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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시내 투어에 나서다임영태의 멕시코-쿠바 여행기 (18)
임영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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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8  08: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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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아바나 혁명광장에 있는 쿠바 혁명의 멘토 호세 마르티 동상.[사진-임영태]

아바나의 아침을 만나다

6월 17일 수요일. 쿠바의 아바나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이다. 나는 6시경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아직 조용한 편이다. 멕시코시티에서 묵었던 숙소처럼 큰 도로변이 아니어서 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낮에는 날씨가 덥지만 아직까지 아침은 시원하다. 숙소 주변 아바나 시내를 한번 돌아보고 싶다. 6시 30분경, 이 대표와 함께 쿠바 아바나 구도시의 아침 산책길에 나섰다.

동네 공원을 지났다. 저녁에는 몰랐으나 아침에 보니 세르반테스 동상이 있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대성당과 광장이 나왔다. 어제 저녁에는 밤늦게까지 광장 옆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으나 지금은 조용하다. 조금 더 해변 쪽으로 내려가니 우리가 저녁을 먹은 ‘라 모네다 쿠바나’식당이 나왔다. 저녁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건물이 낡았다.

식당은 구도심에서 해안으로 통하는 마지막 길에 위치해 있었다. 5분도 안 되어서 말레꼰 해변에 도착했다. 우리는 말레꼰 해변을 따라 걸어서 신도시 방향으로 걸어갔다.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1킬로미터 정도 걸었더니 신도시가 저 멀리에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신도시까지는 못가고 해변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말레꼰 해변의 경치가 환상적이다. 그러나 저 멀리 아바나를 상징하는 까만 연기를 내품으면서 타오르는 불꽃이 계속 우리를 거슬리게 한다. 아바나 바닷가의 상쾌한 아침 공기 전체가 오염되는 느낌이다. 왜 저 공장의 불꽃은 끌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불꽃은 타오르더라도 매연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쿠바와 관련된 TV방송 다큐멘터리에서 쿠바의 에너지 위기 극복 과정을 본 기억이 났다.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에너지원을 전적으로 해외 수입에 의존해왔던 쿠바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봉착했다. 발전소와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트랙터와 승용차가 운행을 멈췄다. 산업은 마비상태에 빠졌고, 비료생산이 중단되면서 농업도 붕괴되었다. 1992년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농업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농장을 해체하고 생산자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을 위한 대안 공동체를 조직, 운영했다. 집단농장을 해체하고 소규모의 가족영농을 확대하였으며, 담배와 사탕수수 등에 편중됐던 대농장 중심의 농업생산 구조를 해체하고 콩, 옥수수, 쌀, 야채, 과일 등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을 심는 다각화 영농과 생산성 향상으로 식량위기를 극복했다.

석유중심의 에너지 수요를 최대한 줄이고 사탕수수 찌꺼기 등을 활용한 대체에너지를 개발, 이용했다. 개인승용차 대신 대규모 운송수단을 늘리고, 카풀과 히치하이킹 등 운반차량의 공동이용을 의무화해 했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에너지 위기를 넘겼다. 

우리는 쿠바에서 전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승용차가 노후화 되어서 매연이 심했지만 에너지가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차는 없었다. 고속도로에서는 히치하이킹을 위해 손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지방 소도시에서는 트럭을 개조해서 사람들을 태울 수 있게 만든 트럭버스를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다. 지방에서는 마차를, 아바나에서는 사람이 발로 움직이는 자전거 택시를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나는 새까만 매연을 내뿜고 있는 불꽃을 보면서, 어쩌면 저것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울인 쿠바인의 필사적인 노력의 상징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불을 끄고 다시 붙이려면 상당한 에너지 손실이나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말레꼰 해변의 일부 지역이 기름때로 오염되어 있어도 제대로 정화하지 못하는 것도 쿠바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까만 연기를 내뿜으며 아바나의 상쾌한 아침공기를 메케하게 만드는 불꽃을 바라보며 말레꼰 해변을 걷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 바다를 바라보고 찍은 모습.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약간 어둡다. [사진-임영태]

 

   
▲ 시꺼먼 연기를 내품으면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 이유가 있겠지만 쿠바의 아침공기를 오염시켜 안타까웠다. [사진-임영태]

 

   
▲ 아침 산책길에 만난 개 한 마리. 우리를 오랫동안 쫓아왔다. 아침이어서 빈손이라 아무것도 줄 게 없어서 미안했다. [사진-임영태]

 

   
▲ 말레꼰 해변의 풍경. 배들이 떠 있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이다. [사진-임영태]

 

   
▲  말레꼰 해변의 도로 풍경. [사진-임영태]

 

   
▲  말레꼰 해변의 풍경. 낚시하는 사람들. [사진-임영태]


아침은 과일과 빵, 에스프레소로

해변 곳곳에 산책 나온 사람들도 보였다. 홈리스인지, 밤새 술을 마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변 둑 위에 누워서 자고 있는 광경도 가끔 목격된다. 아침부터 알콜에 찌든 채 공원에 앉아 있는 사람도 한두 명씩 보인다. 나는 쿠바에서 알콜 중독자로 보이는 사람을 종종 만났지만, 관광객에게 구걸 행위를 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빈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홈리스 행색을 하고 길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몇 번 보았지만 정말 그가 홈리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구걸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는 거리에서 구걸 행위를 하는 사람을 수시로 만났으나 알콜 중독자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목격하지 못했다. 홈리스들도 거의 못 만났다. 짧은 시간밖에 체류하지 못한 미국 LA에서는 홈리스와 알콜 중독자를 번화가에서도 수시로 보았다. 다운타운의 밤거리를 구경하지 못했지만 친구 이야기에 따르면 LA다운타운의 밤거리는 홈리스들의 천국이라고 한다. 한 시간 반 남짓 걸으며 구경했던 할리우드 거리에서도 나는 알콜 중독자와 홈리스를 여럿 목격했다.

짧은 기간에 만난 멕시코, 쿠바, 미국은 각각 그 나라의 특성을 그런 모습에서 잘 보여주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것만으로도 그 각각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고민할 거리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8시 30분경 아침 산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8시 40분경 마이클의 집으로 아침 식사를 하러 갔다. 9시부터 아침 식사를 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침 식탁은 옥상 야외에 마련돼 있었는데, 시원하고 전망도 좋았다.

먼저 망고주스와 과일이 한 접시씩 나왔다. 파인애플, 망고, 파파야, 구아바, 바나나, 수박 등이 한두 조각씩 있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망고는 제대로 된 맛이 났지만, 수박은 단맛이 거의 없었다. 파파야와 구아바도 밍밍해서 우리 입맛에 잘 안 맞았다. 그래도 나는 과일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다음으로는 계란 후라이 두 개, 빵과 버터, 꿀과 설탕이 나왔고, 에스프레소 커피도 곁들여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계란 크기가 약간 작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사람들은 계란 후라이를 꼭 2개씩 해주었다. 아마도 우리와 달리 계란 후라이도 요리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쿠바 사람들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설탕을 듬뿍 넣어서 마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봤더니 쓴 맛이 중화되고 한결 먹을 만했다. 평소 쓴맛 때문에 보통 한국인은 에스프레소는 거의 마시지 않는 편이다. 내 기억에도 에스프레소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아바나에 있는 동안 우리는 매일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겨 마셨다.

   
▲  아침 해변의 풍광 1. [사진-임영태]

 

   
▲  아침 해변의 풍광 2. [사진-임영태]

 

   
▲  아침 해변의 풍광 3. [사진-임영태]

 

   
▲  아침 해변의 풍광 4. [사진-임영태]

 

   
▲  아침 해변의 풍광 5. [사진-임영태]

 

   
▲ 숙소 근처의 공원과 건물들 1. [사진-임영태]

 

   
▲ 숙소 근처의 공원과 건물들 2. [사진-임영태]

 

   
▲  아침 산책길에 만난 학생들. [사진-임영태]

 

   
▲ 아침 식탁의 과일 접시. [사진-임영태]


혁명광장에서 만난 것들

아침 식사 후 아바나 시내를 도는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혁명광장에 가기로 했다. 시티투어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계속 운행되고 있었고, 한번 표를 끊으면 하루 종일 내렸다 탔다 반복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격은 1인당 5꾹(6,250원)이다. 말레꼰과 베다도 지역까지 아바나 서쪽을 도는 T1과 중앙공원에서 출발해 모로성 등 아바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도는 T3가 있었는데, 우리는 T1을 탔다.

10시 20분쯤에 버스를 타고 투어를 시작했다. 버스는 중앙광장에서 출발해 말레꼰 해변을 따라 신시가지 쪽으로 나아갔다. 신시가지의 리베라 호텔과 프레지던트 호텔 등 호텔지역을 지나 녹색의 푸른 도시를 보여주며 달렸다. 오픈된 2층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과 함께 시가지를 돌아보는 기분이 즐거웠다.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따가운 햇살이 조금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참을 만했다.

시내를 40분 정도 달렸을까? 저 멀리 혁명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11시 10분, 버스는 일단 혁명광장 앞에서 잠시 멈췄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내려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혁명광장은 넓었다. 5월 1일 메이데이, 7월 26일 혁명운동(주1)과 쿠바 혁명을 기념하는 군중대회가 열리고 미국을 규탄하는 카스트로의 열광적인 연설이 펼쳐지는 곳이다.

혁명광장 정면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호세 마르티 좌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호세 마르티 기념관과 함께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기념탑은 쿠바의 독립운동가이며 사상가, 시인인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여 1948~51년에 건설되었는데 다섯 개의 기둥을 연결하여 각층이 오각별 모양으로 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티스타 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이 기념탑은 카스트로 쿠바 혁명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으며, 과거 냉전시대 공산주의 국가에서 만든 기념탑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탑의 높이는 109미터라고 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성격은 유사한 측면이 있는 북한의 주체사상탑은 높이가 120미터라고 한다.

혁명광장 건너편 내무성 건물과 통신성 건물에는 철근으로 만들어진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이 만들어져 있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유명한 그 모습이다. 이 두 사람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대표하는 혁명가, 게릴라 대장이다.

체 게바라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기에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 없을 지경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였으나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일행을 만나 쿠바 혁명에 가담하게 됐으며 게릴라 대장이 되었다. 그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건설 과정에서 중앙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어느 날 홀연히 쿠바를 떠났다. 그는  세계 혁명, 남미 혁명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 볼리비아 정글에서 싸우다가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뒤 미 CIA의 압력에 의해 재판도 없이 학살되었다. 그 후 그는 진정한 혁명가, 영원한 혁명가,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고, 지금도 영원한 청춘의 우상으로서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쿠바 혁명 과정에서는 체 게바라를 능가하는 활약을 펼친 뛰어난 게릴라 대장이었다. 시엔푸에고스는 카스트로와 함께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에도 참가했고, 혁명의 막바지인 1958년 12월 30일 야과하이 전투에서 바티스타의 정부군을 격파하여 혁명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다. 그 뒤 그는 ‘야과하이 영웅’이란 별명을 얻었고, 1959년 1월 3일 혁명군 주력부대를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했다.

시엔푸에고스는 혁명 성공 뒤 농지개혁을 주도하는 한편, 반혁명 세력을 소탕하는 작전을 지휘하면서 혁명 후 건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는 쿠바 혁명 성공 9개월 후인 1959년 10월 비행기 사고로 실종되면서 역사의 장에서 퇴장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1932년 생)였다.(주2)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가까웠던 체 게바라는 그가 죽은 뒤 자기 아들에게 카밀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시엔푸에고스가 있으며, 쿠바의 20페소 지폐 주인공이기도 하다.(주3)

베레모를 쓴 채 심각한 표정인 게바라의 초상과 달리 밀집모자를 쓴 시엔푸에고스의 초상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논쟁적이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게바라와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동지였다고 전해진다. 혁명 직후 대중 연설을 하던 카스트로가 고개를 돌려 연단에 있던 시엔푸에고스에게 “카밀로,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주4)

체 게바라의 철근형상 아래에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고 적혀 있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철근형상 아래에는 ‘피델 잘 지내지?’(Vas bien Fidel)라고 쓰여 있다. 이 말에서도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아바나 중심가인 중앙광장의 호세 마르티 동상. [사진-임영태]

 

   
▲ 아바나 시내를 도는 2층 투어버스. [사진-임영태]

 

   
▲  과일음료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 [사진-임영태]

 

   
▲ 쿠바는 올드카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된 차들이 많다. [사진-임영태]

 

   
▲ 투어버스를 타고 아바나 시내를 돌다. [사진-임영태]

 

   
▲ 혁명광장에 있는 호세 마르티 기념탑. [사진-임영태]

 

   
▲ 혁명광장 건너편 건물의 체 게바라 상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상. [사진-임영태]


쿠바 혁명의 멘토 호세 마르티

혁명광장과 혁명기념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호세 마르티 기념관을 관람했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에서 가장 추앙받는 독립운동가이며 쿠바 혁명의 정신적, 이념적 선구자다. 그가 남긴 명언들은 그의 사상적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 한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려 들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를 위해 투쟁할 자격이 있다.”
“게으르지도 않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닌데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불의가 있는 곳이다.”(주5)
“억압받고 있는 국가에서 시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전사가 되는 것뿐이다.”

모두 호세 마르티가 남긴 말이다. 그는 1895년 2차 쿠바 독립 전쟁 당시 독립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미국에서 배를 타고 몰래 들어왔다가 스페인 군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시인이자 독립운동 이론가이며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행동가였다.

호세 마르티는 10대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해 두 번이나 스페인으로 추방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구의 진보적인 사상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는 중남미의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들과 달리 단순한 쿠바의 독립을 넘어서 현대적인 사상, 노동자와 근로대중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한 나라의 건설이라는 진보적이며 민중적인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현대 쿠바 혁명의 이념적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호세 마르티는 쿠바에 돌아온 뒤에도 국내에서 오래 지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는 미국에서 쿠바 독립을 위해 싸울 조직을 만들었고, 국내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마지막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미국에서 배를 타고 몰래 쿠바 섬으로 입국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60여년 뒤 카스트로를 비롯한 젊은 혁명 전사들에게 하나의 영감으로 작용하였다. 그란마 호를 타고 혁명을 위해 쿠바 섬으로 돌아온 혁명 전사들의 행위는 바로 호세 마르티의 행동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마르티는 입국 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곧 스페인군대에 학살되고 만다.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쿠바 혁명 후 그는 쿠바의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다시 탄생했다. 쿠바 혁명의 주역들은 그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한 자식들로 자처했고, 그는 전 국민의 추앙을 받는 역사의 인물도 거듭 태어났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그는 쿠바 혁명의 정신적 스승이자 모든 쿠바인의 멘토가 되었다.

호세 마르티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오늘날 쿠바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되고 있다. 그가 지은 시 ‘관타나메라’에 곡이 붙여져 전 쿠바인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고 있다. 관타나메라는 ‘관타나의 아가씨’란 뜻이라고 하는데,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골아가씨를 노래한 시이다.(주6) 여기에 곡을 붙인 ‘관타나메라’노래는 우리의 아리랑 같은 노래라고 할 수 있다.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 과정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행적 뿐 아니라 독립전쟁 시기의 기록과 사진들, 카스트로 쿠바 혁명의 기록들과 최근의 사진들도 일부 있다. 혁명광장을 빈틈없이 채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카스트로의 사진도 있다. 2002년 카리브해 바닷가에서 쿠바기를 흔들며 혁명의 사수 의지를 밝히는 카스트로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다. 쿠바 혁명과 호세 마르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려는 카스트로 쿠바 정부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관람하는 동안 해군(하)사관학교 생도들이 기념관을 관람하고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의 열심히 듣는 대부분의 학생들과 달리 옆에 있는 휴식자리에 앉아서 연애에 열중하고 있는 남녀 생도의 모습도 눈에 띠었다. 우리 눈에 금방 띨 정도면 모두들 다 알고 있겠지? 우리나라 사관학교에서는 연애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긴 다른 모양이다. 사랑과 예술의 천국 쿠바의 진면목이 아닐는지.

기념탑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면 아바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일 것 같다. 기념탑은 언뜻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탑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으나 모양도 다르고 높이도 그에 못 미친다. 엘리베이터를 설치,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유료 전망대로 이용하면 어떨까? 그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아바나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 혁명광장에 있는 호세 마르티 동상과 기념탑.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옥상에 올라 혁명광장을 바라본 모습. 뒷모습의 호세 마르티 동상 왼쪽에 체 게바라 상, 로른쪽에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상이 보인다.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 모습 1.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 모습 2.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 모습 3.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1.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2.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3.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4.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5.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6.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7. [사진-임영태]

 

   
▲ 호세 마르티 기념관 내부의 전시 자료들. [사진-임영태]

 

   
▲ 기념관 견학을 온 (하)사관학교 학생들. [사진-임영태]

 

   
▲ 기념관에서 만난 북한. 기념관 한켠에서 북한 사진전이 열렸다. [사진-임영태]

 

   
▲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 속에 있는 호세 마르티. [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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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120명의 청년들이 바티스타 군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청년들이 희생되었고, 피델 카스트로 또한 군에 체포돼 살해될 위험에 처했으나 살아남아 재판을 받고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쿠바에서는 매년 7월 26일을 혁명이 시작된 날로 기념하며 이날 대규모 행사가 혁명광장에서 벌어진다.

2) 시엔푸에고스는 1932년생이다. 참고로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생, 체 게바라는 1928년생, 라울 카스트로는 1931년생이다. 그는 혁명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였던 셈이다.

3) 참고로 호세 마르티는 1페소, 체 게바라는 3페소 지폐의 주인공이다.

4)다음블로그(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ESbw&articleno=11352493#)

5) 사진일기(http://blog.joins.com/yoo003) 참고

6)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나는 진실한 사람/ 야자수 무성한 고장 출신//
죽기 전에 이 가슴에 맺힌 시를 노래하리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내 시는 화창한 초록색/ 내 시는 불타는 선홍색//
내 시는 상처 입은 사슴/ 산 속 보금자리를 찾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이 한 몸 바치리라//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나는 바다보다 더 좋아//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김도균, 관타나메라에 스며 있는 '쿠바의 눈물', <오마이뉴스> , 2014.7.20 재인용 ;
http://www.ohmynews.com/NWS_Web/tenman/report_last.aspx?CNTN_CD=A000201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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