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대동강 새벽 풍경

10월 5일(맑음), 북한 체류 이틀째다.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5시 좀 넘은 시간이다. 평양 시내에 왠 닭울음소리? 잠결에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양 첫 밤이라 너무 긴장했을까.

  6시 15분 기상. 아직 어둑어둑 하다. 안내원이 벌써 나와 몸을 풀고 있다. 앞으로 3주간 나를 안내해 줄 김광현 참사를 그냥 편하게 ‘김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대동강 산책을 나간다. 지하도를 내려가 큰 길을 건넌다. 지하도에 전등은 달려있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아 깜깜하다. 일찍 출근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길에 보인다.

  강물이 잔잔하다. 강변 따라 해묵은 버드나무가 늘어서있다. 평양을 ‘유경柳京’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오른쪽으로 철교가 보이고 강 건너에 주체탑이 높이 서있다. 강가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언덕에 <3,500톤급 종합봉사선 ‘무지개’호 전경도>가 그려져 있다. 건조하고 있는 배가 지척에 보인다. 배는 조선소에서만 만드는 것으로 알았는데 저런 식으로도 건조하는가 보다. 군인 한 명이 배 쪽으로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 대동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철교, 건조중인 배, 멀리 양각도 호텔도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왼쪽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이른 새벽이라선지 사람이 많지 않다. 강 위에 각종 놀이 배들이 떠있다. 작은 보트다. 강물에 무슨 구조물이 삐죽삐죽 나와 있어서 무엇인가 물었더니 조명등이란다. 이곳이 광장 앞이라 저녁 행사가 있을 때 여기서 조명을 비춘다고 한다. TV에서 불꽃놀이를 보여주던 바로 그곳이다.

  2층 유람선이 정박해 있다. 꽤 큰 배다. 맨 위에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글이 큰 글씨로 붙어있다. 건너편 언덕에 “식당배 <대동강호>안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평양랭면, 회국수를 비롯한 주식류, 여러 가지 료리들, 대동강맥주와 청량음료를 봉사한다고 써 있다. 봉사시간은 12시~15시, 17시 30분~21시. 일요일은 휴식일이다. ‘주의사항’ 1,식당배안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2.술에 취한 사람, 부피가 큰 짐을 가진 손님, 애완용 동물은 배에 오를 수 없습니다. 3. 11미만의 어린이는 보호자 없이 배에 오를 수 없습니다. 고 명기되어 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7,8명 아주머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오고 있다. 

  대동문 앞에 이르렀다.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대동강이 한 눈에 보인다. 강 건너편에 주체탑이 보인다. 서울에 남산, 광주는 무등산, 부산은 해운대가 떠오르듯 평양 하면 생각나는 것이 대동강과 을밀대다. 유구한 평양의 역사를 품에 안고 대동강은 저렇게 말없이 흐른다.

  대동문(大同門)은 대동강을 마주하여 서 있는데,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이곳을 통해야만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동문 정면에 현판을 세 개나 써 붙여 놓았다.  맨 밑은 무지개문 머릿돌에 음각으로 새겼고, 문루 1층과 2층에도 걸려있다. 1층 현판은 단군 이래 최고의 명필이었다는 봉래 양사언(1517-84)이 초서로 쓴 현판이고, 2층은 평안감사 박엽(1570-1623)이 쓴 것이라 한다. 

▲ 대동문, 현판을 세 개나 붙여 놓았다. 1층 현판은 단군 이래 명필 양사언의 필체다. [사진제공-정찬열]

  대동문 바로 옆에 연광정이 있다. 연광정은 보수중이다. 지붕 서까래를 갈고 있다. 둘레를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대동문 뒤편으로 최신형 고층 아파트들이 서있다. 창전거리라고 한다. 9년 전 왔을 때는 없었던 건물들이다.

 어느새 왔는지 초등학교 2,3학년 정도의 아이들 대여섯 명이 빗자루를 들고 대동문 주변 청소를 하고 있다. 이름이 뭐냐고 한 아이에게 말을 건네자, 대답은 하지 않고 뭐라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며 논다. 아이들은 저렇게 아이다워야 한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 말에 어깃장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고분고분 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소 판돈을 훔쳐 달아났던 정주영. 그가 아버지 말씀을 따라 그대로 집에 눌러 앉았다면 천하의 정주영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저만치에서 웃통을 벗고 뛰는 노인도 보인다. 9년 전 대동강변에서 푸에블로 호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새로 지은 전승기념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성당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잡아놓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써낸 서류에 종교란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알았던 모양이다. 10시 미사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김성주 소학교’ 앞을 지난다. 돌판에 음각으로 “경애하는 김정은 장군님 고맙습니다”는 말을 새겨놓은 게 보인다.

대중교통은 무궤도 전차, 택시가 많이 늘었다
 
  식당에 뷔페식 음식이 준비되어있다. 호텔 손님을 위한 아침 식사다. 곱게 차려입은 안내원이 차를 따라준다. 향이 은은하고 좋아 무슨 차냐고 물었더니, 쑥차라고 한다. 쑥을 다려 차를 만들었다는데 맛이 특별하다. 건강에도 좋다고 한 마디 덧붙인다.

  손님들이 식사하는 곳과 안내원들이 식사하는 장소가 다른 모양이다. 김 참사는 다른 룸으로 들어간다. 옆자리에 어제 공항에서 만났던 얼굴들이 보인다.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일행과 가족을 만나러 미국에서 왔다는 분. 또 한 분은 장애자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한식과 빵이 차례로 놓여있다. 죽과 밥, 몇 가지 나물과 김치와 국,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것인지 빵도 종류별로 세 가지나 된다. 쌀죽이 맛이 있다. 김치도 사근사근하고 고사리나물이랑 미역국이 입맛을 당긴다.

  아침을 먹고 나서 방에 올라가 샤워를 했다. 더운물이 시간제로 나온다고 했다. 어제 저녁 빨지 못한 양말과 속옷을 빨아 널었다.

  안내원과 약속한 시간보다 좀 일찍 밖으로 나왔다. 로동신문사 쪽으로 무궤도 전차가 선다. 정류장인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인데 꽤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버스 두 대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지하철처럼 전선을 따라 움직이지만 철로가 아닌 아스팔트 위로 움직이는 버스다. 마침 김 참사가 보인다.

 “김 선생, 무궤도 전차 승차 요금이 얼마입니까?”
 “5원입네다.”

  5원? 달러로 치면 얼마나 될까.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공식 환율 100:1로 치면 5센트가 되겠지만, 실제로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은 8000:1정도라니 계량이 쉽지 않다. 이곳에서 외국인은 공식적으로 달러와 유로화, 그리고 중국 돈 위안화가 통용된다고 한다.

  북한과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는 외국 돈은 통용되지 않는다. 외국인은 환전소를 통해 외국인 전용화폐인 쿡(CUC)로 환전을 한다. 공식 환율은 달라와 쿡이 1:1 비율이다. 화폐운용 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개방적이다. 

▲ 무궤도 열차. 전선을 따라 아스팔트 위로 달리는 버스다. [사진제공-정찬열]

  김 참사가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일요일은 운전사가 쉬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성당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30분 정도를 헤매다가 가까스로 택시를 잡았다. 그것도 성당으로 가는 큰 길이 지금 포장공사 중이어서 성당 가까운 곳까지만 간다는 조건이다. 운전사에게 “평양시내에 택시가 몇 대쯤 있을까요” 물으니, “4,5백대쯤 될겁네다” 대답한다. 택시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늘었다고 한다. 택시 회사는 5개라고 했다. 큰 길을 15분쯤 갔을까. 샛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더니 어느 지점에 내려준다. 택시비를 물었다. “다섯 달러입네다.”

  낡은 아파트 단지 사이를 10분쯤 걸어간다. 높지 않은 2,3층 아파트다. 흙먼지가 일고 저만치 웅덩이에서 쓰레기를 태우고 있다. 연탄을 말리는 모습도 보인다. 서울 산동네에서 많이도 보았던, 저게 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다.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1980년대에 지은 아파트라고 한다. 길가에 백여 명 되는 남정네들이 둥개둥개 모여 있다. 부근 주민들인 성 싶다. 무슨 논의를 하려는 것일까. 의견이 맞지 않는 듯 서로 째려보는 모습이 한바탕 소동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다.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 신자 대표가 진행하는 공소예절이다
  
  성당에 도착했다. 좀 늦었다. ‘장충성당’ 현판이 보인다. 어떤 분이 문 앞에서 반갑게 맞아준다. 미사가 진행 중이다. 맨 뒷줄에 가서 가만히 앉았다. 100여명 신자들이 앉아있고,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고 계신다. 앞쪽 벽 놓은 곳에 예수님과 성모님 사진이 걸려있다.

  강론을 하는데, 남측 박근혜 대통령 이야기가 나오고 10.4선언에 관계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어제가 10.4선언 7주년이어서 거기에 맞추어 강론을 준비한 모양이다.

  신자들의 기도가 절차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모든 의식이 가톨릭 미사 순서에 따라 마무리 되는가 보다 생각하는데, 헌금 절차와 신자들의 기도가 끝난 다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바로 헤어진다. 영성체 봉헌 의식 없이 끝나서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신자 대표가 진행하는 공소예절이었다. 신부님이 계시지 않으니 영성체 순서가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서 신자 대표와 인사를 나누었다. 김철웅(프란치스코)이라고 반갑게 악수를 청한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밖에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신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터가 꽤 넓고, 별채 작은 건물이 서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성당이다. 1988년 성당을 세웠고, 현재 신자가 300명 정도. 북한에 있는 유일한 성당이다.

  전국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몇 명쯤이나 되는지 물었더니 3천 명 정도로 추정한다고 답변한다. 북한 주민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는 중에 김철웅 회장이 “외부에서 잘못 알고 이러니 저러니 얘기들을 하는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함부로 말들을 한다”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한다.

▲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 [사진제공-정찬열]

  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길 건너 공원에 사람들 10여명이 빙 둘러서서 무엇인가 구경하고 있다. 옆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꽤 먼 곳에서 온 분도 있는가 보다. 호기심에 가 보았더니 나무그늘 아래 장년 남자 둘이 장기를 두고 있다. 장기를 두는 사람은 담배가 타 들어가 곧 손가락이 데일 성 싶은데도 게임에 푹 빠져있다. 옆에 서있는 사람들은 훈수를 못해 몸이 근질근질 하는 모양이다. 침을 삼키는 사람도 있다. 모두들 장기에 홀려 있어서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관심조차 없다. 몰아의 경지다. 장기판을 슬쩍 넘겨다보니 장기 알 ‘궁’이 한나라 ‘漢’자와 초나라 ‘礎’자인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한글로 ‘궁’이라고 표기되어있다.

▲ 장기에 푹 빠져 있다. 한글로 쓴 ‘궁’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성당 옆 장충공원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다. 아이들은 시이소를 타고 놀고 있고, 철봉에 매달리는 녀석,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도 보인다. 부모들은 의자에 앉아 어린애들이 미끄럼틀을 타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티격태격 싸움질을 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요일 풍경이다.

  김 참사와 함께 택시를 잡을 수 있는데 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길가에 “위대한김정은동지따라최후의승리를향하여앞으로!” 붉은 글씨로 쓴 현판이 걸려있다. 열 명 정도의 초등학생들이 그룹을 지어 백 팩을 매고 걸어간다. 놀러 가는 모양이다.

  <군밤>이라고 쓴 가게가 보인다. 새로 만들어 붙인 상호인 듯 깨끗하다. 상호 아래 ‘동대원구역종합식당(10)’이라고 작은 글씨가 보인다. 군밤만 파는 곳인 줄 알았는데 유리창에 ‘냉동사이다’ ‘얼음물’도 판다고 표시해 놓았다. 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샀다. 북한 돈만 받는다고 하니 옆에 있던 김 참사가 대신 돈을 내준다.

  밀가루를 튀겨 만든 과자다. 길을 가면서 엄마 손을 잡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꼬마를 만났다. 귀여운 마음에 과자를 하나 건네주려는데 엄마가 받지 말라고 손짓을 한다. 아이가 머쓱하여 내민 손을 접는다.

고려호텔에서 미국에 전화. 평양역 시간표를 사진찍자 역원이 제지하다

   택시를 타고 고려호텔로 향했다. 집에 전화를 해야겠는데 해방산 호텔은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단다. 고려호텔은 24시간 오픈이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내일까지 미룰 수가 없다.

  고려호텔은 북한에서 최고급 호텔이다. 엘에이 평통위원 방문단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 호텔에서 7일간 묵었다. 9년 만에 왔는데 거의 그대로다. 건너편에 서있던 음식 부스도 눈에 익다. 주위의 거리 모습도 변함이 없다.

 2층 전화국이 한산하다. 두 사람이 일을 하고 있다. 전화요금은 1분당 5달러 50센트.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녹음을 남겨놓았다.

  여기서 평양역이 멀지 않다. 안내원과 함께 평양역으로 걸어간다. 10월의 하늘이 높고 푸르다. 평양역도 옛 그대로다. 건물 높은 곳에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보인다. 광장은 오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택시 두 대가 한가롭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광장 동쪽 끝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 눈길을 주고 있다. 어느 해외 교포가 기증했다고 한다. 광장 건너편 건물 옥상에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 “조선의 심장 평양”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자전거 리어카인 3륜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도 보인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전광판에 기차 시간표가 적혀있다. 평양-만포, 평양-묘향산, 평양-청진, 등의 시간표와 함께 “평양-평강 행 13렬차는 오늘 운행하지 않습니다” 등, 열차편을 안내를 하고 있다. 기념이 되겠다 싶어 카메라를 꺼내 전광판 시간표를 찍었다. 그런데 정복을 입은 여직원이 안에서 뛰어나와 “왜 사진을 찍습네까?” 따져 묻는다. 이런 거 찍으면 안 되느냐, 고 되묻자 “동무는 누구냐”고 채근한다. 마침 저 만치 서 있던 김 참사가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고 달려와 미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설명을 하자 누그러진다.

▲ 평양역 앞 광장- 멀리 대형 스크린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골목에 노점상이 여기저기 보인다. 달라진 모습이다

 연극이나 한 편 보자고 제안했다. 표를 예매해야 한다고 해서 안내원과 같이 극장 매표소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 와서 보니 숙소인 해방산 호텔 바로 건너편이다. 김 참사가 표를 사러 극장으로 들어간 사이에 골목 어귀에서 리어카에 과일을 놓고 팔고 있는 과일장수 아주머니에게 갔다. 사과와 수박, 오렌지, 바나나 등을 팔고 있다. 계란 1개 1,100원이라고 가격이 붙어있다.

  “파란 사과와 빨강 사과 중 어느 게 더 맛이 있습니까?”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게 다르겠지요. 호물호물 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붉은 사과를 좋아하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파란 사과를 좋아하고...”

  “하루에 얼마나 파십니까?”

 “날마다 다릅네다. 수요가 많으면 많이 팔고, 적으면 적게 팔지요.”

  그러고 보니 물으나마나한 것을 물어본 셈이 되었다. 아주머니 말솜씨가 수준 이상이다. 사과 하나 사려고 달러를 내미니 북한 돈 아니면 받지 않는단다. 노점상에선 달라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금시 잊어먹었다.

▲ 노점상, 아주머니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사진제공-정찬열]

  9년 전 평양에 왔을 때는 이런 노점상을 볼 수가 없었다. 몇 년 전부터 노점상이 많아졌는데 국가의 허락을 얻어 장사를 하고 이윤의 일부는 정부에 바친다고 했다.

  북한에 시장경제가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90년대 후반 이후 장마당 형태의 시장이 조성되었다고 하니 지금쯤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국은 1982년 ‘계획경제를 주로 하고 시장의 조절을 부수적으로 한다’는 정도의 시장 개념을 처음으로 경제정책에 도입했다. 그리고 10년 만인 1992년 장쩌민 전 주석이 14차 당대회에서 “중국 경제체제 개혁의 목표는 사회주의시장경제에 있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 후 20여 년 간 중국이 초고도 성장을 이어가며 마침내 미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예는 쿠바에서도 볼 수 있다. 쿠바는 2010년 9월 <경제 사회개혁>을 선언했다. 식당, 택시 등, 178개 업종에 대해 자영업을 허가했다. 그 결과 각 도시에 수많은 자영업이 생겨나 시장경제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북한도 그런 모습을 닮아가는 것일까. 지켜볼 일이다.  

연극공연.  “야아, 곱다고 기러시는데 사진 씩게 하라우” 시어머니 말씀이 지엄하다

  김 참사가 연극표를 사왔다. 26달러다. 현지인은 훨씬 싼 값에 볼 수 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요금체계가 현지인과 외국인과는 현저하게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식당에서도 같은 음식인데 내국인과 외국인이 내는 음식 값이 크게 다르단다.

  국립 연극극장 앞에 많은 관람객들이 기다리고 있다. 잘 지은 대리석 건물이다. 2010년도에 김일성 주석 100세를 기념하기 위해 군인들이 4개월에 완공했다고 김 참사가 설명을 한다. 어제 공항에서 보았던 “조선속도”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늘 공연 예정인 “딸에게서 온 편지” 포스터가 보인다.

  관람석이 300석쯤 되어 보인다. 자리를 찾아가 앉았는데 바로 뒷자리에 어린이가 할머니와 함께 앉아 있다. 귀여워서 말을 걸었다. 다섯 살 김명호라고 한다, 사진을 한 장 찍으려고 하니 아이의 어머니가 손으로 카메라를 막는다. 그 때 할머니가 “야아, 곱다고 기러시는데 사진 씩게 하라우” 하자, 못이긴 척 손을 내린다. 할머니와 아들 며느리, 손자 3대가 연극을 보러 왔는가 보다.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길 속에 사랑이 가득하다.

▲ 연극을 보러온 할머니와 손자. [사진제공-정찬열]

  객석을 둘러보니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엄마, 친구들과 함께 온 학생들, 군인들도 군데군데 보인다. 내 옆에 앉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만화책을 보고 있다. 만화를 좀 보자고 하여 들춰 보았는데, 여러 사람 손을 거쳐 왔는지 많이 낡았다. 어릴 적, 저렇게 책장이 너덜너덜 하도록 만화책을 돌려보던 기억이 새롭다. 평양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황해북도 린산군 린산 고급중학교 5학년이란다. 나이는 열다섯, 5일 전 평양에 왔다고 한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무대 조명을 받으며 낭낭한 목소리로 얘기를 한다. 시작 멘트다. “위대하신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연극을 보러 갈 때는 옷을 단정히 입고 관람질서를 자각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연극은 배워야만 한다, 는 주제로 김일성 주석님께서 제작하여 올렸던, 60년 전의 연극 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는 연극입니다”라고 소개를 한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아는 게 힘이다, 는 계몽적인 내용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무대 장치도 손색이 없다. 이곳 배우들은 모두가 국가에서 지급하는 보수를 받아 생활하며 일반인과 별 차이 없는 평범한 생활을 한다고 했다. 연기자로서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서방 세계의 배우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연극이 끝나 밖에 나오니 수많은 인파가 길가에 대기하고 있다. 아시안 게임 출전 선수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손에 손에 꽃이 들려 있고, 드문드문 팻말을 들고 있다. “어머니 조국의 축하의 인사를!”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10여분을 기다리니 선수를 태운 무개차가 나타난다. 대형 무개차 앞부분은 꽃으로 장식하고 몸통은 국기를 덮었다. 목에 화환을 건 선수들이 타고 있다. 사람들이 꽃이나 국기를 흔들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보도진이 선수단을 따라가며 중개를 하고 호위하는 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간다. 

  남측에서도 외국에 나간 선수들을 환영하기 위해, 혹은 귀국하는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던 시절이 있었다. 시청 앞 높은 빌딩에서 색종이를 뿌려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풍경도 떠오른다.

▲ 아시안 게임 선수단을 환영하는 시민들. [사진제공-정찬열]

  선수단이 지나가자 삼삼오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이 나올 수 있느냐고 김 참사에게 묻자, 조직을 통해 동원된다고 설명한다. 각 지역, 학교, 직장 단위로 구성된 조직망을 통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조직에 구속되어 산다는 건 자유를 제약 당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안내원에게 물었다. “개인은 근본적으로 조직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것, 우리나라는 잘못될 자유가 없는 곳이다”란 답변이 돌아온다. 조직에서 안전하고 바르게 인도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성장기에 따라 소년단, 청년단, 조선공산당,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소년단은 초등학교에서 시작되며, 잘하는 아이부터 차근차근 선발하여 경쟁심을 유발시킨다고 했다.

  호텔 구내식당에 들러서 저녁을 먹었다. 아침 식사는 무료지만 점심이나 저녁은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곱들장찌게와 두부 한 모를 주문했다. 밥과 김치, 오이무침이 반찬으로 나왔다. 술이 빠질 수 있나. 대동강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모두 여섯 달러다.

  팁을 놓을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냥 나오려니 좀 미안하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 아침 일찍부터 해질녘까지 꽉 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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