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왜, 어떻게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는가

▲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필자. [사진제공-정찬열]

미국에 건너온 지 30년이 넘었다. 시집간 딸이 친정집 걱정하듯 밖에 나와 살다보면 고국에 관심이 많아진다. 안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밖에서 보면 잘 보이기도 한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들 중 상당부분이 분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남북분단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늘 불안하고, 남북갈등이 남한 내 이념 대결을 불러일으켜 사회 전반을 옥죄는 변수가 되고 있다. 진영논리에 따른 대립과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 적폐를 해소할 길은 없는가.

  북한동포 몇 백 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타깝고, 참담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치란 무엇이며, 이념이란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분단은 끊임없이 우리 민족을 옥죄고 괴롭힐 것이다. 그런데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했다. 우리의 앞날을 가로 막고 있는 이 족쇄를 후손에게 그대로 물려줘야 하는가. 분단의 벽을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미국 이민 25년이 되는 지난 2009년,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어서 한 달간 국토 종단을 했다. 넓은 미국 땅을 자동차로 여행하던 중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조국 땅을 내 발로 걸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통일이라는 꿈이 점점 멀어져 가는 안타까운 한반도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가 되어야할 그 땅을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종단하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 눈에 보이던 풍경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주 한국일보를 통해 동포사회에 전해드렸다. 그 얘기를 묶어 “내 땅, 내 발로 걷는다”는 책으로 펴냈다.

  남녘 종단을 끝내고 나서, 북녘 땅을 걸어 반도의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곳은 허락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우선 반도를 묶고 있는 허리띠를 따라 걷기로 했다. 종단 2년 뒤인 2011년 5월,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휴전선을 따라 임진각까지 걷고, 강화도를 거쳐 연평도까지 다녀왔다. 19일이 걸렸다. 그 얘기를 “아픈 허리, 그 길을 따라”라는 책으로 묶었다.

  알다시피, 북한은 남한 국적자를 제외한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관광을 허용한다.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길은 두 가지다. 여행사를 통해서 다녀오는 길, 그리고 여행 이외의 목적으로 방문을 원하는 경우 북한의 해외동포위원회(이하 해동)의 승낙을 얻어 다녀오는 길이다. 나의 방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해동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해동에 북녘 땅을 걸어가고 싶다는 신청을 했다. 내가 쓴 책도 함께 보냈다. 한반도 종단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북한 산천을 걸으면서 주민들을 만나 여러 가지 궁금한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분단 70년 동안 관혼상제는 어떤 모습으로 달라졌고,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있는가. 우리가 북한에 대해 알고 있는 갖가지 얘기들이 사실일까 등.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방문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이제나 저제나 답장을 기다렸지만, 메아리 없는 시간이 하릴없이 흘러갔다. 될 듯싶다가도 남북관계가 엉키면 기대는 물거품이 되곤 했다.

  그런데 2014년 8월, 해동으로부터 대답이 왔다.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판문점에서 회령까지 걸어가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걸을 수 있는 지역은 걷되, 자동차를 이용하여 북한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걸어 올라가는 게 원래의 취지였지만, 북한의 각 지방을 우선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그렇게 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아내가 펄쩍 뛰었다. 여러 명의 미국인이 잡혀있는 무서운 그 땅을 무엇 때문에 가느냐며 기를 쓰고 말렸다. 이웃이나 친구들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스럽다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하도 주위에서 반대를 하니 나도 마음이 좀 흔들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나 무섭고 두려운 땅인지 내 발로 직접 걸으면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일었다.

  나는 그 땅이 같은 말을 쓰고 피를 나눈 우리 형제들이 사는 곳임을 안다. 그리고 평화와 통일을 향해 흐르는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믿는다. 가지 않는 거친 숲. 그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 걸어가면 길이 생긴다. 더 많은 사람이 다니면 길은 서서히 넓어지고, 마침내 대로가 된다. 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비행기 표를 예약하는 등, 차근차근 여행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출발할 날이 되었다. 떠나기 전날, 미주한국일보에 “북한, 어떻게 변했을까”라는 칼럼을 한 편 보냈다. 다음은 2014년 10월 9일자 게재된 칼럼의 마무리 부분이다.

 “.......분단 70년이다. 세월만큼 남쪽도 많이 변했지만 북쪽도 관혼상제를 비롯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많이 변했을 터이다. 그 오랜 기간을 남북이 서로 적대시하며 지냈다.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서로를 폄하해왔다. 이제 분단을 끝내야 한다. 대통령도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통일로 가기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

  남쪽 출신 작가가 3주간 이상 북한에 머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다. 그 의미가 바래지 않도록, 곳곳을 걸어가면서 혹은 차로 이동하면서 가능한 많은 곳을 둘러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볼 예정이다.

  그들의 이야기와 그곳의 풍경을 듣고 보이는 대로 담아 와서, 느낀 대로 쓸 작정이다. 그리하여 고향을 그리는 사람들, 북녘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다녀온 이야기를 가감 없이 생생하게 전해드릴 계획이다.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북녘 땅 여정을 시작한다. 성원을 부탁드린다.”

엘에이 공항 출발. 심양 도착 

▲ 심양, 서탑특색가(西塔特色街) - 찰떡을 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2014년 10월 1일 엘에이 공항 출발. 인천 경유하여 심양에 도착.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오후 평양에 들어가는 일정이다.

  공항에 배웅 나온 아내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혼자서 간다는 게 더욱 불안한 모양이다. 전쟁터라도 보내는 듯 비장하고 처연한 모습이다.

  23시 30분, 비행기가 이륙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난 2005년에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주일 동안 LA 평통위원 방문단의 일원으로 묘향산, 진남포, 개성과 판문점 등을 방문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짧은 기간 이었지만 눈으로 보고 난 다음, 평양에 대한 나름의 윤곽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3주일, 지난번에 비해 3배가 길다. 궁금증을 풀기에 충분한 기간은 아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단체로 가는 게 아니고 혼자서 하는 여행이다. 지난번보다는 더 밀도 있게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방문을 통해 9년 전의 모습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다녀온 다음 글을 쓰겠지만, 지금 같은 분단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글은 자칫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비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인천에 도착.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음 날 12시경 중국 심양에 도착했다. 안내하는 분이 마중을 나와 있다.

 심양은 15년 전에 와 본적이 있다. 새로 지은 공항이며 고층빌딩들이 옛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곳은 옛날 만주 봉천지방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곳이다. 한인상가 밀집지역인 서탑으로 갔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접수대 앞에 꽂혀있는 한국신문이 보인다. <료녕신문>이다. 이 지역 동포를 대상으로 발행되는 신문이라고 한다. <벼룩시장>도 있다. 주간 신문인데 미국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주간지가 있다.

  한인 재래시장에 나가보았다. “서탑특색가(西塔特色街)”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장보러 온 사람들로 붐빈다. 고춧가루, 김치, 순대, 미역... 떡집에서는 남정네가 찰떡을 치고 있다. 생기가 넘친다. 세계 각국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이다.

10월 4일 -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비행기는 평양행입니다”
 

▲ 심양, 북한영사관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평양에 들어가는 날이다. 안내원이 오더니 미국에서 보낸 여권 번호가 잘못 기입되어 심양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 들러 확인을 받아야 한단다. 생각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했다.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면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북한 영사관은 철망으로 둘러있고 경비병이 검문을 하고 있다. 초소를 통과하여 사무실로 갔다. 여직원에게 패스포드를 제출하고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이름이 찍힌 비자를 받고 나니 북한에 들어간다는 실감이 났다. 이름, 성별, 국적, 난날, 체류일수, 려권번호 등이 적혀있다.

  심양 공항에 도착. 검색대를 통과하여 고려항공 탑승구 앞에 섰다. 창밖으로 북한 국기가 그려진 고려항공 비행기가 보인다. 대합실에는 가슴에 김일성 뱃지를 단 사람들이 여기저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탑승 안내방송이 들린다. 문이 열리고 차례차례 비행기에 오른다. 승무원이 문 앞에 서서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검정색 제복을 입고 오른쪽 가슴에 김일성 뱃지를 달았다. 쪽진 머리를 위로 올려 리본으로 묶었다. 입구에 놓인 ‘로동신문’한 부를 들고 왔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비행기는 평양행 입니다. 손님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걸상띠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기내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습니다. 전자제품은 전원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비행시간은 45분이 되겠습니다.”맑은 여자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1시 55분, 비행기가 활주로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 바로 앞 승무원 의자에 벨트를 매고 여승무원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비행기가 이륙한 다음, 편안해지자 승무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 한 잔을 청하자 “사과 탄산단물, 포도 탄산 단물”을 가져온다. 대동강 과수농장에서 나온 거라고 설명한다. 기내 티비에서는 <아, 어머니 우리 당>이라는 프로를 방영하고 있다.

  가져왔던 로동신문을 펼쳤다. 일면에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 수리아아랍공화국 대통령이 축천을 보내왔다”는 머리기사가 보인다. 바로 옆에 사설을 실었는데 <북남공동선언의 기치 따라 자주통일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자>는 제목의 글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10.4선언 7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설은 “‘력사적인 10.4선언의 발표로 삼천리강토가 커다란 감격과 환희로 끓어 번지던 그때로부터 7년이 되었다, 로 시작하여, 북과 남, 전체 조선민족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기치높이 거족적인 통일애국투쟁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야 할것이다.”고 마무리되어있다.

  커피를 한 잔 부탁했더니, “조금 기다리시라요”약간 퉁명스럽게 대꾸를 한다. 커피와 함께 우유와 설탕을 가져왔다. 작은 봉지에 우유가루(milk), 사탕가루(suger)라고 표기되어 있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생각에 잠긴다.

   북한에 간다고 하자 어떤 분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곳은 안내원을 따라 북한 정권이 허락한 지역 허락한 사람들만 만나는 거잖아요. 북한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그것을 선전하도록 하는 거 아니던가요.”일리 있는 말이다. 안내원 없이 움직일 수 없는 곳이 북한이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일이 원리원칙 대로만 움직여지던가. 21일 동안 북한 곳곳을 돌아보는데 꼭 보여주고 싶은 것만 눈에 보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어디에서 보았느냐 이고, 그보다는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결국 모든 것은 ‘기억’과 ‘해석’을 통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본문보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듯, 작가의 ‘시선’이 관건이 된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내 방송이 들린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지금 압록강을 지나고 있습니다. 압록강 푸른 물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주석님께서 열네 살에 조국광복의 푸른 꿈을 간직하고 건너갔던 곳입니다.”
 
  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락이 노랗게 익었다. 나락을 베어낸 논바닥이 보이고, 벼 베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이기도 한다. 산천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한 장 찍으려 하는데, 어느 새 보았는지 승무원이 다가와 “손님, 사진은 못 찍게 되어있습네다”하고 제지한다. 머쓱한 표정으로,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강이 무슨 강이지요”하고 묻자, “청천강입네다”대답한다. 승무원의 말이 퉁명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이쪽 사람들의 말씨에 생소한 때문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다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10분 후 종착지 평양에 내릴 예정입니다. 기온은 21도, 날씨는 약간 흐렸습니다.”

  창밖으로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논이 보인다. 흐름식 물길, 이라는 수로가 구불구불 논둑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지형의 높낮이를 따라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설계한 물길이라고 했다.

   “손님 여러분, 우리비행기는 방금 순안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내려 보니 활주로다. 1945년 분단 이후, 남북 정상이 55년 만에 처음 만나 악수를 하던 역사적인 장소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30분,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마주 잡던 장면이 기억에 생생하다.

▲ 넓은 순안공항 활주로를 장비 없이 사람의 힘으로 건설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청사건물이 어느 쪽인지 보이지도 않는다. 자동차를 타고 청사로 이동하는 모양이다. 무슨 일일까. 셔틀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갔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활주로 공사를 하고 있다. 왼쪽도 오른 쪽도 노동자들이 각자 소속된 깃발 아래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모래를 나르는 사람들, 날라 온 모래를 고르는 사람, 시멘트를 등에 지고 가는 사람. 물통을 양 어깨에 메고 오는 모습..... 장관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흙먼지가 날린다.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조선 속도”“결사 관철”“전투명령은 내렸다 폭풍치자 화약에 불이 붙은 것처럼”등, 여러 가지 구호가 적힌 배너가 붉은 깃발과 함께 펄럭인다. 도로 포장은 포크레인이나 롤러 같은 특수 장비를 이용하여 매끈하게 만들어 내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저 넓디넓은 활주로를 저렇게 사람의 힘으로 건설하다니. 이곳이 로켓을 쏘아올리고 원자탄을 실험한다는 그 나라 맞아?,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공항 청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특별한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순안공항 청사에 도착했다. 9년 전에 왔던 그 건물이다. 청사 옆에 새 건물을 짓고 있다. 입국장 저편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공항 구내매점 옆에 서서 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전시되어 있는 수예품이 예쁘다. 북한의 수예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작은 수예품 한 점에 30위엔, 5달러란다.

  매점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활주로 공사는 2년 전쯤 시작되었는데 금년 안에 끝마칠 예정이란다. 멀리 배너에 쓰인 구호가 “당에서 정해준 시간에 ..... ”뒤쪽 글씨는 희미해서 보이지가 않는다. 끝마친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금 짓고 있는 청사가 완성되면 훨씬 넓고 편리할 것이라고 아주머니가 말한다. 

평양 첫 날

  입국수속을 끝내고 나니 오후 4시 30분. 밖에 나오니 두 분이 맞아준다. 해동 영접국 김재천 참사, 그리고 머무는 동안 나를 안내해줄 김광현 참사, 라고 했다.

  순안 비행장에서 평양에 들어가는 길. 날씨가 약간 흐리지만 9년 전과 달리 나무가 많아 보인다. 호텔에 도착하니 어둑하다. 해방산 호텔이다. 객실 83개인 3층 건물이다. 오른편에 로동신문 사옥이 보인다. 멀지 않는 곳에 대동강이 있다고 한다.

▲ 해방산호텔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가방을 방에 놓아두고 일정을 토론하기 위해 모이기로 했다. 내 방 바로 옆방이 안내원 숙소다. 3층 미팅룸으로 올라가는데 계단에 전등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하다.

  두 분 참사와 함께 우선 맥주를 한 잔씩 나누었다. 대동강 맥주다. 맛이 좋다. 김재천 참사가 남쪽 출신 작가로서 3주간 이상 북쪽에 머물게 된 경우는 정 선생이 처음이라고 말문을 연다. 이번에 안내를 맡은 김광현 참사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온 작가를 위해 특별히 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선정했다고 소개를 한다.

  마련한 일정을 살펴보니 미국에서 받아본 것과 큰 차이는 없지만, 소월의 고향 영변 약산과 통일교 문선명 선생의 고향 방문 등이 빠져 있다. 그리고 2005년 방문 때 갔었던 진남포가 방문지에 들어있다. 나는 이번 방문이 북녘 땅을 유람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북한 동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왔다고, 그리고 돌아가면 느낀 그대로 전할 것이라고 차분히 설명했다.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남북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통일의 초석이 되지 않겠냐며, 그 일을 하는데 보탬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조용히 듣던 두 분이 방문 목적에 부합하도록 일정을 조정해보겠다고 화답을 한다.

  또 한 가지, 사진에 관해서 의견을 말했다. 사진은 마음껏 찍겠으니, 혹 불편한 생각이 들면 떠나기 전에 필름을 검토해 보면 어떻겠는가. 하고 제안했다. 그 문제도 이견이 없었다.

  간단한 저녁식사 후 방으로 들어와 티비를 켰다. 영어 방송이 나오는데 홍콩사태 등 세계 정세를 방영하고 있다. 알 자지라(Al Jazeera)방송이다. 아침마다 일찍 산책을 나가기로 안내원과 약속했다.

 

 

전남 영암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성균관대학교, 전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등 교사 재직 중 1984년 미국 이민. 주말 한국학교 교장 20여년. 오렌지카운티 한인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9년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중’으로 등단.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내땅, 내발로 걷는다><아픈 허리, 그 길을 따라>를 냈다.
 조국통일에 관심이 많다. 평통위원을 3기 역임했고, 2005년 LA 평통 방북단으로 북한 방문. 통일을 기원하며 국토종단, 국토횡단을 했다. 미주 중앙일보와 한국일보에 칼럼을 싣고 있다. 살아보니 역시 사람이 힘이고 사람이 희망이다.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간다. 사람 사이의 소통, 그것이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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