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 창간 15주년 기념 기획> 통일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

6.15공동선언과 함께 탄생한 <통일뉴스>가 어느덧 창간 15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연이은 보수정권의 집권으로 남북관계는 6.15공동선언 이전으로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길을 찾기 어려울 때, 다시 떠나왔던 출발점들을 되짚어 보는 일도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보다 결코 녹록치 않았을 당시에도 통일의 거보를 내딛어 스스로 통일의 초석을 쌓았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과 큰 결단, 그리고 뜨거운 가슴과 구체적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문익환, 김대중, 정주영, 윤이상,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 각 분야에서 우뚝 솟은 이정표가 될 인물들입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이들과 함께 웅대한 통일의 꿈을 한번 꾸어 봅시다.

<통일뉴스> 창간 15주년 기념공연은 11월 4일 오후 6시 30분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봄에서 열립니다. /편집자 주

 

“...(전략)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후략)”

1989년 늦봄 문익환은 신년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통해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라며 평양행을 예고했고, 그해 3월 25일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 주석과 포옹했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 늦봄 문익환 목사가 1989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포옹했다. [자료사진 - 통일맞이]

문익환 목사는 “1988년을 보내고 1989년을 맞으면서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로 본인의 평양행 결의를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는데, 그날 김일성 주석이 본인을 평양에 초청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회고했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여당과 야당 총재, 재야인사 등 남측 지도자 7인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사실, 당시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여야 총재 등도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거부했고, 재야운동권에서도 문 목사가 방북할 경우 새로운 공안탄압의 빌미를 제공해 줄 뿐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문 목사는 중국과 일본을 거쳐 입국하자 바로 구속됐고, 재야운동에 대한 공안탄압도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통일운동의 새로운 물꼬를 텄고, 같은 해 6월 전대협 대표 임수경 학생의 방북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통일운동 시대가 열리는데 발판이 됐다.

문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자 덥썩 껴안아 포옹했고, 일성으로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수치입니다”라고 말했다. 모든 격식과 절차를 단숨에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문 목사가 뚜벅뚜벅 걸어 다가서자 두 분은 순간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껴안으시더이다. 수인사 같은 것을 나눌 겨를도 없었고요... 그 포옹 장면은 ‘가슴으로 만난 평양’을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겠소이까.” 문 목사 방북을 성사시키고 동행한 재일 망명객 정경모 선생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 『우리말 갈래사전』에 대해 김일성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는 문익환 목사.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편찬사업의 씨앗이 됐다. 사진 뒷쪽 왼편은 방북에 동행한 유원호 선생. [자료사진 - 통일맞이]

문 목사는 두 차례의 김 주석과의 회담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과의 회담을 통해 허심탄회하게 통일문제 전반을 논의했고, 그 내용은 문익환 목사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자격으로 허담 조평통 위원장과 합의한 공동성명, 이른바 ‘4.2공동성명’으로 요약됐다.

4.2공동성명은 3항에서 정치군사회담과 동시에 “이산가족 문제와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을 실현하도록 적극 노력한다”는 점과 4항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기해 통일문제에 있어서 일대 진전을 가져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은 정치군사회담 우선론을 폈고, 연방제통일론은 연방정부가 국방권과 외교권을 갖는 전격적인 연방제 방식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 주석이 문 목사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정치군사회담과 병행해 교류와 접촉을 진행하고 연방제 실현방도를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합의한 것이다. 이는 이후 2000년 6.15공동선언의 기초가 된다.

여기에 더해 정경모 선생은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니만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다’라는 점과 ‘통일에 관한 남북 간 대화의 창구는 널리 개방되어야 하며, 당국자들 사이의 독점에 맡기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자신의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에 밝혀놓았다.

늦봄의 배후, 북간도와 민중의 삶

▲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목사가 태어난 동거우 생가터를 2002년 6월 문 목사 가족들이 찾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문 목사의 통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격식을 넘어서는 너른 품은 그가 자라온 시대의 산물일지 모른다. 그는 “고구려.발해의 넋이 가는 곳곳에 스며 있는 곳”인 북간도 명동마을에서 태어나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체화하며 자랐다.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밭갈이만 해도 고구려 유물이 나오는’ 그곳의 분위기는 어린 소년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겼을 터.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는 “팔팔한 물고기처럼 민족 정기가 살아 있는 마을의 한복판에서 문익환은 탯줄을 떼고 젖을 먹으며 자랐다...9개월이 되었을 때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그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고 청소년을 위한 평전에 기록했다.

문 목사의 3남인 배우 문성근 씨는 “문목(문익환 목사)이 고려항공을 타고 북으로 들어갈 때 ‘압록강을 건너 조국으로 들어간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동행한 정경모 선생이 감회를 묻자 ‘나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며 “생전에 제게도 그런 말씀을 했지만, 늘 북한과 만주까지를 같은 터전으로 놓고 생각하셨다”고 회고했다.

명동학교에서 송몽규, 윤동주, 김정우 등과 벗하며 민족의식이 투철한 문학소년으로 자라났던 그는 동무들과 마찬가지로 53세에 비로소 늦깍이 시인이 됐지만, 가장 절친했던 송몽규, 윤동주는 일제에 의해 해방조차 보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문 목사의 평생의 반려 봄길 박용길 장로는 “1945년 2월에 우리의 민족시인 윤동주가 후꾸오카 감옥에서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오자, 문 전도사의 그 비통해 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며 “어려서 같이 지내던 친구 윤동주, 송몽규를 한꺼번에 다 잃고, 해방을 맞게 되니, 그 심정을 무엇에 비할 수 있으리오”라고 기록했다.

▲ 민주구국선언사건 이후 문익환 목사는 민중들의 투쟁현장을 누볐고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 [자료사진 - 통일맞이]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시작으로 뒤늦게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그의 활동에 대해 유시춘은 당시 “그는 민주화에 신들린 사람처럼 맹렬하게 온 강산을 누볐다. 노동자, 농민, 청년, 빈민들의 몸부림이 있는 그 모든 곳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승환 통일맞이 운영위원장은 “자라난 배경에도 원인이 있지만 문 목사님이 반공주의자였는데, 통일운동가가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며 “실제로 온갖 여성노동자들 농성부터 모든 부분의 대중들의 삶에 깊이 들어가서 그 속에서 늘 함께 호흡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민중들의 삶과 투쟁 속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분단의 극복 없이는 근원적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통찰을 얻었다는 것. “공생활을 시작한 이후에 문 목사가 늘 주변의 노동자, 농민을 비롯해 민중의 삶에 함께 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의 자양분”이었다는 평가다.

문 목사는 실제로 평양 도착성명에서 “그간 남에서 부르짖어온 인권의 문제도, 민주화의 문제도 결국은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해결은 있을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피력했고 “우리 민족의 지상의 과제는 통일이며 아무런 조건없이 통일이라면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던 선이라고 절규하면서 독재자의 손에 암살당한 장준하는 나의 둘도 없는 마음의 벗이었다”고 밝혔다.

장준하 선생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친미반공’의 ‘군때’를 벗지 못 했지만 ‘세계사에서 가장 표독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악마들’과 ‘민족 분단을 강요하는 강대국 앞에 무릎을 꿇고서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한 사대주의 무리’들의 본질을 깨닫고 “모든 통일은 선인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부르짖게 된 것이다.

문 목사가 3.1민주구국선언을 시발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배경에는 ‘절친한 마음의 벗’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도 놓여 있다. 박용길 장로는 “문 목사는 장 선생 사진을 가지고 돌아와서, 책상 위에 놓고 매일 매일 대화를 나누었다”고 회고했다. 80년대 민주주의를 위해 단 하나 뿐인 고귀한 목숨을 던진 많은 열사들의 존재도 그의 북행길을 재촉하는 중요한 동기였다.

정확한 ‘이론적 대안’과 예술적 감수성에 바탕둔 ‘통찰’

▲ 고 문익환 목사 서거 10주기 추모 '평화통일기원의 밤' 행사가 2004년 1월 백범기념관에서 북측 대표단이 함께 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문익환, 김대중 등 거인들의 시대가 가고, 답답한 반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만약 그들이 살아있다면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이승환 위원장은 “냉전해체 시대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봤고, 범 국민적인 통일운동을 고민했다”며 “문 목사님에 대해 여전히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목사가 방북한 89년은 세계적인 냉전체제에 균열이 일어난 시기였고, 통일운동의 대중적 지평을 넓혀 ‘민 주도’의 실질적 통일을 추구해야 할 시기였다는 것이다.

문 목사는 실제로 범민련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의 운동을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이를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제안했고, 감옥에서 나와 ‘통일맞이 7천만겨레운동’을 제창했다. 물론 이 과정은 통일운동권의 내부분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 지난해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문익환 목사 서거 20주기 및 4.2남북공동성명 25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최근 몇 차례 대선에 국민운동을 통해 참여했던 문성근 (사)시민의날개 대표는 “지금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도 갈갈이 찢겨져 있다”며 “정치권의 분열이 시민사회에도 투영됐다”고 진단하고 “문목이 오늘의 현실을 본다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실 것 같다”고 답했다.

아울러 “그때는 투쟁 대상이 명백했기 때문에 단일대오가 만들어졌다. 재야는 문목 중심으로 뭉쳐지고, 정치권은 김대중, 김영삼 중심으로 뭉쳐졌다”며 “탄압받으면서 단일대오가 형성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게 끝나면서 갈라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표는 특히 “문목은 예술적 감수성이 굉장한 힘이었다”며 박형규 목사가 ‘민주화운동에 문 목사가 등장함으로써 심각한 분위기가 즐거운 판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한 대목을 들었다. “우리가 이성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예술적 감수성에 대한 중요도를 잘 모른다”는 것. 감성적 통찰이 이성적 이론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문 목사의 방북에 대해서도 “머리로 계산했으면 절대로 못할 일”이라며, 2017년 대선에서 최근 전경련이나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진영이 통일에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는 점을 꿰둟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문익환 목사 방북 26주년을 맞아 '4.2평화통일콘서트'가 지난 4월 2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광복 70주년 시민참여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이기도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7월 전국경제연합회(전경련)는 남북경제교류 신5대 원칙과 7대 전략과제를 발표, ‘북한 경제개발은 북한이 주도한다는 원칙 하에서 남북한의 대기업과 주변국이 같이 북한 개발에 참여하자’면서 전경련 평양사무소 개설을 주창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벽두 ‘통일이 미래다’는 기획을 통해 통일분위기를 띄웠고 올해는 통일나눔펀드 캠페인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허핑턴포스트>에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과감한 기고문을 연달아 싣기도 했다.

문성근 대표는 “정권과 재벌의 이익에 상충되는 부분이 생긴 것이다. 남북관계를 두고 균열점이 생긴 거다”고 해석하고 “결국 국가와 민족 공동체가 적대의식을 가진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게 도움이 안 된다고 지식인으로서 생각한다면 자업자득을 스스로 풀어야 한다”며 “민주 진보진영이 2017년 대선에서 의제설정을 정말 잘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형수 작가는 평전에서 “어떤 수난과 시련과 핍박 속에서도 인간의 따뜻함을 간직해서 뒷 세대에 전달을 해내는, 후세대의 유산을 주는, 우리의 20세기사를 모멸의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기쁨의 눈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역사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시키는 것이 문 목사님의 삶의 가치”라고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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