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 남쪽 ‘평화의 집’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북한 병사와 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정찬열]

개성의 아침 풍경

10월 13일(월) 맑음. 북한 방문 10일째다. 잠이 깼다. 새벽 4시45분이다. 화장실을 가려고 스위치를 켰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더듬더듬 다녀왔다. 
 
날이 밝아온다.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바람에 댓잎 쓸리는 소리가 들린다. 반닫이며 경대 같은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가만히 쓸어보니 왕골 돗자리의 그 섬세한 오돌토돌하고 가지런한 느낌이 전해온다. 30년 전쯤의 우리 집 안방에 누워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까. 김 참사가 헛기침을 한다. 그만 일어나시라는 신호다. 여섯 시다. 개성시내 아침 산책을 나간다. 파킹랏 쪽으로 걸어 나와 밖으로 나가려는데 대문이 잠겨있다. 자그마한 쪽문으로 나가려고 하니 제복을 입은 사람이 신분증을 보자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묵은 여관 단지가 담으로 싸여있어 외부인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인가 보다.
 
개성공단 통근버스가 지나간다. 푸른색 36호 버스다. ‘개성공업지구관리사무소’라는 글씨가 보인다. 길가 기와집 처마 밑 인도를 따라 아주머니가 머리에 함지박을 이고 걸어간다. 한 손은 바가지를 잡고 한 손은 뒷짐을 졌다. 간당간당한 뒷 태가 영락없이 옛날 우리 고모를 닮았다.
 
길가 기와집들은 아랫부분을 벽돌로 쌓았고 길 쪽으로 창문을 내놓았다. 우리의 전통 기와집 형태다. 인도를 따라 전봇대 사이에 띄엄띄엄 은행나무 가로수가 서있다. 나무 아랫부분에 하얗게 페인트를 발라놓았다. 무 배추를 가득 실은 수레를 남자가 끌고 여자가 밀고 간다. 부부인 성싶다.
 
개성 남대문 앞. 고려 때 건축물이다. 서울에 있는 남대문이 이곳 개성에도 있다. 큰 도시에는 저렇게 대문을 만들어 백성들의 통행을 관리해왔다는 얘기다.
 
교통순경이 서 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사람들이 한길을 건너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남자나 여자나 자전거에 시장바구니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핸드백을 멘 아주머니기 아이를 업고 바쁘게 걸어간다. 아이를 어느 곳에 맡겨 놓고 출근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자동차는 이따금 지나간다.  
 
아이들이 무어라 재잘거리며 하천변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고 있다.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의 발길도 못지않게 분주하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여자아이 뒤로 딸을 자전거에 태우고 달려가는 어머니도 보인다. 개성의 아침 풍경이다.
 
아침밥을 먹었다. 전통한옥 아랫목에 앉아 밥을 먹고 숭늉으로 목을 축인다. 밥과 국, 그리고 젓갈 한 가지와 조림 하나, 나물과 계란 후라이 한 개가 올라온 단촐한 밥상이다.
 
선물가게에 들렀다. 점원이 반갑게 맞는다. 선옥희, 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선생님, 저 풍산개 좀 보시라요.” 그림을 가리킨다. 남에는 진돗개, 북에는 풍산개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홍삼가루 하나에 50달러로 가격이 붙어있다. 두 개에 50달러 줄 수 없나요? 옆에 있는 어떤 손님이 물으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렇게 흥정을 하면 기분이 개운치 않단 말입네다이. 감정을 어케 못합네다.”

그 손님이 나간 다음에 기분이 상했는지 한 마디 한다. 유럽의 어떤 자본가가 이곳 개성에 투자하여 전기를 비롯한 기반 시설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한껏 기대에 부풀어있다.
 
“여기는 숲이 무성해도 모기가 없단 말입네다. 있어도 목재 때문인지 아니면 별난 새가 있어 그러는지 맥을 못춥네다.” 살기 좋은 개성에 다시 오시라며 인사를 건넨다.

▲ 우리 일행이 묵은 여관 주변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 개성공단 통근버스. [사진제공-정찬열]

 

▲ 개성 남대문 앞,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개성의 아침, 출근하는 여성들. [사진제공-정찬열]

 

판문점을 돌아보다

판문점을 향해 출발했다. 판문점을 다녀온 다음 개성 부근을 둘러 볼 예정이다. 개성에서판문점은 약 8km란다. 
 
판문점 입구에 도착. ‘조국통일’이라는 구호가 우리 일행을 맞는다. “후대들에게 통일조국을 물려주자”는 벽화가 보인다. 자그마한 안내소가 있고, 그곳에서 기념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판문점 참관로 안내도가 붙어있다. 인민군 장교가 간단한 브리핑을 한다. 군사분계선은 246km이고 남과 북 사이에 4km의 비무장 지대가 있다는 등, 모형도 앞에서 목표물을 가리키며 설명이 이어진다.
  
판문점 가는 길 양쪽으로 시멘트 구조물이 설치되어있다. 길가 은행나무 가로수 단풍이 아름답다. 
 
가는 길에 ‘정전협정조인식장’을 먼저 방문했다. 미국 측은 텐트에서 조인을 하자고 했으나 북한 측에서 이 건물을 5일 만에 완성해서 이렇게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협정이 조인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판문각에 도착. 김일성 친필탑이 보인다. 김일성이 마지막 남긴 친필탑이라고 했다. ‘김일성’ 이라고 휘갈겨 쓴 이름 밑에 1994년 7월 7일 이라는 날자가 새겨져있다.
 
북쪽 높은 탑엔 공화국기가 걸려있고 남쪽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한 핏줄이 살고 있는 같은 땅에 서로 다른 국기가 걸려 휘날리고 있다. 1953년 휴전이후, 저렇게 둘로 갈라져 대치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60년이 넘었다. 종전이나 평화협정이 아닌, 전쟁도 평화도 아닌,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어정쩡하고 불안한 ‘정전 상태’로 그 오랜 세월을 지내온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지역은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어야 하는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루어내는 길은 정녕 없단 말인가.
  
‘평화의 집’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북한 병사와 사진을 찍었다. 흰색과 푸른색 지붕이 보인다. 흰색은 북측이 관리하고 푸른색은 미군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 중 한 채를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건물 가운데로 남북 분계선이 지나간다. 똑딱 하는 사이 그냥 한 걸음 달려 분계선을 지나면 거기가 바로 남한이고, 북한 땅이다. 여기서 서울까지 약 7십 킬로, 자동차로 4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개성공단을 멀리서 지나치다

개성으로 올라가는 길. 멀리 왼쪽으로 개성공단이 보인다. 이 분단의 시기에 저 공업단지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북한을 방문하기 전,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세계적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읽었다. ‘통일 한국의 출발점은 개성공단의 성공’이라는 제목이었다. 
 
“남북한은 협력 프로젝트로 남북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10년 넘게 보여줬다. 개성공업지구가 숱한 풍파를 견뎌낸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 지역을 개성공단 부지로 제공했다. 군부의 반대를 누르고 결단을 내렸다.
 
통일은 남북 공통의 목표다. 통일로 나아가는 길은 효과가 입증된 것에 기반해야 한다. 개성공단은 윈윈 프로젝트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개성공단을 확장하고 새로운 공단들을 건설해야한다. 개성공단 확장과 새 공단 건설은 통일로 가는 남북 윈윈 로드맵이다”란 내용이었다. (2014년 9월 24일자 중앙일보 참고)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이 125개, 근무하는 근로자가 5만 3천여 명, 근로자 출퇴근에 280여대의 공단관리위 버스가 동원되며, 생산액이 39억 달러(4조 2724억원)에 이른다는 보도를 보았다.(2014년 12월 통계)  이번에 개성공단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 멀리 개성공단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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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성균관
 
개성 도착. 성균관에 도착했다. 입구에 ‘국보유적 127호’ 라는 팻말이 서있다. 그 옆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현판이 세워져있다. 성균관은 고려초엽 992년에 세우고 이조 때 고쳐지었는데 임진란 때 불에 타버려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1089년 국자감 시절부터 정식교육기관으로 정착되었다니 지금부터 926년 전의 일이다. 성균관을 <고려성균관 경공업대학>으로 명명하여 운영해 오고 있으며, 북한은 이 대학을 세계적으로 역사가 가장 오랜 대학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남한에 있는 성균관대학이 건학 6백주년을 훨씬 넘었으니 남북한을 통해 성균관이 역사적으로 민족의 고급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오고 있는 셈이다.  
 
수령 몇 백 년인지 모를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있다. 개성시 인민위원회에서 세운 돌 비석에 “... 은행나무가 한 천 년 묵었다고 하는데 벌레도 먹지 않고 싱싱합니다”는 구절이 있는 걸로 미루어 수령을 천 년쯤으로 계산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대성전과 명륜당, 동제, 서제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서울의 성균관과 건물의 배치, 규모가 비슷하다. 오랜 은행나무가 경내에 서 있는 것까지 닮았다.
 
자료실에 들어가 둘러보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띄었다. 고려 때, 소 한 마리 값이 비단 4백 필. 15살 이하 50살 이상 남자 노비는 비단 50필, 같은 나이의 여자는 비단 60필, 남자 15살 이상 50살 이하는 비단 1백 필, 여자는 1백2십 필이라고 적혀있다. 노예를 사고팔았다는 기록이자, 소 한 마리 값이 노비보다 훨씬 비싸게 거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그렇게 인간을 노예로 부려먹으며 사고팔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성균관 본관 왼쪽으로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고려 성균관 대학’이다. 한옥의 특징을 살려 지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9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건물이다. 그 사이에 신축한 모양이다. 남한의 성균관대학교와 교류를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랑신부와 친구들 한 무리가 학교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결혼사진을 찍으러 가는가 보다. 

▲ ‘고려 성균관 대학교’ 앞에서. [사진제공-정찬열]

 

천태종 성지 보광사 방문

오관산 영통사를 방문할 순서다. 개성에서 16km쯤 떨어진 곳이라 한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곳곳에 호랑이, 코끼리, 등 각종 동물모양을 만들어 세워두었다.
 
나뭇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군인 여러 명이 나무를 곧추세워 등에 지고 한 줄로 산등성이를 올라간다. 지게를 사용하지 않고 저런 방법으로도 나뭇짐을 나를 수 있는가 보다. 옛날 월출산 나무꾼들이 저녁나절이면 나뭇짐을 지고 줄지어 산에서 내려오던 장면이 오버랩 된다.   
 
높은 곳에서 잠시 바라보니 요사체가 멀리 보인다. 오관산 깊은 골에 들어앉은 모습이 편안하다. 절집은 저렇게 특별한 곳을 찾아 세우는 모양이다. 절에 도착하니 스님 한 분이 반겨주신다. 이곳이 왕건의 출생지이며, 왕건의 4대 할아버지 때부터 이 골짜기에서 일가를 이루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아들을 낳으면 셋 중 하나는 스님을 만들라는 선대의 가르침을 섬겨서 의천이 중이 되었다. 그가 천태종을 창시했다. 이를테면 이곳이 천태종의 성지라는 얘기다. 천태종은 현재 일본에 5백만, 남한에 2백만의 신도가 있는 큰 종단이라고 한다.
 
1996년 민족문화유산을 발굴 정리하라는 김정일 장군의 교시를 받들어, 2천년부터 2006년 사이에 건립했다고 한다.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돌과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이며, 절 이름도 통일을 대비하면서 일본과 남한에 있는 신도를 위한 종단의 성지를 만들자는 의미에서 보광원(普光院)으로 했다고 한다. 절사(寺) 자가 아닌, 원(院)으로 정했다는 얘기였다.
 
스님께 세수 얼마이시냐고 물으니 예순한 살 이시란다. 옛날로 치면 꼬부랑 늙은인데, 이렇게 아직은 정정하다고, 아들딸 낳고 살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고 너털웃음을 웃는다. 박식한 분이다. 이 절에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신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 보광원 앞뜰에서 놀러온 식구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보광원 앞에서 스님과 함께. [사진제공-정찬열]


송도(松都) 삼절(三絶)을 만나러 가는 길 - 화담 선생을 먼저 뵈었다

송도는 개성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개성을 말하면 사람들이 송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송도(松都)의 삼절(三絶)인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 선생, 그리고 황진이를 생각하게 된다.
 
서화담 선생의 묘가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단다. 우리가 올라왔던 반대 길을 따라 개성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려가는 길 멀지 않는 곳에 화담 선생의 묘, 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차를 세워두고 산길을 잠시 내려가자 선생의 묘가 있다. 앞은 넓은 호수요 뒤로는 오관산이 버티고 있는, 천혜의 명당이다. ‘보존유적 1761호 서경덕 묘’라는 표지석이 묘 앞에 서있다.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은 대학자였다. 마흔셋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그만 두고 송악산 자락 ‘꽃 피는 연못’ 옆에 초막을 짓고 일생을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화담(花潭)이라는 호를 붙이게 된 연유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산속에 은거하고 살았지만 정치가 정도에 어긋나면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곤 했다. 그의 인물됨이 인근 개성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듣게 된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하루아침에 파계시켜 “십년공부 나무아비타불”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놓았던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기로 작정한다. 그렇지만 화담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황진이는 화담의 제자가 되었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했다. 황진이가 그런 말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화담 선생과 황진의 관계 또한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둘 사이가 어디까지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글을 통해 서경덕은 가끔 황진이를 그리워했고, 황진이 또한 화담을 정인으로 마음에 새겼을 거라고 후세 사람들은 짐작한다. 다음은 화담이 남긴 시조 한 수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의 이 시에 대해 황진이는 곧 답을 보냈다.

“내 언제 신(信)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데 /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화담 선생은 대학자였지만, 황진이와의 일화로 인해 더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분이다. 서경덕이 58세에 세상을 떠난다. 선생은 삶과 죽음은 다만 기(氣)의 뭉침과 흩어짐 뿐이라고 했다. 한 조각 구름이 일었다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진 셈이다. 그때 황진이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스물 일곱....? 놀랍다.
 
산 아래 저만치 모퉁이를 돌면 황진이의 묘가 있다고 한다. 화담은 죽어서도 황진이를 내려다보며 그리워하고, 황진이는 저 아래 묻혀 화담을 올려다보며 사모하는지 모르겠다.

▲ 화담 서경덕의 묘, 앞은 호수요 뒤로는 산, 명당이다. [사진제공-정찬열]


연암 박지원의 묘에 인사를 드리다

화담 선생의 묘를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차 안에서, “화담 선생이 황진이와 잤을까요” 운전사 방동무가 묻는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대 문장가인 화담이 한 여성의 사랑을 품어주지 못할 만큼 작은 위인은 아니었을 겁니다”라는 답이 나온다. 모를 일이다.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다. 길가에 여러 개의 벌통이 놓여있고, 황소 20여 마리가 냇가에서 풀을 뜯고 있다. 작은 다리 부근에서 황진이 무덤이 어디쯤인지 군인에게 길을 묻느라 잠깐 섰다. 냇물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저런 풍경은 참 오랜만에 만난다.  냇물에서 빨래를 한다는 것은 물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의미일터이다.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황진이 묘가 나올 거라고 한다. 
 
‘닭공장’ 표지가 보인다. 닭을 공업적 방법으로 기르는 곳이라고 김 참사가 설명해준다.  
 
왼쪽으로 능이 보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황진이 묘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박지원의 묘’다. ‘보존유적 1740호 박지원의 묘’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참으로 우연히 연암 박지원의 묘를 들르게 되었다.
 
평소 만나고 싶었던 박지원 연암 선생을 이렇게 뵙게 되었다. 알다시피 연암은 조선 실학의 대가다. 정조 때인 1780년 중국을 다녀온 다음 ‘열하일기’를 펴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열하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조선 왕조 오백 년을 통틀어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또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또한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고 쓴 서문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만큼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그렇게 연암 선생을 만난 다음, 얼마 전 다른 책에서 그 분이 쓴 시 한 편을 또 만났다. ‘연암억선형(燕巖億先兄)’이라는 시다. <연암이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며>라는 시다.

“형님 수염 누구 닮았었나? /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울 때면 형님 얼굴 쳐다보았지 / 아마 형님이 아버님을 닮았었나 봐요 / 형님 돌아가셔서 형님 그리울 땐 누구 쳐다보지? / 개울로 가서 두건 벗고 내 얼굴 비춰봐야 하나?”
 
형제간의 정한을 쉬운 언어로 풀어낸 시다. 그리고 공감을 준다. 좋은 책을 읽거나 글을 만나면 그 글을 쓴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근래에 연암 선생을 생각해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상면을 하게 되었다.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그리고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 연암 박지원의 묘. [사진제공-정찬열]

 

황진이 묘에 술 한 잔 따랐다 - 죽어서도 사랑받는 화제의 인물

다시 차를 돌려 나와 길을 올라가는 도중, 학교를 파하고 걸어오는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길을 물었다. “이 길로 쭈욱 올라가면 황진이 묘가 나옵네다” 똑똑하게 가르쳐준다.
 
‘황진이 묘’ 라는 푯말이 길가에 서 있다. 운전사 방 동무에 의하면 이곳이 개성에서 15km쯤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차에서 내려 낮으막한 언덕을 올라가 황진이 묘에 당도했다. ‘보존유적 1543 황진이 묘’ 표지석이 서있다. 표지석 한 칸 위 묘 바로 앞에 ‘명월 황진이의 묘’라는 비석이 세워져있고, 그 뒷면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있다.

“십륙세기의 이름난 녀류 음악가, 시인. 천오백십륙년 개성에서 황진사의 딸로 출생.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리웠다. 당대의 민간음악과 시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세를 풍미했던 기녀 황진이. 사람은 누워있지만 시 한 수가 남아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래 전 학교에서 배웠던 시 한 수를 읊으며 송학소주 한 잔을 올렸다. 묘에 술을 뿌리고 나도 황진이를 생각하며 음복을 하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숨차게 올라온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토바이로 달려 왔다고 한다. 개성시 민족유산 보호관리소 현장기사, 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바람이 세서 오느라 꽤 애를 먹었다고 하기에, 황진이 묘에 잠깐 들려 인사나 하고 가려했는데 이렇게 수고스럽게 오셨냐고 내가 화답했다. 황진이 묘에 관해 제대로 알려드리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이 무덤에 황진이의 뼈가 묻혀있는 게 맞냐고 물었다. 실제 뼈를 묻은 것은 아니고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오는 말을 참조하여 이곳에 가묘를 만들었단다. 기록에 의하면 황진이가 “나는 죽어 묻힐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니 아무데나 버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안내원을 따라 묘 아래쪽으로 오솔길을 내려갔다. 널찍한 바위가 나타난다. 안내원이 그 중 움푹 파인 곳을 가리키며 입 우물, 여성의 옹달샘이라고 설명한다.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바위에서 생수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그 모형이 여성의 생식기를 제대로 닮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셔왔다고 한다. 죽을 무렵에 이 바위 위에서 백 번째 남자를 맞아 정사를 나누었고, 이 부근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했다.
 
널찍한 바위 중앙에 주의사항을 써 붙여놓았다.

“1. 황진이 우물과 주변을 위생 문화적으로 잘 관리하여야 한다.
2. 보존구역에서 집짐승을 방목할 수 없다.
3. 보존구역 내에서 나무도벌과 일체 불 놓는 것을 금지한다.”
 
황진이는 1516년생인데 죽은 날짜는 알 수가 없고, 40대쯤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할 뿐이란다. 이 묘는 2000년 5월에 완성했다고 한다. 기사가 똑똑하고 사명감이 넘친다. 서른 살이란다. 자칫 밋밋할 뻔 했던 일정이 젊은 기사님 덕택에 훨씬 생동감 있는 방문이 되었다. 
 
황진이 묘를 떠나면서 임제(林悌)가 지었다는 시 한 편이 생각났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 /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를 그리워하던 그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가는 길에 그녀의 묘 앞에서 지었다는 노래다. 그런데 그는 결국 이 일로 파면을 당했다.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종을 맞으면서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황진이의 묘. [사진제공-정찬열]

 

▲ 옹달샘이 있는 바위. [사진제공-정찬열]

 

▲ 개성시 민족유산 보호관리소 현장기사와 함께. [사진제공-정찬열]

   

선죽교, 역사 속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충절

개성으로 나오는 길에 인삼밭이 보이는 마을 앞에서 잠깐 멈췄다. 그 유명한 개성인삼을 어떻게 재배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2009년과 2011년, 걸어서 국토종단과 국토횡단을 할 때 전국적으로 인삼을 제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남쪽에서는 금산, 풍기지역 정도가 인삼재배지로 이름이 있었는데, 남쪽 끄트머리로부터 강원도 휴전선 부근까지 인삼밭이 없는 곳이 없었다. 대규모 인삼재배를 하는 모습이 전국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길가 둑 건너편에 자그마한 인삼밭이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워낙 인삼으로 유명한 지역이니 다른 곳에 대규모 재배단지가 있지 않겠나 싶지만, 저 인삼밭은 관리가 제대로 되는 것 같지 않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제대로 좀 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안타깝고 좀 속상하다.
 
농가 지붕 위에 깻단을 말리고 있다. 호박넝쿨이 지붕을 타고 올라가고, 노랗게 익은 호박이 넝쿨 속에 숨어 궁둥이만 내 놓고 나뒹구는 모습이 보인다. 노오란 호박을 따다가 호박떡을 해먹으면 참 맛있겠다. 동네 앞에 아이들이 나와 놀거라 기대했는데 아이도 어른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농가 지붕 위에 깻단을 말리고, 호박이 익어간다. [사진제공-정찬열]

선죽교에 도착했다. 한석봉이 친필로 쓴 ‘선죽교(善竹橋)’ 표식비가 서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적으로 등록되었다는 표지가 함께 서있다. 원래는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이성계의 정권 탈취를 반대하다가 이 자리에서 죽은 다음 참대가 솟아나 ‘선죽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때 그 다리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선죽교 다리 바닥과 난간에 핏자국이 선연하다. 신기하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단심가’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충신. 역사 속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선비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죽교 밑으로 냇물이 무심히 흐르고 있다.

▲ 선죽교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박연폭포에 들다

박연폭포를 향해 출발한다. 개성을 떠나 고속도를 타고 가다가 오른쪽으로 12km쯤 산길을 들어가면 도착할 거라고 한다. 산골 마을을 지나간다. 강냉이를 길가에 말리고 있다. 강냉이 수확은 9월이면 완료된다고 한다. 강냉이 대가 밭에 그대로 서있는 모습도 보인다. 우선 열매를 따내고 대는 아직 세워둔 모양이다. 학교를 파하고 가던 여학생 두 명이 우리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천마산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니 박연폭포가 보인다. 가뭄이 심하다더니 떨어지는 폭포의 물이 많지 않다.

“한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황진이가 지은 박연폭포는 ‘폭포수가 백 길이 넘고 물소리가 우렁차다’는데, 지금 물줄기는 가까이에서 겨우 보일 정도다. 그렇지만 단풍이 물들어 가는 주변 경관과 어울려 그대로 아름답다. 폭포의 높이는 20미터 정도다. 금강산의 구령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폭포로 불리운다고 했다.
 
폭포 이름이 박연으로 된 전해오는 얘기가 있단다. 옛날 박 진사란 사람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단다. 그 소리에 반한 용녀가 박 진사를 데려다 남편을 삼았는데 그런 연유로 이름이 박연이 되었다고 한다.
 
폭포 주변 바위에 여러 개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김 아무개, 이 아무개...  저렇게 높은 곳에 이름을 새기려면 꽤 높은 사다리를 동원했을 성 싶다. 이름을 남기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양반들의 행태’ 라고 김 참사가 한마디 거든다.
 
결혼식 커플이 폭포 앞 넓적한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다. 이름 있는 명소엔 예외 없이 신랑 신부가 보인다. 바로 위 높은 언덕에 정자가 서있다. 경치 좋은 이곳에 정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폭포 주변 자갈밭에 앉아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었다. “생명 위험, 물에 들어가지 말것!” 푯말이 세워져있다. 
 
주위를 거닐다가 소풍 나온 일행을 만났다. 7,8명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놀러 왔다고 한다. 칠면조고기를 구워 안주 삼아 얘기하는 중이었다며 한 잔 하고 가시라고 붙잡는다. 못 이긴 척 자리에 끼어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술 인심, 밥 인심은 남이나 북이나 이렇게 똑 같이 푸짐하다. 남쪽에서 걸어서 국토종단을 하던 중, 나그네를 불러 술과 밥을 먹여 보내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 박연폭포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 놀러 나온 주민들과 어울려 한 잔. [사진제공-정찬열]

걸어서 오솔길을 내려와 주차장 부근에서 아주머니를 만났다. 안내원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였다. 남쪽 사람들이 많이 오던 때, 황진이 묘에서 안내를 맡았다고 한다. 화담 선생 묘는 물론 박지원의 묘에 대해서도 환히 꿰뚫고 있다. 화담 선생 묘 바로 아래쪽에 선생의 고모를 비롯 일가친척의 묘가 많이 있고, 그 아래 저수지는 송도 저수지라고, 그리고 그 바로 아래 한석봉 선생의 필체로 쓴 비석이 있는데 그걸 못 보았냐고 물어본다. 아깝다, 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역시 아는 만큼 보게 되는 모양이다
 
황진이 묘 아래 있는 바위와 관련하여 ‘한 몸을 더 해서 100사람을 채웠다’는 얘기를 꺼낸다. 남쪽에서 온 관광객 하나가 거기서 웃기는 짓을 했던 기억이 있다며, 피식 웃는다.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려다 낯부끄러운 일인 듯싶어 그만 두었다.
 
박지원의 묘에 대해 물었더니, 그 묘에는 실제로 박지원과 그 아내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 참관하여 눈으로 보았다고 했다. 그는 80까지 살았던 분이고, 1996년도에 봉분을 완성했다고, 쭈욱 꿴다.
 
성불사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하니 그곳 샘물을 마셔보았느냐고 묻는다. 안 마셨다고 했더니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성불사는 우물이 셋 있단 말입네다. 남자중 샘물, 여자중 샘물, 아기중 샘물이란 말입네다. 그런데 기중 여자중 샘물이 가장 맛있단 말입네다.”

진즉 알았더라면 샘물을 마셔보았을 텐데 아쉽다고 했더니, 또 따라서 웃는다.
 
이곳 박연폭포는 사철 아름답지만 계절마다 아름다움의 특징이 있고, 특히 겨울철에 얼음고드름의 모습은 천하 절경이라며, 다음에 한 번 겨울에 꼭 들리시라고 말을 맺는다. 신복순 안내원이다. 그 분을 통해 송도 3절에 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 박연폭포, 신복순 안내원. [사진제공-정찬열]

 

4시 30분 평양을 향해 출발. 길 따라 나뭇짐을 이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도 스쳐지나간다. 산골 계단식 논도 추수를 끝냈다. 올해는 비가 많이 부족했다는데 평년작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어제와 오늘 600킬로미터를 달렸다고 운전사 방 동무가 얘기한다. 
 
7시 30분 어둑 무렵 평양 도착. 저녁밥을 먹고 나니 10시다.

<추가-11월 18일 오후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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