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푸에블로 호. [사진제공-정찬열]

10월 7일(화) 맑음. 북한 방문 4일째다. 오전에 전쟁기념관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운전사가 어느새 와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결혼은 했냐고 물었더니, 같은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 연애결혼을 했고 아이가 하나 있다고 한다. 원호위원회에서 근무했다기에 그곳이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은 혼자 아셔야 합니다” 하고 말문을 막는다.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인가 보다.

 시내버스가 지나간다.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글씨가 보인다. 대동강변 놀잇배에도 걸려 있던 내용이다.

전쟁기념관으로 옮겨진 푸에블로 호
 

▲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정문. [사진제공-정찬열]

전쟁기념관 앞에 도착했다. 관광버스 네 대가 도착해 있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정문에 “조국해방전선승리기념탑”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우리는 학교에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고 배웠다. 휴전이란 승리도 패배도 아닌 전쟁이 중지된 상태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북한은 휴전일을 전쟁승리의 날로 기념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13년 7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잊혀진 승리”라고 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기념관 담 넘어 유경호텔이 서있다. 105층짜리 피라미드형 호텔인데 1987년 착공한 건물이다. 9년 전 왔을 때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현재 외관은 완성되었고 내부공사가 진행 중이라 했다. 3천개의 객실을 가진 북한 최대의 호텔이 될 거라 한다.

  안내원을 따라 들어가니 널따란 광장 저편으로 하얀 건물이 보인다. 광장 오른쪽은 전쟁을 형상화해놓은 조형물들이 늘어서 있다. 가까운 곳에 노획한 무기가 전시되어있다.

 푸에블로 호가 보인다. 지난 방문 때는 대동강변에 있었는데 이쪽으로 옮겨온 모양이다. 안내원이 설명을 시작한다.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서먼 호가 대동강변에 나타나 우리를 위협했을 때, 관민이 똘똘 뭉쳐 그 배를 물리쳤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68년 미국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 호가 우리 영해를 침범했을 때, 또 다시 우리는 그들을 물리치고 저 배를 전리품으로 붙잡아 놓았다.” 당시 푸에블로 호에 올라가 격투 끝에 직접 미군을 제압했던 사람이 안내원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랬다. 9년 전 방문 때도 비슷한 설명을 들었다. 50년 가까운 아득한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가 고등학교 때였을까. 그 때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는 줄 알았다. 북한이 미국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 호를 납치했다는 보도가 대문짝만하게 신문을 장식했다. 북한은 배가 영해를 침범했으므로 정당한 나포라고 주장했고, 미국은 원산에서 40km 떨어진 공해 상에 배가 있었으므로 나포는 북한의 군사도발이라고 맞섰다.

  당시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즉시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 앞 바다로 출동시키고, 오끼나와에 있던 전투기 360대를 한반도 주변에 배치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밀월관계에 있던 소련정부로 하여금 북한에 압력을 가해 푸에블로 호를 반환하고 선원을 석방토록 부탁했다.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 티토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대통령을 평양까지 가게 해서 김일성을 설득했다. 그러나 북한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쟁은 시간문제 인 듯싶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국과 북한은 일주일 뒤 협상에 들어갔다. 미국은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82명 승무원의 목숨을 버릴 수 없었고, 월남전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협상결과 승무원들은 돌려보내고 배는 억류되었다.

  나포한 푸에블로 호를 원산항에 놓아두었다가 1998년에 대동강 변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그나저나 평양으로 흐르는 물길도 없는데 저렇게 큰 배를 원산에서 대동강까지 어떻게 끌어 올 수 있었을까. 안내원에게 물었지만 모르겠다고 했다. 궁금증은 북한을 떠나온 다음, 미국에 돌아와서야 풀렸다.

  북한 당국이 푸에블로 호에 인공기를 달고 화물선으로 위장해 남한 주변의 공해를 9일이나 돌아 대동강까지 끌고 갔다. 정찰위성으로 북한을 손바닥처럼 감시한다는 미 정보기관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 후,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 당국이 그를 대동강 가에 있는 푸에블로 호로 안내했다. 이를 바라보는 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53m 길이의 큰 배가 움직이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면서 자몽만한 플루토늄 덩어리의 밀반출을 막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고 그는 칼럼에서 꼬집었다. 9년 전 일이 엊그제 일인 양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 대학생들이 모여 앉아 토론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전시관 안에 갖가지 자료가 전시되어있다. 대전전투를 형상화 해놓았는데 의자에 앉아있으면 무대가 돌아가면서 구경할 수 있는 구조다.  40명이 1년 반 동안 작업을 했다고 한다. 안내원이 전시관을 방문하는 숫자가 하루 만 명을 넘는다고 소개한다. 곧이어 ‘6.25는 북침’이라고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며 설명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남침’이라고 배웠다. 완전히 다른 얘기다.

  지난 2013년이었던가. 대한민국 청소년 중 70% 정도가 ‘6.25는 북침으로 발발했다’고 알고 있다는, 여론조사결과가 발표됐다. 급기야 대통령이 나서서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질책했다. 일부 언론은 편향된 교육을 시킨 때문이라며 전교조를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청소년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를 줄여서 ‘열공’이라고 하듯이, 그들의 인터넷 습관으로 ‘북침’을 ‘북’한이 ‘침’공한 것의 줄인 말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어이없는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교육 받은 사람은 6.25전쟁이 남침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정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지 않는가.

  6.25는 북침인가, 아니면 남침인가. 미국에 들어온 다음, 그 부분에 관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았다. 객관적으로 설명해줄 믿을만한 분이 누굴까. 리영희 선생이 쓴 책, <대화>를 다시 꺼내 읽었다. 리영희(1929-2010) 선생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많은 저서와 글을 통해 민족의 앞길을 밝히며 ‘이 시대의 양심’으로 추앙받던 분이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고 공언했던 분이다. <대화> 112-114쪽에 기술된 내용이다.

  “고르바초프 정권 이후에 과거 소련의 한국전쟁 관계 기밀문서가 대량으로 기밀해제 되어서 누구나가 볼 수 있게 됐어요. 등소평 이후에 중국 정부도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사이에 오고간 방대한 양의 극비문서와 자료들을 공개했지. 십여 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이런 극비자료들이 대량으로 6.25연구자들에게 제공됨으로써 6.25가 북한에 의해 애치슨 성명이 있기 훨씬 전인 1948년 말경부터 치밀하게 진행됐다는 것은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밝혀졌지요.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후르시쵸브의 유명한 회고록은 김일성이 애치슨 성명 전인 1949년 말에 모스코바를 방문해서 스탈린에게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남조선은 첫 일격에 무너질 것이다. 첫 일격으로 남조선 인민의  폭동이 일어나서 전쟁은 단시일에 끝날 것이다”라고 한 말을 기록하고 있어요.

  <중략>... 북한측의 주장은 여기서 도외시 하더라도 남한 내에서도 좌익진영이나 그 경향의 연구자들 사이에 다른 의견이 아주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나 자신도 이 문제의 연구과정에서 그와 같은 미국 측 전쟁 유포설까지 포함해서 양쪽 모두의 의도나 필요성을 과학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 문제는 그것을 어느 이데올로기적 또는 정치적 경향에서 보려고 하는 개인적 관점과는 무관하게,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과 중국의 등소평 정권의 개방정책 이후 지난 십여 년 사이에 학문적 사실 규명을 위해서 밝혀져야 할 비밀 정보는 거의 다 공개됐다고요.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남한의 적지 않은 인사들이 지녀왔던 전쟁책임론에 대해, 진실이 밝혀진 뒤까지도 자기의 희망이나 선입관을 너무 고집하는 것은 지식인의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고 봐요.”

   또 한 분의 의견을 소개한다.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장으로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려진 이재봉 정치학교수가 금년(2015) 1월 29일 LA 원불교당에서 열린 ‘초청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청중이 “6.25는 남침인가 북침인가” 하고 묻자, “남침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문제를 포함하여 남북이 상반된 견해를 보이는 모든 사안은 결국, 통일 이후에 남북 학자들이 절차를 거쳐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유경호텔. 3천개의 객실을 가진 북한 최대의 호텔이 될 거라 한다. [사진제공-정찬열]

북한사회의 세 조직, 소년단, 청년단, 조선노동당

  점심은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자고 했더니 마침 오늘이 쉬는 날이란다. 옥류관 다음으로 냉면을 잘하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청류관도 못지않게 잘하는 집이라고 한다. 이곳은 음식점을 무슨 무슨 관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청류관으로 가서 냉면을 주문했다. 냅킨을 입종이라고 부르는데 아기 손바닥만 하다. 청류관 냉면 맛이 특별하다. 한 그릇에 네 달러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김 참사에게 북한사회의 조직에 대해 물었다. 북한에는 소년단, 청년단, 조선노동당, 세 가지 조직이 기본이란다. 소년단은 여섯 살 초등학교부터 시작하는데 잘하는 아이부터 먼저 단원이 되게 하여 경쟁심을 자극한다고 한다. 잘하는 애는 별표를 주며 격려하고 못한 아이는 반성하여 자아비판을 하도록 한단다. 청년단은 중학부터 시작되는 조직이라고 한다.

  노동당은 모든 국가 기관의 중심이다. 당이 정책을 결정하면 관리조직이 집행한다. 정책결정과 집행이 2원화되어있다는 얘기다. 북한 사회의 주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원이 되어야 한다. 당원이 되려면 심사도 필요하지만 당원 두 명 이상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간판이 보이는데 ‘빨래집’이라고 되어있다. 세탁소를 말한다고 했다. 지난번 방문 때 ‘전당포’가 있는 것을 보고 좀 놀랐던 기억이 살아난다. 길가에 “경축 당 창건” 이라는 조형물이 서있다. 10월 10일이 당 창건일이란다.

▲ 길가에 “경축 당 창건” 이라는 조형물이 서있다. [사진제공-정찬열]

북한의 결혼절차, 장례절차

  호텔에 들어왔다. 김 참사가 급한 공무로 외출을 해야 한다기에 구내 커피샾에 들렀다. 어제와는 다른 아가씨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정영희, 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나도 아가씨와 같은 정가 인데 본이 어디냐고 묻자, “영일 정씨”라고 대답한다. 자기 성을 말할 때는 ‘씨’라고 하지 않고 ‘영일 정가’라고 말해야 한다고 지적하자 피식 웃으며 얼굴을 붉힌다. 영락없는 시골 처녀다. 아가씨 이름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하자 “왜 그렇지요?” 약간 의아해하며 묻는다. “아, 자기 마누라 이름을 잊어먹는 남편이 어디 있겠느냐”고 변죽을 울리자 “정말 사모님 이름이 제 이름과 같아요?” 아까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한다.

  아가씨를 어떻게 불러야 실례가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냥 ‘처녀동무’ 또는 ‘봉사원 동무’라고 부르면 된다고 한다. 차 두 잔을 주문하자, “그럴 필요 없습네다”고 손사래 친다.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어제 모란봉에 갔다가 신랑신부를 만났던 얘기를 꺼내며 결혼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우선 짝을 만나는 과정은 옛날에는 중매가 많았는데 요즘은 학교나 직장에서 만나 연애하여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결혼절차는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집에 들러 상을 받은 다음, 만경대나 모란봉 같은 공원에 들러 사진도 찍고 즐겁게 어울린 다음 신랑집으로 가는 것으로 결혼이 끝난다.

형편에 따라 식당으로 양가 부모와 친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하기도 한단다. 살림살이 준비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평소에 신부집에서 그릇이나 솥단지 등 준비해 둔 살림 물건을 결혼 다음 날 신랑과 함께 인사차 와서 가져간다고 했다. 집은 새 집이 마련될 때까지 신랑집에서 시댁식구와 함께 지낸다고 한다.

  장례절차는 사람이 죽으면 3일 동안 시신을 집에서 모시고, 3일째 되는 날 공동묘지에 묻거나 화장을 한단다. 시골은 묻는 경우가 많고, 평양에서는 화장을 하여 봉안소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모든 장례비용은 국가에서 부담한다기에 약간 놀랐더니, “당연한 일 아닙네까”하고 반문한다. 결혼식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부의금은 주고받느냐고 물었더니 친불친에 따라 약간씩 마음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단다.

  학비는 대체로 얼마쯤 되느냐고 물었다. “대학까지 전혀 내지 않습네다”는 답이 돌아온다. 중학교 6년 졸업 후 일부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대학 안 가는 사람은 군대를 가거나 직장에 근무하게 된다. 직장은 국가에서 정해준다고 했다. 군인 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며 지원제라고 했다.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다. 그렇지만 어린 아가씨에게 그런 문제까지 꺼내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가씨 나이를 물어보니 88년생, 우리 아들과 동갑이다. 중학 졸업하고 군대 가서 5년을 복무하고 왔다고 한다. 깜짝 놀라 군인 생활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군인복무는 공민의 신성한 의무입네다” 당연한 듯 대답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지금은 통신대학에 등록하여 대학과정을 밟고 있으며, 회계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 통신대학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내가 들어올 때 읽었던 책도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나도 통신대학을 졸업했기에 반갑기도 하고, 궁금한 점도 많아 학교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평소에 통신을 통해 공부를 하고 일정기간 학교에 나가 출석 수업을 하는 등, 이곳 통신대학도 남한의 초기 시스템과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다.

  남한은 1972년 서울대학교 부설 2년제 방송통신대학으로 출발했다. 방송과 통신을 통해 교육을 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던, 당시에는 무척 생소한 개념의 학교였다. 나는 제1회 졸업생이다. 대학 문턱도 딛어 보지 못할 뻔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통신대학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지금은 4년제 대학으로 발전 독립하여 TV를 통해 교육을 하고 있는 모교를 생각하면, 참 흐뭇하고 감사하다. 

▲  호텔종업원들이 배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리어카 노점상 홍시감.. 북측 돈이 아니면 받지 않다

방에 올라왔다. 공치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니 호텔 남녀 직원들이 섞여 뒷마당에서 배구시합을 하고 있다. 쉬는 시간일까. 6인제 배구다. 하나 둘 하이! 하면서 볼을 올려주면 네트 앞에서 내리치는 연습을 되풀이 한다. 뒤뜰 한켠에 ‘수령복’ ‘태양복’ ‘장군복’이라고 흰 바탕에 금색 글씨를 쓴 입석이 세워져 있다.

  주변 마을을 돌아보고 싶어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젊은 엄마가 아이를 포대기에 안고 간다. 아이를 앞으로 안을 수 있도록 만든 담요다. 호텔 뒤쪽으로 돌아가니 골목입구에 과일 노점상이 있다. 안경 낀 주인아주머니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는다. 벌써 여러 번 앞을 지나쳤더니 눈에 익은 모양이다.

  아파트 앞 골목에 종이를 깔고 옥수수를 널어놓았다. 빨랫줄에 빨래를 말리는 풍경, 둥글둥글하게 만든 연탄을 말리는 모습도 보인다. 바로 옆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정문이 낮은 철문으로 되어있어 안이 환히 보인다. 선생님 지도로 무슨 게임을 하고 있다.

  아파트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른쪽으로 위안소(이발, 이용, 미안, 목욕)라는 간판이 보인다. 꽤 큰 2층 건물이다. 마을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모양이다. 아래층 이발소에서 여자 이발사 두 명이 이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작은 공원이 나온다. 젊은이들이 배구시합을 하고 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배구장 주변을 빙 둘러 서있다.

▲ 빨래와 연탄을 말리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마을을 둘러본 다음 천천히 시내 쪽으로 걸었다. 광장이 나온다. 티비에서 많이 보았던 김일성광장이다. 이곳저곳 건물 옥상에 구호들이 보인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만세!” “선군혁명 총진군” “백두의 혁명정신” 모두 붉은 글씨다.

  광장을 지나니 분수가 뿜어 나오고 하얀 조형물들이 보인다. 선녀들이 군무를 추는 형상이다. 남녀 청년들이 분수대에 걸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학생이라고 했다. 무슨 공부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중국역사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고 웃으며 대답한다. 이곳이 만수대 예술극장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간다. 학교가 끝나 집에 가는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에 작은 기와집이 있어 지나치려다 보니 현판이 세워져 있다. “숭령전”, 단군을 제사지내던 곳이라고 안내판에 설명되어있다.

  호텔 부근 리어카 노점상에 홍시감이 먹음직하여 한 봉지 사고 싶었는데, 이곳 돈이 아니면 받지 않는다고 고개를 흔든다. 낯을 제법 익혔으니 달러를 받아도 될 법한데 똑 같은 대답을 들었다.

  호텔 구내식당에서 된장국을 주문해 저녁을 먹었다. 한 그릇에 2달러 50센트다. 달이 밝다. 대동강으로 안내원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보름달 아래 펼쳐지는 대동강변의 정취가 그만이다. 철교를 따라 아치를 그리는 불빛이 강물이 비친다. 강 건너 저쪽은 어둠에 쌓여있다.

▲ 만수대 예술극장 앞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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