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산타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 동상. [사진제공-임영태]

 

라보카 해변을 떠나기 전

6월 24일 수요일, 다른 날보다 약간 늦게 일어났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둘러보아야 할 구경거리도 별로 없었고, 피곤하기도 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히 먹었다. 삶은 계란 2개, 커피 1잔, 콜라, 바나나 등이었다. 식사 후 숙비와 식비를 계산했다. 내가 설거지 하다가 깨먹은 유리컵 비용과 어제 점심 때 생선 튀김 요리를 해준 수고비도 계산해 주었다. 유리컵 값은 3꾹, 요리 수고비는 5꾹을 주었다.

우리는 10시에 떠날 수 있게 짐을 챙겼다. 어제 앙꼰에 갔다오면서 기사에게 부탁한 대로 변경된 우리의 계획이 전달됐으리라고 믿었다. 원래 우리는 트리니다드에서 라보카로 오면서 올드카 주인과 50꾹에 산타클라라까지 가기로 계약을 했고, 출발시간은 12시였다. 그런데 앙꼰 해변이 마음에 들어서 오늘 오전까지 놀다갈 심산으로 1시간 늦춰 오후 1시로 약속을 변경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제 저녁 다시 생각이 바뀌어서 오전 10시에 산타클라라로 떠나기로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앙꼰 올드카 주인에게 전달해 달라고 앙꼰 해변으로 우리를 실어다 준 기사에게 부탁했는데, 그는 ‘OK, 잘 전해주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사실이 잘 전달됐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10시에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10시가 넘어서도 기사는 오지 않았다. 10시 30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왜 안 오는 걸까? 연락이 제대로 안 됐나?’ 하지만 연락방법도 없었다. 우리는 올드카 기사의 전화번호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10시 40분쯤 올드카 주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반가워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은 약속시간이 12시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을 뿐이라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정을 설명하고 좀 더 빨리 갈 수는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싣고 갈 차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보카로 오던 날 그에게 이 낡은 차로 산타클라라까지 갈 거냐고 물었더니, 그가 단호히 ‘노’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는 에어컨도 되는 성능 좋은 차로 갈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었다. 그랬으니 우리는 당연히 그가 당겨진 시간에 맞게 새로운 차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전화를 하던 그 올드카 기사가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 릴리가 차를 갖고 오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그러더니 어느 순간 올드카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트리니다드의 릴리 여사가 나타났다. 우리는 반색을 하며 그녀를 맞았다. 하지만 우리를 실어갈 차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녀만 믿고 기다렸다.

그 사이 원장님과 릴리 여사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릴리는 한국에 돌아가면 자신의 까사를 잘 선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 원장은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묵은 집이 너무 엉망이어서 좋게 평가해 줄 수가 없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다른 까사도 갖고 있다. 모두 5개인데 시설이 좋은 곳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정말 5개나 가지고 있느냐? 어떻게 그렇게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자기, 남편, 아들, 시어머니 등 다른 사람 명의로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까사는 자유로이 사고팔 수 있고, 세금도 거의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그녀를 통해 의외의 사실을 알았지만 그 내용을 전부 믿어야 할지 어떨지 긴가민가했다. 특히 까사를 다섯 개씩이나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았다. 나중에 산타클라라의 까사 주인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까사의 거래는 얼마든지 사고파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섯 개씩 까사를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세금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상당부분 흔히 하는 말로 ‘뻥’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 라보카 해변 마을 거리. [사진제공-임영태]

 

▲ 해변 마을의 집. [사진제공-임영태]

 

▲ 해변 마을의 별장처럼 잘 지은 집. [사진제공-임영태]


쿠바인의 새 모습을 보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올드카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12시까지 기다려야 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12시가 다 되어서야 택시가 왔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이다. 우리는 릴리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릴리가 대답한다. “올드카 주인은 지금 다른 드라이브 업무 중이어서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산타클라라에 살고 있는 다른 기사를 불렀다.”

그러면 ‘택시비는 얼마냐?’고 물었더니, 택시기사가 80꾹이라고 말한다. 갑자기 우리는 ‘띵’해졌다. ‘이거 뭐지? 우리를 완전히 호갱으로 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님이 릴리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우리는 그 가격에 갈 수가 없다. 올드카 주인에게 전화를 해라. 우리는 그와 50꾹에 약속이 돼 있다.”

하지만 릴리는 여전히 시침을 뚝 떼며 이렇게 말했다.

“올드카 주인과는 연락이 안 되는 상태다. 그는 지금 드라이버 중이다. 딴 곳으로 손님을 데려가고 있다. 그는 내 사촌이다. 하지만 지금은 연락이 안 된다. 전화를 안 받는다. 봐라 내 핸드폰으로 이렇게 전화를 해도 전화가 안 된다.”

새 기사는 집 앞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고, 집주인 내외도 영문을 모르는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묵은 까사 주인내외도 릴리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면 릴리의 절친한 친구는 누구지?’ 이제 서서히 전모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거 모든 게 릴리 여사의 작품이구나!’

우리가 처음 비아술 터미널 앞에서 그녀에게 낚여서 짐을 끌고 변두리 동네로 갈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좀 심하게 말하면 릴리의 행적은 ‘사기꾼’과 닮았다. 엉망진창인 까사로 데려가더니, 앙꼰 해변 대신에 라보카 해안으로 보내고, 이제는 50꾹에 예약한 올드카 기사를 빼돌리고 산타클라라에서 왔다는(실제는 ‘시엔푸에고스’) 기사를 데려다 놓고 80꾹이나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 났다. 우리 모두 나서서 강하게 어필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렇다고 이대로 호구처럼 당하고 말아야 하나?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트리니다드 같으면 다른 택시라도 부를 텐데, 이 시골 어촌에서는 택시를 부를 방법도 없다. 마차를 타고 트리니다드까지 가서 택시를 알아봐? 하지만 마차는 쉽게 구할 수 있나? 가끔 지나가긴 하던데 기다려야 하나?

이런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릴리 정말 대단하다. 우리를 외통수에 몰아넣다니. 달리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받아들이느냐, 거부할 것이냐? 받아들이면 잠깐 쪽 팔리고 약간의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실 다른 길을 찾아도 금전적으로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마차든 택시든 타고서 트리니다드까지 가서 다시 산타클라라 가는 택시를 잡아타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비용이 이중으로 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장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보상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거부하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아마도 엄청나게 험난한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표현이 좀 그렇기는 한데, 33도가 넘는 땡볕에 길거리에서 하염없이 택시나 마차를 기다리거나, 오기로 4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트리니다드까지 간다(아마도 그런 일은 없겠지만)고 생각하면(이것이든 저것이든 어쨌든 우리가 길거리에서 한정 없이 헤맬 것은 분명한 사실) 그건 거의 죽음이다.

우리는 아무도 그런 고난을 감수할 마음의 자세나 몸 상태가 아니었다. 나 혼자라면 오기를 부릴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으로 끝났다. 결론이 내려졌다. 그 택시를 타고 가야지, 다른 수가 없다. ‘아, 결국 사회주의 쿠바의 어두운 단면을 트리니다드에서 두 번씩(릴리의 농간과 비 오는 날 쓰레기 투척)이나 보게 되는구나.’

▲ 라보카 해변 마을에서 아침에 만난 마차. [사진제공-임영태]

 

▲ 라보카 해변 풍경. [사진제공-임영태]

 

▲ 해변 마을에 주차돼 있던 승용차. [사진제공-임영태]

 

▲ 앙꼰 해변의 요트. [사진제공-임영태]


산타클라라에 입성하다

그래도 원장님은 한참동안 항의를 계속한다. 우리는 50꾹에 그 기사와 계약을 했다. 그 기사 어디로 갔냐? 당장 데리고 와라. 하지만 릴리는 계속 횡설수설한다. 자기도 연락이 안 된다. 자기 사촌인데 다른 운전 일이 생겨서 그 일을 뛰고 있다고.

우리의 기분이 엉망이다. 그러나 어쩌랴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우리는 그 차를 탔다. 그 대신 비용은 70꾹에 낙찰을 보았다. 10꾹이라도 깎았으니 약간이라도 자존심을 회복한 것인가?

멕시코도 아니고 쿠바에서 사람에게 속았다는 생각 때문에, 또 전직 교수, 현직 의원 원장, 그리고 언론사 대표, 글쟁이 등 멀쩡한 네 사람이 바보가 됐다는 생각 때문에 기분은 별로였으나, 그래도 쿠바의 자연 전경은 멋졌다. 차가 달리는 동안 눈에 들어온 풍광은 아름다웠다. 그 풍광이 우리들의 마음을 조금씩 달래주었다.

산타클라라로 가기 위해서는 한동안은 우리가 트리니다드로 갈 때 만났던 그 길을 되돌아 나와야 했다. 처음 가면서 볼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이 보였고, 목장이 나타났으며 사탕수수 농장이 보였다. 얼마간 달리다가 갈림길에서 산타클라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시골길이었지만 산이 사라지고 다시 평야지대가 나타났다.

그렇게 얼마간 달리다가 작은 휴게소 앞에 차가 섰다. 휴게소라지만 야자수 잎으로 간단히 지붕을 만들어 씌운 작은 매점 하나가 전부였다. 그곳에서 기사양반이 비스켓을 하나 나서 우리에게 주었다. 가격은 10모네다(CUP). 우리 돈으로 500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이지만, 양이 제법 많았다. 15모네다를 주고 콜라(우리돈 800원 정도)를 사서 함께 먹었더니 맛이 그럴 듯했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 데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배가 고팠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먹을만하다고 평가한 것으로 보아서 확실히 맛이 나쁘지는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때 우리를 싣고 가던 기사가 한 택시기사를 소개해주었다. 산타클라라에서 아바나까지 70꾹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우리야 너무 감사하지. 정상적으로 협상하면 100꾹은 주어야 한다. 아마도 릴리와 실랑이 하는 모습을 본 기사가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모양이다. 이래서 세상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결국 우리가 오늘 금전적으로 손해 본 20꾹을 제하고도 남는 장사를 한 셈이 되었다. 릴리에게 당했다고 분해했는데 이제는 그 기사가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구나 싶었다.

다시 산타클라라를 향해 출발했다. 내가 기사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다. 그는 ‘시엔푸에고스’라고 대답한다. 릴리는 산타클라라라에서 왔다고 했었는데, 그의 말과 다르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산타클라라에 입성했다. 산타클라라라는 표지판을 보고 얼마간 달리니 저 멀리 체 게바라의 기념동상이 보인다. 체 게바라 기념관도 이곳에 있었다. 우리는 일단 시내로 들어갔다. 까사를 찾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처음 찾아간 곳은 방이 깨끗하고 집안 시설이 좋다. 하지만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너무 아쉽다. 시설이 정말 잘 돼 있어서 호텔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나왔다.

다시 한곳을 더 보았다. 주인 아가씨(아줌마인지도 모르겠다)가 정말 예쁘다. 주인은 미인이지만 집이 너무 낡았다. 게다가 2층을 거실과 함께 쓸 수 있도록 돼 있었는데 너무 더울 것 같았다. 가격은 15꾹으로 쌌다. 아쉬움이 남지만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또 다른 한 곳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산타클라라에 있는 유일한 호텔을 찾아갔다. 가격도 별로 안 비싸다. 28꾹이라고 했다. 하지만 빈 방이 없었다. 다시 길거리로 나왔지만 막막했다.

그때 기사가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그 사람이 까사를 안내하기로 했다. 안내자는 앞서서 걷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뒤따른다. 얼마 뒤 그 집 앞에 도착했다. 전체적으로 동네는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집만은 새로 단장을 해서 깨끗했다. 방이 깨끗했고 내부 시설과 구조도 잘 돼 있다. 계약을 하고 짐을 넣어둔 채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다.

▲ 산타클라라 가는 길. [사진제공-임영태]

 

▲ 산타클라라 입구. [사진제공-임영태]

 

▲ 차 안에서 본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 기념동상. [사진제공-임영태]

 

▲ 우리를 싣고 간 승용차. [사진제공-임영태]

 

▲ 산타클라라에서 만난 마차. [사진제공-임영태]

 

▲ 산타클라라에서 만난 삼륜차. [사진제공-임영태]

 

▲ 산타클라라 변두리 주택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길거리 과일상. [사진제공-임영태]

 

▲ 길거리 신발, 가방 등을 수선하는 가게. 쿠바에서는 모든 것을 고쳐 쓰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체 게바라 기념관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벌써 4시가 다 돼 가니 서두르지 않으면 문을 닫아서 볼 수가 없다. 우리를 싣고 온 택시가 그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숙소를 정할 때까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끝까지 책임져준 그 기사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우리는 서로 감사의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트리니다드에서의 안 좋은 기억은 그 기사의 친절과 호의로 상쇄될 수 있었다.

체 게바라 기념관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작은 가방도, 카메라도 모두 카운트에 맡겨야 했다. 기념관 앞에는 군인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란마 호 기념관 앞에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혁명박물관은 보통 일반 박물관 같은 분위기였을 뿐이고 그란마 호 앞의 군인들도 긴장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엄숙함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경비군인들의 태도도 약간은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기념관은 두 개의 공간으로 돼 있었다. 체 게바라와 관련된 기념물을 전시한 박물관과 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추모관.

박물관에는 체 게바라의 사진 자료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고, 쿠바 혁명과 관련된 일반자료들도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혁명투쟁 시기의 자료들, 혁명 후 건설 과정의 모습 등이 비교적 소박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호세 마르티 기념관처럼 화려하고 크지도 않았다. 체 게바라가 입었던 옷을 비롯하여 몇 가지의 유품도 전시돼 있었다. 체 게바라 관련 자료와 유품이 일목요연하게 따로 전시되어 있다는 것 외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옆에 있는 기념관은 느낌부터 달랐다. 내가 모자를 쓰고 실내로 들어가자 안내원이 모자를 벗으라고 한다. 나는 황급히 모자를 벗었다. 정면 앞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고 있고, 왼쪽 벽면에 돌에 새겨진 초상이 박혀 있다. 중앙에 기둥처럼 약간 튀어나온 부분에 체 게바라의 초상이 가장 크게 새겨져 있다. 크다고 하지만 그 돌 크기는 가로 세로 50센티미터쯤이나 될까 싶다. 소박하다. 우리들은 불꽃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체 게바라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기에 눈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유해를 안장할 만한 곳이 안 보여 계속 찾았다. 밖으로 나와서 둘러보고, 또 들어가서 혹시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나 살펴보았다. 아니면 영원의 불꽃이 타고 있는 앞쪽 어디에 무덤 같은 게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안내원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체의 유해는 어디에 안장되어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가 벽을 가리킨다. 바로 그 벽면 돌초상 뒤에 안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찡하다.

혁명의 상징, 청춘의 우상 체 게바라. 그가 한줌의 재(뼈)가 되어 이곳에 이렇게 있구나. 그는 지금 세계인들에게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살다간 그에게 바치는 세계인의 헌사다.

체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밀림에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CIA에 의해 체포, 살해됐다. 신원확인을 위해 그의 손목만 잘려 아르헨티나로 보내졌고, 신원확인 후 경고의 의미로 다시 쿠바로 보내졌다. 쿠바에서는 그의 두 손만을 안장했다. 그의 시체는 손목이 없는 채 다른 혁명 전사들과 함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냉전시대가 끝난 뒤,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조사팀의 끈질긴 노력 끝에 그의 유해가 발굴됐다. 1997년 그가 사망한지 30년 만에 그의 유해가 쿠바로 돌아와 손목과 함께 안장되었다. 바로 이곳 산타클라라에.

우리는 혁명에 대한 가장 순수한 열정을 간직한 채 39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의 묘지에 와 있다. 그는 볼리비아에서 죽은 6명의 동료 전사를 비롯, 수십 명의 볼리비아 전사들과 함께 이곳에 영면해 있다. 그는 저 앞의 불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은 채 세계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체 게바라여 역사와 함께 영원하라!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가 전태일을 만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전태일의 사진이 기념관과 박물관 사이 복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누가 그 사진을 그곳에 가져다 놓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교수님이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람들과 저녁모임이 있다면서 그 초상사진을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확인했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알아보는 중이며 혹시 알게 되면 알려달라고 했으나 연락이 없었다.

나는 전태일기념사업회나 쿠바에 자주 가는 노동단체 관련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 사진을 가져다 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지만 그 일을 한 사람은 두 사람이 하나로 통한다고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체 게바라와 전태일은 20년의 나이 차이가 존재하고(주1) 전혀 다른 조건에서 다른 모습으로 삶을 살았지만 닮은 점이 있다. 체 게바라도 전태일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주2) 그들은 아직도 한 점 불꽃으로 살아남아 세상을 빛나게 밝히는 존재가 되고 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조건에서 다른 모습으로 투쟁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모두 노동자와 민중(인민)의 해방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삶을 진정한 혁명가였다.

▲ 게바라 기념관에서 바라본 건너편 간판에는 “우리는 당신들도 체 게바라처럼 되기를 바란다(Queremos que sean como el Che./ We Want You To Be Like Che.)”는 피델 카스트로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게바라 기념탑에서 바라다 본 광장. [사진제공-임영태]

 

▲ 광장에서 바라본 체 게바라 동상.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동상과 기념탑 전경 1.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동상과 기념탑 전경 2.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동상과 기념탑 전경 3.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동상과 기념탑 전경 4.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기념탑 부조.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동상 모습 1.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동상 모습 2. [사진제공-임영태]

 

▲ 체 게바라 동상 모습 3. [사진제공-임영태]

 

▲ 전태일의 영정사진을 안고 비통해하는 이소선 여사.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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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체 게바라는 1928년 생이고 전태일은 1948년 생이다.

2) 전태일은 만 22세(1970년), 체 게바라는 만 39세(1967년)에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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