 하셨다. “그 학생들 왜 안 나왔을까요?” 아무도 대답을 못한다. “글쎄요?” 지금도 그 부분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왜 안 나왔을까? 그들이 가는 클럽에 한 번 가서 분위기를 좀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 다시 만난 슬로피 조스 바. [사진제공-임영태]

 

▲ 저녁을 먹은 스페인 음식점. [사진제공-임영태]

 

▲ 우리가 마신 맥주. [사진제공-임영태]

 

▲ 텅빈 레스토랑에서 우리를 위해 음악연주를 하는 사람들. [사진제공-임영태]

 

▲ 밤에 다시 찾은 아바나 대학 정문 계단 앞에서사진제공-임영태]

 

▲ 밤 아바나 대학 수위실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쿠바에서 마지막 밤을

돌아오는 길. 낮에도 그랬지만 택시를 타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걷자! 오늘이 쿠바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하며 원장님이 걸어서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요, 걸읍시다. 일단 아바나 대학에서부터 말레꼰 해변까지 쭉 걸었다. 기온이 내려간 밤에, 그것도 발걸음이 가벼운 세 사람이어서 몇 킬로 정도야 금방 걸었다. 우리는 해변까지 한 30여분 만에 도달했다. 우리가 저 멀리서 봤던 신도시 쪽 해변이다.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사는 근처까지 해변을 따라 걸었다. 아마도 한 시간쯤은 걸렸을 것이다.

해변을 걷는 도중 우리는 여러 광경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금’을 태우는 연인들, 그 어두운 바닷가에서 등에 산소통을 매고 물갈퀴를 신고 바다로 들어가는 사람들(그들은 왜 바다로 가는 것일까?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어림없을 것 같았다. 불도 없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그리고 한참 리모델링 중인 해변가 집들, 클럽 술집에서 음악과 함께 춤을 즐기는 사람들 등 다양한 장면이 등장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금방 리모델링해서 깨끗하게 단장한 새집과 폭격이라도 맞은 듯 허물어지고 있는 옆집의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아마도 쿠바의 현재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아바나는 공사 중이었지만 옛날의 낡은 모습 그대로인 곳도 있다. 바깥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있는 관광 쿠바, 미국과 외국 자본을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쿠바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 여전히 견고히 혁명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쿠바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건물은 그것과 대비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이 반드시 낡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지켜야 할 것도 분명이 있기 때문이다.

쿠바는 10년 후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10년 후 다시 말레꼰 해변을 찾았을 때 그 모습은 어떨까?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겠지?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말레꼰 해변을 걸어서 숙소 근처에 있는 비에하 광장까지 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다 돼 간다. 저번에 먹었던 광장 옆 노천카페에서 맥주를 한잔씩 마셨다. 지난 번 할머니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던 그 청년이 또 다시 아는 체한다. 서로 인사를 했다. 그 친구는 다시 원장님한테 자기 할머니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핏줄이란 무엇일까? 민족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민족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까? 언어, 혈통, 역사, 문화? 정답은 없지만 주류적 견해는 있다. 여기서 그 문제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는 그곳에서 간단히 마시고 일어섰다. 내일 새벽에 떠나야 하니까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런데 맥주값이 저번하고 다르게 나온 것 같다. 세 병인데 8꾹이다. 술값이 날짜에 따라 달라지나? 사람보고 가격을 매기나? 이런 생각을 하며 그곳을 떠났다. 11시 30분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쿠바에서의 마지막 밤은 이렇게 흘러갔다.

▲ 해질녘 말레꼰 해변에서 담소와 함께 휴식을 취하는 쿠바 미녀들[사진제공-임영태]

 

▲ 일몰 직후 말레꼰 해변의 강태공들. [사진제공-임영태]

 

▲ 베다도 지역의 밤 풍경. [사진제공-임영태]

 

▲ 말레꼰 해변에서 본 야경. [사진제공-임영태]

 

▲ 말레꼰 해변 바에서 불금을 즐기는 청춘들.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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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인터넷 tv팟에서 연설 장면 전체를 볼 수 있다. http://tvpot.daum.net/v/0t-sDhijtHI$

2) 아바나 의대는 쿠바 최대의 의학교로 2만 8천명의 학생이 재적하고 있으며 6,500명의 교수진과 4,0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21개 의학교의 중심으로 해마다 약 4천 명의 의사가 이곳에서 양성되어 현재까지 약 3만 명이 졸업했다. 15개의 학부가 있고, 20개의 부속 연구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또 50개의 병원, 120개의 지구진료소, 3천 곳 이상의 패밀리 닥터 지구의원도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요시다 다로,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 파피에, 2011, 261쪽 참고) 참고로 한국의 경우, 2015학년도 서울대 의예과 정원은 135명이고, 전국 의예과 정원은 2,255명이다.(김대식, “전국 36개 의대 올해 얼마나 뽑나?”, <VERITAS>, 2014.1.6) 인구규모, 경제규모를 고려하면 한국의 의대는 쿠바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떤 정책이 바른 정책일지 생각해볼 일이다.

3) 비공식 통계자료에 따르면, 쿠바는 전체 주민의 약 51%가 물라토(흑인과 스페인계 백인의 혼혈)이며, 약 37%가 스페인계 백인, 약 11%가 흑인, 1%가 중국인이며 그밖에 소수의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언의 혼혈)가 있다.(“쿠바는 어떤 인종이 구성되어 있나요?”, 「다음Tip Q&A」참고: 인터넷검색 2015.9.3.)

4) 마이클의 부인은 그렇게 불렀지만 아마 한국 문화와 관련된 몇 가지 자료를 모아놓은 작은 공간으로 한국 대중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양이다. 민간단체로 ‘한-쿠바교류협회’가 있는데 그 단체 사무실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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