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우수학생 발굴하여 각 도마다 제일중학을 만들어 특별교육

10월 10일(금) 맑음. 북한 방문 7일째다. 6시 기상. 산책을 나갔다. 대동강변 여기저기 시민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율동을 하고 있다. 오늘이 당 창건일이란다, 축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 보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체조 하는 노인들도 보인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책을 읽으며 걸어간다. 저렇게 열심히 해야 따라갈 수 있을 만큼 경쟁이 치열한 거냐고 말을 꺼냈더니, 김 참사가 빙긋이 웃는다. 그에 관한 대답은 며칠 후 고려호텔에서 숙소까지 평양 밤거리를 걸어가면서 듣게 되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는데, 본인도 김일성대학 재학 시절 전력 사정이 좋지 못해 저렇게 밖에 나와 가로등이나 공공건물의 야외 보안등 아래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밤에 가로등불 아래서 공부도 하는데 대낮에 걸어가면서 책 읽는 것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웃음이었으리라.  
 
김 참사에게 북한의 교육제도에 대해 물어보았다. 북한은 남한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6년제 중학을 졸업하면 대학 진학을 하게 된다. 남한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전국규모의 시험을 치러 기본적인 선발기준을 삼지만, 대학 진학 인원은 각 지방, 근로자, 그리고 여성의 비율을 참작하여 국가에서 선발한다고 했다.

많은 학생들이 선망하는 대학은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인데, 김일성대학은 학생수가 9,000명 정도, 김책대학은 12,000명 정도란다. 중학과정에서 우수 인재를 발굴하여 교육시키기 위해 각 도에 제일중학이 있고, 전국적으로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교육시키는 평양 제일중학교가 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학사가 되고, 박사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석사에 해당하는 부원사, 원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 대동강변에서 주민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체조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토요일마다 갖는 학습시간, 매우 중요합네다”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다. 여자 종업원 3명이 빗자루로 주변을 쓸고 있다. 날아갈 듯한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었는데 우리 여인들에게 한복이 참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온다. 옷이 고와서였나, 여인들이 예뻐서였을까. 역시 남남북녀인가.
 
아침 식사를 느긋하게 마쳤다. 오늘 행사 때문인지 김 참사가 바쁜 모양이다. 그가 당 창건 행사에 함께 가시겠냐고 묻기에, 밀린 글도 정리하면서 쉬겠으니 다녀오시라고 했다.
 
구내 찻집에 들러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지난번 만났던 정영희 안내원이 오늘 당번인 모양이다. 반갑게 인사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던데 통신대학 기말 시험은 잘 치렀냐고 말을 건넸다.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시냐고 환하게 웃는다. 집이 근처에 있냐고 물으니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 한단다.
 
주민들의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김 참사에게 들었던 대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의식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매주 마다 갖는 ‘학습의 날’은 북한에만 있는 제도가 아닌지 모르겠다. 매주 토요일 그룹별로 학습에 참석하는데 그 모임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전달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환히 알고 있다고 했다.

주말 마다 모임을 갖는 게 귀찮은 일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뛴다. 학습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잘잘못을 고쳐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학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라고 거듭 강조한다. 자아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고, 지위의 높낮이와 관계없이 잘못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지난 번 김 참사가 ‘잘못될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북한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는지 한 평범한 아가씨를 통해서도 대충은 알 수 있다.  

▲ 신호등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교통순경. [사진제공-정찬열]

 
간판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만큼 소통에 어려움이 많은 남북

찻집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보니 꽤 시간이 지났다. 방에 올라가 컴퓨터를 켜고 그동안 써 놓은 글을 정리했다. 김 참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행사가 길어지는가 보다. 부근 시내를 돌아보자는 생각으로 호텔을 나섰다. 
 
길가 상점 간판에 “예술사진제작, 증명서, 수복사진, 비닐도포, 수자식사진”이라고 붙어있다. 비닐도포, 수복사진, 수자식사진, 이란 무슨 뜻일까.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되면서, 같은 말을 쓰는데도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간판 내용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언어생활에 차이가 많아졌다는 증거다.

간판뿐 아니라 일상용어에서도 북에서 사용하는 말과 남에서 사용하는 말은 많은 차이가 있다. 아이스크림(얼음보숭이), 내프킨(입종이), 브라자(가슴띠), , 코너킥(모퉁이차기)처럼 서로 다르다. 남한은 외국어가 그대로 통용되는데 북한은 우리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분단 세월이 길어질수록 남북 간 언어의 소통이 어려워질 것은 자명하다.       

▲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끌고 가는 모습. [사진제공-정찬열]

 
평양강냉이전문식당, 간판이 보인다.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니 강냉이를 재료로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전문식당인 모양이다. 
 
“당과 수령께 충성을 다하자!”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께서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하신 강령적 과업을 철저히 관철하자!”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크게 쓴 구호들이 길거리에 세워져 있다. 남한이나 미국 같은 자본주의 국가는 눈에 띄는 곳에 상품 광고를 설치하는데 이곳은 잘 보이는 장소에 저런 구호를 세워두었다.
 
“결사옹위”라는 글이 보인다. 決死擁衛. 최고 지도자를 죽을힘을 다해 부축하고 호위하자는 의미이다. 수령 중심인 이곳 정치체제에서는 나올 수 있는 얘기겠다, 고 생각되었다.  저런 구호는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귀국 후, 몇 개월 뒤 남쪽 신문에서 똑같은 단어를 발견하고 좀 놀랐다. 다음은 “결사옹위”가 인용된 두 신문이다. 
  
“...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도부의 7일 오찬회동은 사뭇 비장했다. 박 대통령은 비선 실세 국정개입 의혹 등에 대한 정면돌파 의지를 수차례 표명했고, 새누리당 지도부는 “결사옹위”의 의지를 다졌다.“ <2014년 12월 8일자 한국일보 기사 인용 >
  
“... 대통령 비서들의 오만과 뻔뻔함이 도를 넘고 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오직 대통령 보위에만 매달린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로서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기엔 정도가 너무 심하다. ... 그러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손에는 구정물 한 방울 묻히려 하지 않는다. 비서들의 “결사옹위를” 받으며 생색나는 일에만 얼굴을 내민다.” <2014년 10월 29일자 한겨레신문, ‘정석구 칼럼’ 인용>

▲  빙수가게 앞에 사람들이 붐빈다. [사진제공-정찬열]

 
빙수가게 앞에 사람들이 붐빈다. 프로판 가스통을 끌고 가는 모녀의 모습이 보이고, 백팩을 매고 걸어가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도 보인다. 서서 빙수를 먹고 있는 여인이 맨 핸드백도 디자인이 독특하다. 
 
두 젊은이가 가스통을 끌고 간다. 한 젊은이가 입은 자켓에 ‘adidas’ 상표가 뚜렷하다. 많은 평양시민들이 프로판 가스로 취사를 해결하는가 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가스를 사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연탄을 사용하는 성 싶다.
 
젊은 엄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먹고 살기 위해 취사도구가 필요하고, 유행에 따라 옷을 사 입어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데 유모차도 필요하겠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미국이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은 저렇게 어디서나 모두 비슷하다.

▲ 가스통을 끌고 가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자켓에 adidas 상표가 뚜렷하다. [사진제공-정찬열]

 

평양의 동네 이발소에서 무료 이발을 하다

엊그제 걸었던 호텔 뒤쪽 골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노점상이며, 유치원이며 어느새 눈에 익은 풍경이 되었다.
 
위안소(이발, 이용, 미안, 목욕) 간판이 보인다. 아래층 이발소에 여자 이발사가 흰 유니폼을 입고 이발을 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발소, 이용일, 미안실, 목욕탕이 2층 건물에 함께 들어있다. 요즈음 남한은 목욕탕에서 이발도 함께 하도록 되어있는 곳이 많지만, 예전에는 이발소가 따로 있었다. 
 
이발소 앞에 놓인 긴 나무의자에 두 사람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열댓 살 정도의 남학생은 Adidas 상표가 찍힌 셔츠를 입고 있고, 또 한 분은 40대 남자다. 아까 길에서도 Adidas 옷을 봤는데 이 학생도 같은 상표 옷이다. 요즈음 평양에서 adidas가 유행인 모양이다. 이발관 문을 빠끔히 열면서 물었다.
 
“이발 할 수 있습니까”
“해방산려관에서 오셨습네까, 거기가 설비도 좋을 텐데....”
 
그냥 돌아가 주면 좋겠다는 말투다. 40대 중반쯤 보이는 아주머니다. 내 옷차림을 보고 담박 해방산 여관에 묵고 있는 여행자인 것을 알아차렸나보다. 그냥 문들 닫고 돌아설 줄 알았는데 문이 반쯤 열린 그대로 계속 문고리를 잡고,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보면서 잠깐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짤막한 몇 분이 지난 다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해 드려야지요, 앉아 기다리시라요.”
 
복도에서 기다리라는 얘기다. 하던 사람의 이발을 끝마치고 나를 부른다. 기다리던 두 사람을 돌아봤더니, 괜찮다며 나더러 먼저 하라고 순서를 양보한다. 이발관 의자에 앉았다. 같은 의자가 세 개 나란히 놓여있다. 오래전 고향에서 많이 앉아보았던 평범한 이발관용 의자다. 앞에는 큰 거울이 걸려있고, 바로 내 앞에 나무로 짠 가구가 놓여있다.

유리를 통해 이발 기구도 보이고, 차곡차곡 쌓여있는 흰색 수건들도 보인다. 면도날을 세우는 넓적한 가죽 띠가 못에 걸려 길게 늘어져 있다. 가죽에 묻어있는 손때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 빗자루와 쓰레기받이가 놓여있다. 고향 이발소에 온 느낌이다. 거울 위쪽에 밀레의 그림 한 폭과 푸시킨의 시 한 편이 걸려 있다면, 그야말로 옛 우리 동네 이발관 풍경이겠다 싶어진다.
 
“기계로 해 드릴까요, 가위로 할까요.”
“가위로 해 주세요.”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잘 보이는 곳에 <영웅, 전쟁로병, 영예군인, 교원, 과학자, 제대군관들은 우선 봉사합니다.>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저런 분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모양이다. 저만치 구석에 나무판자가 보인다. 어린 아이를 이발 시킬 때 의자 위에 놓고 앉히는 판자다. 판자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되살아난다.  
 
내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일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발소에 갔다. 키가 작고 어린 나를 어른 의자 위에 나무 판지를 얹고, 그 위에 나를 앉혔다. 머리를 깎던 아저씨가 얌전히 앉아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하셨다.
 
“야, 이 녀석 참 잘 생겼다. 이 머리에다 사각모를 턱 씌워놓으면 정말 멋지겠다. 넌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때 이 아저씨 생각해야한다. 응!”
 
아저씨가 어린 꼬마 기분 좋으라고 한 그 말은 날아가지 않고 내 머리 속에 남았다. 이발소에 오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아저씨는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대학생은 시골에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누가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그 지방의 사건이 되는 시절이었으니까. 
  
대학 졸업식장에 사각모자를 쓴 모습은 내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으로 머리에 각인 되었다. 중학을 졸업하고 집안 형편 때문에 지게를 지고 농사를 짓다가 스물한  살 나이에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작정한 것도, 굽이굽이 돌아 서른 살 나이에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도, 어릴 적 이발소 아저씨가 내게 해 주었던 말 한마디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바람결에 툭 떨어진 씨앗하나가 땅에 묻혀 큰 나무로 자라듯이,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 말이 가슴에 묻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 어떤 말을 했을까. 상대방을 위로 하고 힘을 북돋아주기는 커녕, 행여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나 않았는지. 내가 한 말들을 가만히 되짚어본다.

“아주머니, 이발 솜씨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칭찬해 주시니 고맙습네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다듬어 나가는 아주머니의 이발 솜씨가 훌륭했다. 내가 사는 미국 오렌지카운티에 기능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분이 운영하는 ‘금메달’ 이발관이 있는데, 그 분 못지않게 솜씨가 좋았다.
 
“아주머니, 간판에 ‘미안’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미안’을 모르시다니요. 고거 얼굴을 곱게 해드린다는 말입네다.”
 
답변이 아주 간단하다. 구체적으로 묻지는 못했지만 마사지를 하거나 피부를 곱게 해준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이발이 끝났다. 
  
“면도 하셔야지요.”
 
머리를 다 잘랐기에 습관처럼 일어서려고 하자, 면도를 해야 한다며 다시 앉힌다. 미국에서 일부 이발관은 머리를 자르면 그걸로 끝이다. 면도까지 해주는 곳도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는 곳이 많다.
 
의자를 뒤로 젖혀 눕힌 다음, 솔에 비누거품을 묻혀 턱과 얼굴에 흠뻑 바른다. 그리고 나서 이발사가 가죽 띠에 면도날을 세운다. “쓱싹 쓰윽싹, 쓱싹 뜨윽싹,”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부드러운 소리다. 언제부터 저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아마 일회용 면도기가 나오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옛날 우리 동네에서는 촉촉하고 따뜻한 작은 물수건을 비누칠한 얼굴 위에 덮어 살갗을 부드럽게 한 다음 차근차근 면도를 해 주었는데, 이쪽에서는 그런 절차는 없는가 보다. 면도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면도가 끝났다.
 
“선생님, 염색을 하셔야겠네요.”
“왜요”
“젊어 보이지 않습네까”
“해주시겠습니까”
“오늘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다음에 오시면 해드리겠습니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문을 열고, 대신 월요일에 문을 닫는단다. 문 여는 날을 택하여 오면 언제든지 염색을 해 주겠다고 한다. 이발이 끝나고 값을 물었다.
 
“일 없습네다. 오랜만에 조국에 오신 손님인데 돈을 받다니요.” 극구 사양을 한다.

다음 날, 일정이 끝나고 나서 안내원이 제 방에 들어간 사이 다시 이발관에 들렀다. 염색약은 북한산 천연염료 제품이다. 염색을 마친 다음, 20분 정도 앉아있으라고 한다. 머리를 감겨주는데 따뜻한 물이 없는 모양이다. 아직은 날씨가 춥지 않아 온수를 사용하지 않는가 싶다. 시멘트로 만든 물 저장 탱크에서 찬물을 퍼서 사용한다. 플라스틱 세숫대야가 몇 개 보인다.
 
“물이 차워서 미안합네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 해도 ‘미안타’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한다. 실제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물이 차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요금을 받지 않는다.
 
골목 입구 과일 노점상에서 바나나와 사과 등 과일을 좀 샀다. 노점상 아주머니가 이번에도 달러를 받지 않는다고 하기에 사정을 얘기했더니 못이긴 척 받아준다. 이발소에 들려 나누어 드시라고 아주머니께 과일을 드렸다. 30년 만의 특별한 이발이었다.  

▲ 당 창건일을 맞아 젊은 남녀가 광장에서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젊은 남녀가 어울려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다

마침 호텔에서 김세을 신부님을 만나 함께 시내 산책을 나갔다. 어디선가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발길을 옮겨 가보니 중앙국립극장 앞 광장에서 수많은 젊은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몇 명쯤이나 될까. 3, 4백 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당 창건일 경축 프로그램의 일환인 모양이다.
 
여자는 한복을 차려입고 남자는 검정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었고 빨강색 넥타이를 맸다. 춤 솜씨들이 좋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춤 솜씨인 듯하다. 묵고 있는 호텔 종업원들이 매일 뒤뜰에서 춤 연습을 하더니 그분들도 여기에 나와 어울려 추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 식사를 김 신부님이 사시겠단다. 해방산 호텔 구내식당 양꼬치구이가 맛있다며 그쪽으로 가자신다. 여러 번 다녀가신 분이라 어느 식당에 무슨 음식이 맛있는지 빠삭하다.  종업원들이 신부님을 알아보고 반긴다. 양꼬치구이는 긴 막대기에 잘게 썬 양고기를 끼워 숯불에 구워먹는 요리다. 워낙 기름기가 많은 음식이라 소주 한 잔 곁들여 몇 점 먹고 나니 그만이다.

저녁,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맥주 한 잔 - 대동강 맥주 이야기 

▲ 깜깜한 강변 뒤쪽으로 창전거리의 아파트 불빛이 화려하다. [사진제공-정찬열]

 
김 참사와 함께 대동강변에 나갔다. 찰랑거리는 물결 위에 달빛이 일렁인다. 왼쪽으로 주체탑이 멀리 보이고, 강 건너 오른쪽은 깜깜하다.  
 
강변에 떠있는 뱃집에 들렀다.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구호가 붙어있는 배다. 손님들이 많지 않다. 대동강 맥주, 통맥주(생맥주)를 주문했다. 병맥주보다 통맥주가 더 인기가 있다고 김 참사가 얘기한다. 평양맥주, 용성맥주, 낙원맥주 등이 있지만 대동강 맥주의 인기가 으뜸이란다. 

대동강 달빛 아래 맥주 한 잔 마시는 정취가 그만이다. 대동강맥주공장은 2002년에 생산을 시작했다. 180년 전통의 영국 어셔즈 양조장이 문을 닫자 인수한 뒤 공장시설을 해체에 평양으로 가져와 대동강맥주공장을 세웠다고 한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다니엘 튜터 기자가 북한 대동강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한국의 맥주업계가 긴장했다고 한다. 미국의 맥주 애호가 조지 토마스라는 사람도 대동강맥주를 극찬 했다는 얘기가 ‘미국의 소리(VOA)’에 보도된 적이 있단다. 실제로 마셔보니 대동강맥주 맛이 좋다. 한국산 맥주나 미국 맥주, 그리고 다른 나라 맥주 못지않게 좋다.

그동안 필자도 여러 나라의 맥주를 골고루 마셔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각 나라마다 맥주의 종류도 많고 특색이 각각 다르니, 꼭 집어서 어느 맥주가 맛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맥주도 취향과 상황에 따라, 각자의 입맛에 따라, 누구와 언제 마시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맥주라도 목마를 때 마시는 맥주 한 잔과 보통 때 마시는 맥주가 맛이 다르지 않던가.

한때 한국에서도 대동강맥주를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입이 중단된 상태다. 미국에서도 대동강맥주가 수입된다는 보도를 보았었는데 최종 단계에서 미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해 결국 무산됐다는 말을 들었다.
 
깜깜한 강변 뒤쪽으로 창전거리의 아파트 불빛이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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