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쿠바 비날레스는 시가생산지로 유명하다. 비날레스 농막에서 아저씨가 쿠바 시가와 비날레스의 잎담배에 대해 설명하고 직접 시가를 마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사진제공-임영태]

쿠바 시가 맛을 보다

식사 후 숙소로 오기 전 담배 농장에 들렀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비날레스는 시가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세계적인 쿠바산 시가 중에서도 이곳 제품이 더욱 유명하단다. 그러니 담배농장 견학은 이곳 관광코스 중의 필수코스에 포함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 역시 담배농장 견학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 비날레스 투어 때 함께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택시기사 청년이 미리 선수를 쳐서 우리를 자기가 아는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어쩌랴. 끌려가는 수밖에.

담배 농장(농장이라고 해봐야 우리의 담배막이나 과수원의 규모가 약간 있는 농막 정도의 크기다)에 들어서니 포스가 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탁자에 앉으라고 권한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그 아저씨 무게를 잡으며 “잉글리쉬 오아 스페니쉬?”하고 묻는다. 우리가 “잉글리쉬”라고 하니, “오케이”라고 말한 뒤 설명을 시작한다.

나는 알아듣는 건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건 못 알아듣고, 표정과 몸짓 단어들 사이를 오가며 경청, 집중한다. 그는 시가를 마는 시범까지 직접 보여주면서 그 자리에서 쿠바 시가의 생산과 제조, 그 우수성에 대해 자랑을 한다.

비날레스는 세계적인 시가의 생산국인 쿠바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시가 생산지다. 시가의 재료가 되는 입담배를 생산하는 과정은 이렇다. 담배 씨앗을 뿌려 싹이 나오면 이걸 잘 키워서, 일정한 크기로 자랐을 때 수확을 해서 입을 묶어 모아서 그늘막에 두고 돌려가면서 말린다. 담뱃잎은 재배과정, 수확, 말리기 과정을 통해서 색과 향, 품질 등이 결정이 되고, 그 품질에 따라 1, 2, 3 등의 등급으로 나뉜다.

우리는 그의 무게감 있고, 진지한 그러면서도 카리스마 작렬하는 태도와 설명에 홀딱 빠져든다. 아니 나만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거기서 15개짜리 시가 묶음을 하나 사고 말았다. 미화 40달러를 지불하고. 이 대표는 내심 거절하고 싶었으나 내가 “그냥 하나 삽시다” 하니까 동의했다. 투어는 그냥 시켜주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갑자기 걱정이 됐다. “영수증이 없으면 나갈 때 공항에서 빼앗긴다는 데 그런 거 없어도 되는가?”라고 물어본다. 괜찮다고, 가이드 겸 기사가 설명을 해준다. ‘그래 믿어보지 뭐. 한두 사람 사갔겠어? 빼앗기면 할 수 없고.’ 이런 생각으로 사기로 했다.

이 대표는 그래도 망설였지만 내가 사자고 한다. ‘담배까지 피워가면서 온갖 것 다했는데 어떻게 안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건 파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 제일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 아저씨 설명을 들으면서 시가도 한 번씩 피워봤다. 꿀에 찍어서도 피워보고, 그냥도 피워보고 했다. 나도 그렇고 이 대표도 그렇고 담배를 끊은 지 10년이 넘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아저씨의 권고에 넘어가, 카리스마에 빨려들어 10년 만에 담배(시가) 한 번 피워봤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담배가 독하지가 않다. 시가를 피울 때는 담배 연기를 목으로 넘기지 않고 입안에서 돌리다가 뱉어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목을 넘어갈 때의 따가운 느낌도, 담배의 강한 니코틴 성분도 느낄 수 없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담배의 쓴 맛도 없다. 아무런 향료나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구수한 맛이 났다. 담배의 향기가 오랫동안 입 안에 남아 있었다. 담배 피우고 난 다음 느끼는 심한 니코틴 냄새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역시 쿠바 시가가 좋은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 담배 농막 앞에 서 있던 열대나무가 멋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농막에서 직접 시가 마는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농장주. [사진제공-임영태]

 

▲ 시가를 말고 있다.[사진제공-임영태]

 

▲ 농막에서 직접 시가 마는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농장주. 다 말았다.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 시가 맛을 보다. 담배 끊은 지 10년 만에 피워보는 시가 맛은 자극적이지 않고 순했다. [사진제공-임영태]


쿠바의 혼합경제 체제

쿠바에서 담배 농가들은 담배를 재배한 후 90%는 국가에 전매하고 10%는 자유판매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시장경제가 일정하게 도입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쿠바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알기 위해 여기서 잠깐 쿠바 경제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쿠바 경제는 현재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더불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혼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중국과 베트남, 캄보디아 등은 빠르게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실제적으로 경제체제 면에서는 자본주의와 큰 차이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반면, 마지막까지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에 부정적이었던 나라가 쿠바와 북한이다. 하지만 이들 두 나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때문에 부분적으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북한에 비해 쿠바가 훨씬 더 개방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존재하던 시절 쿠바의 산업은 설탕과 담배를 중심으로 한 플랜테이션 집단농장에 집중돼 있었다. 소련과 코메콘(COMECON)(주1)에서 국제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사탕수수를 사주고 그 대신 쿠바는 대부분의 석유 에너지와 산업기계, 나아가 생필품 등 모든 소비품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수입했다. 그러다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에너지와 식량, 생필품 등에서 수입이 막히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쿠바는 관광의 전면개방, 집단농장의 해체와 가족농․협동조합 등의 소농으로의 전환, 단일 플랜테이션 농업의 해체와 농산물 생산의 다각화, 생태농업과 도시농업의 활성화, 비국영․비농업분야의 다양한 생산 협동조합의 조직, 사탕수수 등을 이용한 에너지 위기극복 노력 등을 통해 에너지와 식량, 외화 위기에서 일정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바가 좀 더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수교와 봉쇄의 해제, 외부 자본과 기술의 유입이 필수적이다. 쿠바는 이를 위해 미국과 수교하는 한편, 베네수엘라, 중국, 캐나다, 러시아, 베트남, 스페인 등과의 경제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쿠바가 관광개방, 농업혁명과 함께 핵심적인 경제개혁 방안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소규모의 비국영 협동조합 설립이다. 비국영 협동조합은 비국영이라는 점에서 과거 국가소유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와는 다르지만 협동조합 체제라는 점에서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도 일정하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쿠바는 이를 통해 새로운 쿠바형 사회주의 경제모델을 창조, 재구축하고자 하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실험단계라고 할 수 있다.

라울 카스트로 의장이 이를 경제개혁의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다양한 중소협동조합이 구성, 운영되고 있다.(주2) 2015년 6월 현재, 쿠바에서는 운송과 식품 서비스에서부터 어업과 목공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347개의 협동조합이 운영되고 있다고 알려진다. 이들 협동조합 중 70% 이상은 수도인 아바나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상업·기술과 요식업 분야의 협동조합이 70%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건설(19%), 산업(10%) 분야의 협동조합이 그 뒤를 이었다.(주3)

쿠바 경제체제를 감안할 때, 정확히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리가 방문한 담배농장의 경우에도 개인(가족) 농장일 수도 있지만 협동조합 형태의 소농장일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농민들은 담배뿐만 아니라 다른 농업분야에서도 이런 개인농이나 조합영농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수입을 확대할 수 있다. 비날레스에서는 농업생산 외에도 까사 운영을 통해서도 수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비날에스에만 700개가 넘는 까사가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관광객으로부터 까사에서 얻는 하루수입은 노동자들의 한 달 급여와 맞먹는 수준이다. 

▲ 쿠바 경제개혁을 이끌고 있는 라울 카스트로 의장(2012). [사진제공-임영태]

 

▲  라울 카스트로와 피델 카스트로(1958). [사진제공-임영태]

 

▲ 라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게릴라 투쟁 시절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피델 카스트와 라울 카스트로. [사진제공-임영태]

 

▲ 라울 카스트로와 빌마 에스핀.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 의장대 사열을 받고 있는 라울 카스트로 의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제공-임영태]

 

▲ 라울 의장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사진제공-임영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까사는 주민들에게 상당히 높은 수입원이 될 수 있었다. 아바나에서 만났던 마이클의 경우 레스토랑에 근무하면서 받는 월급은 25꾹(CUC)인데, 그의 수입은 일반노동자보다는 많은 편이라고 했다. 공식적으로는 비교가 안 되는 의사보다도 수입이 낫다고도 말했다.(주4) 아마도 손님으로부터 받는 팁과 까사 운영, 소개 수수료 등으로 얻는 수입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뜻 보기에도 공식수입만으로 마이클이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힘들 것이라 생각됐다. 잠깐 동안 우리가 지내면서 본 그의 생활수준은 제법 여유가 있어 보였다.

까사를 운영할 경우,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 현지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아바나의 경우는 매월 150~160꾹, 산타클라라의 경우는 40~50꾹을 세금으로 납부한다고 했다.(주5) 까사 요금이 20~30꾹인 것을 감안할 때 관광객을 제대로만 유치한다면 여기서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식대수입의 경우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하루 한 끼 정도는 까사에서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처럼 되고 있었다. 개인택시의 경우도 상당한 수입을 올리는 편이다. 아바나에서 비날레스까지 100꾹, 비날레스에서 트리니다드까지 180꾹으로 예약했는데, 이는 쿠바인에게는 굉장한 금액이다.

쿠바에서는 관광이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는 물론이고 개인들에게도. 마이클은 물론이고 우리가 후에 아바나에서 만난 대학생도 관관종사자를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직업군으로 평가했다. 산타클라라에서 만난 까사 주인 이야기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관광산업이 활성화되고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면서 쿠바에서는 지하경제가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쿠바는 아직도 최소한의 국가 배급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이클의 말에 따르면 식료품으로 쌀과 설탕, 커피, 기름(식용유) 등 네 가지가 배급된다고 한다.(주6) 과일 등은 국영상점, 농민시장 등에서 사서 먹는데, 일반주민의 수입으로는 비싸서 사먹기가 힘들다고 한다. 최소한의 생활은 유지가 되지만 그보다 나은 생활을 추구하려 할 경우 물가가 너무 높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산타클라라에서 묵었던 숙소 주인은 쿠바의 이중화폐 제도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토로했다. 최소한의 생필품 외에 나머지는 암시장(Black Market)에서 쿠바 화폐가 아니라 쎄우쎄(CUC)로 사야 하는데, 자신들의 수입에 비할 때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특히 가전제품의 경우는 그들의 수입으로 구매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엄청난 비용인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쿠바인들이 경제적으로는 아직도 궁핍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체적인 생산능력도 부족하고 물자를 수입하기 위한 외화가 부족하다보니 최소한의 생활은 꾸려갈 수 있지만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다. 누구나 현재보다 나은 삶과 풍요로운 생활을 꿈꾸기 마련이다. 쿠바인들도 그런 욕구가 있고, 그걸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쿠바인들은 삶에 대한 긍정도가 높은 것 같았다. 아바나에서 만난 마이클의 경우에도 자신은 지금의 삶이 행복하며 만족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찌든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물질은 중요하지만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한국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삶의 만족 지수는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쿠바인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됐다.

▲ 옥수수밭. [사진제공-임영태]

 

▲ 여러 작물을 심기 위해 갈아놓은 밭 모습. 과거 담배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의존했을 때는 소규모로 짓는 다각 영농이 힘들었다. [사진제공-임영태]

 

▲ 비날레스에서 만난 소달구지. [사진제공-임영태]

 

▲ 소달구지나 마차는 비날레스에서 중요한 운반수단이었다. 석유를 이용하는 차 대신 축력을 이용한 환경친화적 방식은 쿠바의 오늘을 있게 만든 중요한 원천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옷감을 빨아 널어놓은 농가. 어쩌면 이 옷감들로 옷을 지어 입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제공-임영태]


비날레스에서 만난 쿠바 스콜

다른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다. 이제 다시 담배농장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우리가 피워보고 40달러를 주고 산 그 담배는 농사를 지어 국가에 90%를 전매하고 남은 10%로 만든 것이다. 언뜻 보기에 질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사실 쿠바산 고급시가 제품의 가격은 엄청나다) 그래도 맛을 보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중개업자들 커미션도 있을 테니까 그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란 생각도 했다.

오래되기는 했지만 나는 어릴 때 집에서 담배농사를 지어봐서 담배에 대해 조금은 안다. 정말이지 농사 중에서도 담배 농사가 힘든 농사다. 물론 내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의 일이니까 일일이 사람 노동에 의존해야 했던 때이고 농업기술이 덜 발전된 시절의 일이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농업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담배농사는 인간의 노동력이 많이 요구되며 손이 많이 가는 힘든 농사일이다.

담배농사는 정말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담배를 재배할 때도 그렇고 잎을 따는 작업도, 그걸 엮는 작업도 말리는 작업도(우리나라에서는 불에 굽는 게 고급품이었는데 우리 집에서는 그늘막에서 말리는 약간 하급품을 생산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해야 한다. 진딧물이 나와서 손이 완전히 새까맣게 되고 진딧물이나 벌레 때문에 농약도 많이 쳐야 한다. 더욱이 우리 집 같은 경우는 담배농사가 전업이 아니다 보니까 벼농사와 함께 겹쳐서 더 힘들었다.

그건 그렇고 내 경험으로는 잎담배의 질이나 재배, 말리는 기술 등이 품질을 좌우했다. 말린 담배잎은 색이 노랗고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일수록 고급으로 쳤다. 하지만 우리가 그 농장에서 산 담배는 약간 검은 색이 났다. 나중에 하나 더 사게 되는데 그것과 비교해 보아도 약간 그랬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속은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맛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으니까.

우리가 담배농장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노닥거리고 있는 사이, 아니 이미 담배농장에 들어설 때부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음식점을 나올 때부터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기어이 비가 쏟아진 것이다. 그 기세가 대단하다. 하긴 이렇게 한 번씩 쏟아부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더위에 어떻게 사람이 견디겠어. 사람만이 아니지, 동물도, 식물도 다 타죽고 말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비는 오래 쏟아지지 않았다. 금방 그쳤던 것이다. 언제 비가 왔느냐 싶게도 하늘이 말짱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가게에 잠깐 들렀다. 맥주 캔 6개와 하(아)바나 클럽(럼주) 1병을 샀다. 맥주는 2.5꾹, 하바나 클럽은 8꾹(한화 10,000원)이다. 맥주는 비싸고 하바나 클럽은 싸다고 생각되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 짐을 정리하고 잠깐 쉬었다. 컨디션이 영 엉망이다. 침대에 잠깐 누웠지만 잠은 안 오고 온몸이 쑤신다. 몸살의 전조증상이다. 계속 속도 니글거린다. 마침내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 비날레스의 주택. [사진제공-임영태]

 

▲ 동네 바로 옆에 있던 바나나 농장. 소규모 농장이어서 가족이나 협동조합으로 구성된 소농 생산의 하나로 생각되었다. [사진제공-임영태]

 

▲ 마을에 자리 잡은 식당(레스토랑). [사진제공-임영태]

비날레스의 밤거리 구경

8시경 저녁 식사를 했다. 오늘 저녁은 예약이 돼 있지 않아서 우리가 해 먹어야 했다. 교수님과 원장님이 묵고 있는 저쪽 집주인 아저씨가 불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줘서 밥을 해먹었다. 다행이 작은 전기밥솥이 있었다. 우리가 옛날에 사용하던 구식 전기밥솥이다. 5인용 정도 크기나 될까 싶다. 쌀밥에 깻잎(통조림), 김치(통조림), 고추장, 오이 그리고 밥솥을 끓인 숭늉이 차려졌다. 모두들 컨디션이 안 좋지만 그래도 한식이어서 잘 먹었다.

저녁식사 뒤 시내구경에 나섰다. 후미진 동네에서 나와 시내 중심가로 갔다. 술집(바), 음식점에서 춤과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원도 있고, 교회도 있다. 카사(민박)들이 거리 곳곳에 즐비하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시골마을이었던 비날레스는 쿠바가 생태농업으로 전환하면서 더욱 유명해져서 생태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비날레스에는 700여개의 까사가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관광객을 위한 까사 운영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이들의 생업도 농업에서 자연스럽게 관광업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관광업이 지금처럼 소규모 까사를 중심으로 서로 공존하면서 작은 수입에 만족하는 형태로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쿠바의 개방이 가속화 되면 10년 뒤에도 비날레스의 이 모습이 유지될 수 있을까? 쿠바 정부의 고민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간간히 거리에서 관광객들을 만났지만 전체적으로 거리는 한산했다. 몇몇 술집에서 시끌벅적한 노랫소리가 들리고 손님들이 흥겹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잔술을 파는 바(술집)가 보였다. 그곳에서 몇몇 술꾼들이 취한 상태로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제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계속 술을 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영화에서 가끔씩 보는 그런 장면과 비슷했다. 내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술에 취한 어른들이 술도가에서 취한 상태에서도 계속 술을 마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바나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어서 한편으로는 내심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에 무슨 일이 없겠는가? 쿠바에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저런 모습을 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나타나겠지?

숙소로 돌아와서 술을 한 잔했다. 나는 맥주를 한 잔 마시는 걸로 끝냈다. 아무래도 더 마시다가는 문제가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 교수님이 그동안 술을 열심히 먹더니 어쩐 일이냐고 묻는다. 걱정할 것 같아서 그냥 간단히 ‘배가 아프다’고 대답했더니, 두 분이 이것저것 묻는다. 적당히 둘러대고 앉아서 이야기를 계속한다. 교수님이 술 너무 많이 먹으면 탈나니까 자제하라며 충고하신다. 약간 속이 찔렸지만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교수님이 먼저 자러 가서 세 사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한잔 했다. 그러나 이 대표도 하바나 클럽을 두어 잔 마시더니 더 이상 못 먹겠다고 밀어놓는다. 옛날 우리가 마시던 ‘캡틴 큐’하고 비슷한 맛이라고 평가한다.(주7) 20대 학생시절 캡틴 큐나 하야비치 보드카를 먹고 웩웩 거리던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그때 못 마신 술 생각이 나서 아쉬움이 밀려든다.

우리는 10시 30분이 조금 넘어서 자리가 파했다. 밖으로 나오니 마을은 이미 적막강산이다. 아마도 시골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숙소 문이 벌써 잠겨 있다. 열쇄를 갖고 있었지만 아무리 돌려도 무용지물이다. 안에서 걸어 잠근 때문이다.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할 수 없이 자는 주인집 아저씨를 깨워서 들어가야 했다. 샤워하고 하루일을 간단히 메모하고 정리했다. 12시가 좀 못 돼 잠자리에 들었다.

▲ 비날레스의 노상 장터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비날레스의 자연 풍경. 말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목가적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 럼주 ‘하바나 클럽’(Habana Club), 대표적인 3년산과 7년산.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 럼주 하바나클럽 안내판. [사진제공-임영태]

 

▲ 비날레스에서부터 우리의 친근한 벗이 된 쿠바의 음료. 쿠 콜라(Ku Kola)와 우리의 사이다에 해당하는 가세오사(gaseosa, 음료수란 뜻)가 쿠바 제품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미국의 코카 콜라와 자매품들이 이미 대도시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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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경제상호원조회의(經濟相互援助會議, 러시아어: Сове́т экономи́ческой взаимопо́мощи, 약칭 СЭВ)는 1949년 소비에트 연방의 주도 아래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 협력 기구로서 결성되었다. 서방세계에서는 간략하게 코메콘(COMECON, Communist Economic communit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기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실시한 마셜 계획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당초 가맹국은 소비에트 연방(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6개국이었으나 한 달 뒤 알바니아가 가맹하였다. 그 후 1950년 독일민주공화국(동독), 1962년 몽골, 1972년 쿠바, 1978년 베트남이 가입하였다. 알바니아가 1962년에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가맹국은 10개국이 되었다. 그 밖에 유고슬라비아가 준가맹국, 핀란드, 이라크, 멕시코가 비사회주의 협력국, 앙골라, 남예멘,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모잠비크, 아프가니스탄, 라오스가 참관국 지위에 있었다. 경제상호원조회의는 냉전의 종결과 수반해 1991년 6월에 해체되었다.(위키백과, ‘경제상호원조회의’ 항목 참고)

2) 라울 카스트로는 고등학교 시절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아바나 대학에 입학한 뒤 사회과학 공부에 심취해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형 피델 카스트로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뒤는 그는 형과 함께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멕시코 망명, 그란마호로 쿠바 귀환, 게릴라 투쟁 등을 전개하며 쿠바 혁명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혁명 뒤 피델의 밑에서 핵심참모로 실무를 주관하며 2인자로 활약했다. 1976년부터 국가평의회 부의장 겸 국방장관으로 맡았으며, 2008년부터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았다. 그는 중국식 개혁 개방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미국과의 국교관계도 성사시켰다.
쿠바의 경우, 그가 장악한 군부가 경제개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국방비를 줄이고 그 비용을 교육과 의료, 사회보장의 유지를 위해 투입할 수 있었고, 관광개방과 의료인력 수출, 베네수엘라와의 경제협력관계 등을 통해 위기의 쿠바경제를 지탱시킬 수 있었다. 쿠바는 집단농장을 해체하여 토지를 완전히 개인에게 분배하는 방식보다는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협동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한 쿠바식 사회주의를 유지하고자 하고 있다.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의 경제, 정치 협력관계도 강화하여 미국에 의한 쿠바의 일방적인 종속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쿠바는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 라틴아메리카와의 경제, 의료, 정치 관계도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다각적인 외교 통로를 확보하고자 하고 있다.  

3) [아바나=신화/뉴시스] “쿠바, 시장경제 부분 도입 등 경제개혁 시동…협동조합 성과 부각”, <뉴시스> 2015.6.2.(인터넷검색:2015.8.11)

4)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의사의 경우는 64쎄우쎄(CUC)로서 25쎄우쎄(CUC)를 받는 마이클의 공식수입보다 훨씬 많았다.

5) 단지 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여서 정확한 정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인 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수치를 적었다.   

6) 마이클은 이 네 가지만 이야기했지만, 이 외에도 빵, 콩, 계란, 소금, 비누 등 다른 생필품도 배급하고 있다고 하는 자료도 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사정이 다른 모양이다.

7) 하바나 클럽 '하바나 클럽(Havana Club)'은 쿠바에서 생산되는 럼으로, 하바나 클럽 인터내셔널이 생산하고 있으며 쿠바에서 수출되는 유일한 럼이다. 하바나 클럽은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던 칵테일 ‘다이키리’에 사용된 술로 유명하다. 지금도 쿠바의 헤밍웨이가 마셨던 바에서는 다이키리를 주문하면 이 하바나 클럽을 이용하여 다이키리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하바나 클럽은 숙성연도에 따라 구분되는데, 대표적으로 7년 동안 숙성한 상급의 ‘하바나 클럽 아네호 세븐 아노스’와 3년간 숙성한 ‘하바나 클럽 아네호 쓰리 아노스’가 있다. 또한 최고 등급의 ‘하바나 클럽 맥시모 엑스트라 아네호’, 가장 낮은 등급의 ‘하바나 클럽 비앙코’ 등이 있다. 우리가 먹은 술은 아마도 가장 낮은 등급의 술이었던 것 같다. 럼은 사탕수수를 증류하여 만든 술로 초기에는 사탕수수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를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한 저급주로 취급받으며, ‘해적의 술’로도 불렸다. 지금은 제조기술 발전과 더불어 뛰어난 품질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술이 되었고, 피나콜라다, 블루하와이, 쿠바리브레 등의 칵테일 재료로도 사랑받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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