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통일을 향하여 자주문학 앞으로!”

고 이기형 시인 2주기를 맞아 출간된 유고 통일시집 『역사의 정답』에서 작가의 말에 해당하는 ‘자서’(自序)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구절 하나만으로도 어느 독자든 시인의 임무와 시집의 성격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렇다. 시인은 ‘통일시인’이다. 그것도 ‘자주통일시인’이다.

▲ 이기형 지음, 『역사의 정답』, 들꽃(2015.6), 288쪽

시인은 ‘자서’에서 “분단이라는 처참한 현싯점에서 분단종식 즉 통일은 우리들의 최고목표 최고선이 아닐 수 없다”면서 “외세와 악법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자주문학 자주통일의 목소리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앵겨준다”며 일관하게 ‘통일’과 ‘자주’를 강조한다.

시인은 1917년 태어나 2013년에 타계했으니 그야말로 이 땅에서 일어난 일제식민지, 해방과 분단, 전쟁, 4.19혁명 그리고 6.15공동선언 등을 온몸으로 겪은 산 증인이다. 그러니 시인이 온 삶을 통해 노래한 것이 통일이란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시집은 크게 ‘새 역사의 불길’, ‘통일의’, ‘겨레의 푸른 꿈을 향해’, ‘역사의 정답’ 등 네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구분은 무의미하다. 네 묶음은 모두가 통일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노래한 시의 소재는 다양하다 못해 무궁무진하다. 얼핏 보아도 통일관련 인사로는 이재문, 문익환, 임종국, 송건호, 신창균, 여운형, 홍근수 등이 등장하고, 통일관련 단체로는 범민련, 민족문제연구소,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민예총,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유가협, 경실련 통일협회, 전농,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등이 다뤄지고, 또 통일관련 주요 사건으로 7.4남북공동성명, 6.15공동선언, 사월혁명, 민족일보 사건, 인혁당 재건사건 등이 다뤄진다.

그에겐 ‘통일’과 ‘민족’만 들어가면 모든 게 시어이자 시의 제재로 된다. 그의 모든 시에는 ‘반드시’ 통일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의 시집 어느 페이지를 들춰도 모든 소재는 통일로 연결된다.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 그에게 있어 ‘자주’와 ‘통일’을 막는 건 다름 아닌 ‘미군’과 ‘국가보안법’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친다. 그의 시에서 자주와 통일이 동전의 한 면이라면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는 그 다른 면인 셈이다.

시인은 우리 민족의 분단에 대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하고 묻고는 대번에 “긴 말 늘어놓을 것 없이 한마디로 말하면 / 미군 주둔과 국가보안법 때문입니다”(‘모든 길은 통일을 향해’ 203쪽)고 장담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한국사회를 향해 “국회의원이나 논객 중에는 정치가도 없고 애국자도 없습니다 /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를 당당히 주장하고 나선다면 / 그 국회의원은 / 그 논객은 / 하루아침에 정치가가 되고 애국자가 됩니다 / 아니 영웅이 됩니다”(‘모든 길은 통일을 향해’ 205-206쪽)고 외친다.

그것도 시원치 않은 듯 시인은 “이제 남북 칠천만 우리민족은 / 월드컵 열기로, 아리랑축전 열기로, / 미군 철수를 외칠 것입니다 /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칠 것입니다”(‘위대한 조국산하의 부름을 받아’ 215-216쪽)고 그 영역을 확장한다.

이처럼 시인은 대개의 시에서 자주와 통일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는 미군과 국가보안법을 쉼 없이 대비시킨다. 놀라운 집념이다. 시인에게 있어 ‘역사의 정답’이란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를 통해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시단에 시는 많지만 통일시는 많지 않고 시인도 꽤 되지만 통일시인은 손가락을 꼽는 현실에서 그는 어떻게 통일시인이 되고 통일시를 쓰게 되었을까?

사실 우리 시단에서 통일시 계보를 잇는 통일시인은 박봉우-김남주-김규동-이기형-이만주-정춘근 정도다. 하긴 그의 이력을 보면 그는 영락없이 통일시인이 될 운명이다. 그는 일제시대 때 항일투쟁 혐의로 복역했으며, 해방 후 1947년 정신적 지도자로 모시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거하자, 이후 1980년 때까지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칩거생활을 하였다.

그가 1999년 ‘사월혁명회’가 수여한 사월혁명상을 받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밝힌 내면의 이야기가 있다. 시인은 먼저 ‘수상소감’(126쪽)에서 “이렇게 만나 뵈옵게 되어 반갑습니다”고 인사한다. 이어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의 민중시인과 민중시는 유죄를 내린 판사도 없는 데 죄인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 저는 외로왔습니다 / 그러나 뛰었습니다”고 읊고 있다.

사월혁명상을 받는 자리에서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민중시인들이 어디론가 뿔뿔이 사라진 외로움을 토로했지만, 그래도 혼자 남아 통일시인이 되어 뛰어야만 했던 운명에 직면했음을 밝힌 것이다.

이때 시인이 직감한 운명은 현실이 되었다. 시인은 2000년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열린 통일의 공간에서 96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노구를 이끌고 통일현장을 누빈다. 아담한 체구에다 다소 굽은 허리로 백발을 날리며 통일인사와 통일단체를 향해 통일시를 헌사하는 시인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어느덧 시인을 못 뵌지 2년이 넘고 있다. 이제 시인을 통일의 현장에서 직접 만날 수 없는 허전함을 달래고 싶다면 그의 유고 시집 『역사의 정답』을 통해 시인을 만나는 것도 한 방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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