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멕시코 독립전쟁을 이끄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 [사진-임영태]

드라마틱한 멕시코 혁명

그동안 너무 샛길로 빠졌다. 이제 다시 우리 여행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이야기는 다시 혁명기념관 앞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한참을 실랑이 끝에 결국 비싼 택시비를 치러야 했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들은 먼저 혁명기념관 위치를 확인한 뒤 주변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 요기를 했다.

샌드위치와 과일음료수, 커피를 시켰다. 샌드위치는 먹을 만했는데 과일주스는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었다. 첫날 멕시코 길거리에서 사 먹었던 큼직한 통에 들어 있던 시원한 맛의 그 주스를 기대했으나 이건 말린 과일을 갈아 넣고 설탕을 듬뿍 친 일종의 분말주스 같은 것이었다. 커피는 약간 묽게 부탁했는데 내겐 적당했다. 팁을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으나 젊은 여성은 ‘노’라고 말한다.

▲ 점심식사를 한 식당. 실내가 약간 어두워서 밖을 향해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잘 안 나왔다. [사진-임영태]

식사 후 혁명기념관 내부 구경에 나섰다. 농성하는 사람들 때문에 입구를 찾는데 한참을 헤맸다. 가까스로 입구를 찾아서 들어갈 수 있었다. 붉은 기운이 약간 비치는 황색 돔으로 되어 있는 건축물의 지하에는 혁명기념관이, 위에는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우리는 당연히 지하의 혁명기념관을 선택했다.

▲ 혁명관 지하에서 위를 보고 찍은 모습. [사진-임영태]

멕시코 혁명이 갖는 역사적 위상을 생각할 때 기념관의 규모는 상대적이지만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관 내부에도 기대했던 만큼의 자료는 없었다. 관련 인물과 사건 사진, 일차 기록물, 신문기사 등이 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사진자료들은 그동안 우리가 봐왔던 것들이 다수였다. 일부 사진들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멕시코 혁명의 발단과 전개, 그 의미를 멕시코 정부(아마도 집권당인 ‘제도혁명당’) 관점에서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사파타, 판초비야, 마데로, 카르데나스, 오브레곤, 마곤, 카예스, 카란사 등 멕시코 혁명의 영웅들을 다시 만났다. 『멕시코 혁명사』를 쓴 백종국 경상대학교 교수는 멕시코 혁명에는 “삼국지 같은 드라마가 있고, 유비와 관우, 장비와 조조 같은 영웅들이 등장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이승만, 박정희, 장면도 있다. 동서고금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친 맹장들과 그들의 신출귀몰하는 전법도 펼쳐진다”고 말했다. 그만큼 멕시코 혁명의 역사가 역동적이며 장쾌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러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다.

▲ 독립 후 멕시코의 정치지도자와 멕시코 지도의 변경. [사진-임영태]

나는 ‘스토리 세계사’를 쓰면서 멕시코 혁명을 언뜻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만 멕시코 혁명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멕시코인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 농담 한 마디 하자. 축구를 좋아하는 나는 한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당한 수모 때문에 멕시코에 대한 약간의 얄미운 감정이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게 됐다.

정말이지 멕시코 혁명은 매우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멕시코 혁명에서는 영웅들을 중심으로 여러 정치세력 간의 합종연횡, 모략, 배신, 음모 등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당연히 그와 같은 극적 드라마의 밑바탕에는 멕시코 민중의 고통과 눈물, 그리고 피가 배어 있다.

▲ 멕시코 혁명 시기 민중(전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 조각상. [사진-임영태]

 민중의 피로써 창조한 드라마

멕시코 혁명은 멕시코의 특수한 조건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그래서 멕시코의 역사학자 헤수스 실바 헤르소그는 “우리나라의 사회운동은 고유의 토착 환경과 민중의 끓는 피 속에서 태어났으며, 고통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적인 드라마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따라서 멕시코 혁명을 제대로 알려면 멕시코의 역사, 문화, 지리, 인종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특수한 멕시코의 역사 문화적 환경에서 탄생했지만 멕시코 혁명은 사회혁명 일반이 갖고 있는 속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실 멕시코 혁명은 20세기 세계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많은 부분은 편견으로 얼룩져 있다. 아마도 서방세계(특히 미국 언론과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왜곡된)의 시각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멕시코 혁명은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치고 1867년 다시 대통령이 된 베니토 후아레스에서부터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멕시코를 근대화하기 위해 공공 부채에 대한 2년간의 지불 유예, 민법에 기초한 결혼 제도 확립, 국민의 종교적 자유 보장, 종교 법정 해산, 교회 소유의 대규모 은화와 토지 국유화 등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도했다.

▲ 멕시코의 반프랑스 독립투쟁을 승리로 이끈 베니토 후아레스. 그는 원주민 출신의 첫 대통령으로서 멕시코의 자유주의적 근대화 혁명을 성취하려 했으나 혁명전쟁 중에 사망함으로써 그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났다. 그는 현대 멕시코의 문을 연 사람이다. [사진-임영태]

 
그러나 후아레스가 1872년 혁명전쟁 중 사망함으로써 그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은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집권하면서 멕시코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다. 디아스는 1876년 대통령이 된 이래 1911년까지 34년간 대통령에 있으면서 독재정치를 폈다. 디아스 시절 멕시코는 근대화를 통해 일정하게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나 주요 이권과 산업이 외국자본에 넘어가고 토지의 독점 등으로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혁명의 깃발이 오르다

멕시코 혁명에서 제기된 핵심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치적 자유의 확보이고, 또 다른 하나는 토지문제였다. 1910년 대지주 출신으로 유럽의 영향을 받은 정치적 이상주의자 마데로가 자유주의 혁명의 포문을 열었다. 레닌은 “지배계급이 반란이 시작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던가. 그의 반란과 함께 민중봉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디아스 독재 정권은 무너졌다. 하지만 그는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유주의 혁명은 멕시코 혁명의 서막에 불과했다. 민중의 엄청난 폭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그의 똘마니들. [사진-임영태]

 

▲ 디아스 독재를 무너뜨린 마데로의 봉기와 자유주의 혁명. [사진-임영태]

당시 멕시코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다. 특히 토지문제가 그랬다. 1910년경 멕시코 전체 토지의 97%가 830여 명의 대농장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파괴적인 토지집중으로 멕시코 중앙의 계곡지대에만 소수의 자영농과 전통적인 농민공동체의 공동농장(에히도)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 결과 총인구의 88.7%가 대농장의 농업노동자로 전락했다.

멕시코는 대농장주에게는 천국이었다. 이를테면 멕시코 동북부, 특히 치와와 주를 장악한 테라사스 가문의 경우, 1900년 초 283만 2,900헥타르의 대장원과 목축장을 소유했는데, 당대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부유한 농장주였다. 이 가문은 토지와 함께 방직공장과 방대한 물류창고들, 철도, 전신전화회사, 양초공장, 설탕공장, 정육회사, 광산까지 소유해 나나의 독립왕국을 형성했다. 이러한 거대 농장주들은 부와 함께 끼리끼리 혼맥을 맺어 부와 권력을 동시에 장악했다.

그러나 토지를 빼앗기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한 민중에게는 지옥이었다. 소작농도 아니고 대규모 상업농장의 고용된 농업노동자의 삶은 비참했다. 임금으로는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했고, 모든 가족이 다 매달려도 겨우 입에 풀질하기 힘들었다. 이 시기 유아사망률이 30%를 넘고 평균수명이 30.1세 불과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이중삼중의 착취구조 아래서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농장주들은 농업노동자를 상대로 고리대금업까지 했고, 빚은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되었다. 딸들은 수시로 강간당했으며, 조그마한 실수에도 가혹한 폭력이 뒤따랐다.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도망자가 되어 산속으로 숨어들면서 산적이 되었다. 지옥으로 변한 현실에서 이들이 선택할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영원히 노예로 살든지 아니면 소리라고 질러보고 죽든지.

이런 상황에서 마데로가 자유주의 정치혁명의 깃발을 올리자 민중은 활화산처럼 일어섰다. 그와 함께 멕시코 혁명을 이끌어 갈 영웅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디아스는 망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데로가 호랑이를 풀어놓았어. 이제 그가 호랑이를 어떻게 다룰지 한번 보세. 결국 그들은 온갖 고생 끝에 알게 될 걸세. 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내가 했던 방식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야.”

디아스가 말한 호랑이, 즉 혁명을 좌우할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멕시코 혁명은 엄청난 역동성과 극적 드라마를 연출하게 된다.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의 등장

마데로는 민중 봉기에 힘입어 권력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그는 멕시코의 현실이 어떠하며 민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뒤 이상주의적 사고에 젖어 점진적으로 해결해 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혁명의 고삐를 제대로 잡아채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면서 과거 디아스 정권의 잔당들과 손을 잡고 말았다. 더욱이 그는 결정적으로 토지개혁을 외면했다.

그러자 에밀리아노 사파타로 대변되는 민중세력이 반기를 들었다. 그는 멕시코시티 남쪽 모랄레스 주에서 봉기했는데, 그 지역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마데로의 혁명 이후에도 농장주들이 농민들을 살해해도 처벌하지 않고 그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살해하고 그 지도자를 감옥에 보내는 현실에 분개했다. 사파타는 모렐로스에서 혁명평의회를 소집한 뒤 혁명전쟁을 선포했다.

그와 함께 1911년 11월 27일 혁명의 대강을 담은 ‘아얄라 계획’을 발표한다. 그의 아얄라 계획은 ‘국가를 재구성하려는 계획’이었다. 집권을 목표로 한 다른 사람들의 선언이나 계획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사파타의 요구는 멕시코에서 가장 시급한 ‘토지개혁과 사회정의’의 확립이었다. 그는 멕시코 혁명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정한 혁명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상주의자였기에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오로지 혁명의 대의만을 따랐다. 그는 멕시코시티에 입성해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왔을 때에도 “나의 목표는 권력이 아니라 토지 혁명”이라며 그곳에서 철수한 인물이었다. 

▲ 멕시코의 진정한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 [사진-임영태]

 

▲ 혁명기념관에서 만난 사파타. [사진-임영태]

멕시코 혁명의 풍운아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보통 ‘판초 비야’)도 이때 등장한다. 비야의 본명은 도로테오 아랑고다. 그는 16세 되던 해에 12살 난 자신의 여동생을 강간하려는 농장주와 관리인에게 총질을 하며 저항하다가 산속으로 도망해 산적이 되었다. 치와와와 두랑고 지역을 떠돌기를 16년, 때로는 산적으로, 때로는 광산노동자로, 또 때로는 하인으로 살았다. 1910년 마데로를 따르던 치와와 시의 유지 아브라함 곤살레스를 따라 혁명에 가담했고, 마데로의 살해소식을 접한 비야는 ‘마데로의 복수’를 외치며 민중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혁명에 뛰어든다. 그의 부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의 명성도 나날이 높아졌다.

비야는 천재적이라고 할 정도로 놀라운 군사적 활약과 명성을 바탕으로 6개월 만에 1만 명을 거느린 북부군 총대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뛰어난 군사적 활약을 펼치며 북부지역 최고의 군사령관, 군사지휘관, 군사전략가가 된다. 비야군의 장기는 기마군을 이용한 돌격전술. 그는 대포로 적군의 포대를 침묵시킨 다음, 수천 기의 기마대를 이용해 사방에서 폭풍처럼 몰아쳐 쓸어버리는 전술을 애용했다.

하지만 그도 1915년 4월 6일의 전투에서 오브레곤이 지휘하는 카란사군의 철조망 계략에 말려 참패하면서 ‘혁명의 주인공에서 다시 산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동물적 감각으로 멕시코 혁명기를 헤쳐 갔지만 정치력이 부족하고 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했던 그는 결국 1923년 7월 암살됨으로써 드라마 같은 생을 마감한다.(주1)

사파타와 판초 비야는 약간은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멕시코 혁명에서 민중 진영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등장은 멕시코 혁명이 단순한 자유주의 혁명을 넘어서 토지개혁과 사회혁명이라는 성격으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바탕으로 작용한다. 비록 이들의 이상은 멕시코 혁명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지 못하지만 그 영향력을 깊게 남겨졌다.
 

▲ 멕시코 혁명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 프란시스코(판초) 비야. [사진-임영태]

미완으로 끝난 멕시코 혁명

마데로의 혁명 이후 정국은 혼란을 거듭했다. 마데로가 토지개혁을 미루면서 주위에는 과거 디아스 정권의 쫄개들이 몰려들어 진을 치게 되었고, 민중세력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마데로 진영의 군부는 완전히 구세력이 장악했다. 이런 와중에 마데로는 과거 디아스 밑에서 자란 우에르타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하지만 마데로를 살해한 우에르타도 오래가지 못했다. 코아우일라 주지사 출신의 카란사를 비롯한 여러 군웅들이 등장하면서 멕시코 전체가 혁명을 향한 전쟁 상태로 접어든 것이다. 특히 비야는 군사적으로 우에르타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비야는 자신이 우에르타의 음모로 사형에 처해질 뻔한 위기에서 마데로 대통령의 특사로 살아난 적이 있었기에 ‘마데로의 복수’를 외치며 망명해 있던 미국에서 멕시코로 돌아와 금방 엄청난 혁명군을 모으며 기세를 올렸던 것이다.

정국은 혼미했다. 북부에서 맹활약을 펼친 비야군, 멕시코시티 남부에서 활약하고 있던 사파타군, 동부에서 카란사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오브레곤, 그리고 중앙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우에르타군이 할거하는 양상이 된 것이다. 결국 우에르타는 혁명세력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고, 권력은 오브레곤의 도움을 받은 카란사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카란사 역시 토지개혁, 사회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대통령직에만 관심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민중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만 탐하다가 결국 민중에 의해 축출되고 만다. 정국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사파타-비야 연합의 민중세력과 카란사군의 한판 승부가 펼쳐게 된다. 한때 비야와 사파타 연합군은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며 혁명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곧 철수함으로써 패배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사파타는 혁명의 대의가 토지개혁에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략계획과 프로그램이 없었다. 권력의지도 없었다. 좋게 말해 그는 ‘순수’했다. 혁명의 대의는 있지만 혁명 전략은 없었다. 비야는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했으나 토지 개혁과 혁명의 대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정치에 대한 동물적 감각은 있었으나 난마처럼 얽힌 정국을 읽고 풀어갈 안목도 부족했다.

▲ 사파타와 비야의 회합 장면. 1916년 멕시코시티 대통령궁에서 이들이 만났을 때가 민중세력에게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들은 권력에 대해 미련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멕시코시티에서 철군하면서 카란사군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혁명의 최종적인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사진-임영태]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영화 <혁명아 사파타(Viva Zapata)>(1952)에 보면 멕시코시티에 입성해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비야가 사파타에게 ‘대통령을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에는 사파타가 사실상의 대통령직을 얼마간 수행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다시 돌아간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그래도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사파타에 대한 편견과 왜곡은 별로 없다는 점은 평가될 만하다. 흑백필름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 사파타 역은 말론 브란도가, 그의 형 역은 앤소니 퀸이 맡았다. 분장을 잘해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멕시코 배우들을 기용하겠지?

결국 비야와 사파타 연합군은 권력이 목적이 아니라면서 멕시코시티에서 물러나는 결정적인 패착을 두고 말았다. 또한 그들은 군사적으로도 카란사군을 완전히 제압할 기회가 있었으나 놓치고 말았다. 오브레곤의 분리 대응 전략과 계략으로 비야군이 오브레곤이 이끄는 카란사군에게 참패하면서 이들 민중세력의 주도권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패배로 멕시코 혁명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민중세력의 주도권 상실로 구시대를 지배하던 카우디요주의(주2)를 극복할 수 없었고, 토지개혁 또한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멕시코 혁명은 미완의 혁명, 중단된 혁명이 되고 말았다. 

 

▲ 엘리아 카잔 감독 작품 영화 <사파타>의 포스터. [사진-임영태]

 

▲ 주인공 사파타로 분한 말론 브란도. [사진-임영태]

 

▲ 영화 '비바 사파타'의 한 장면.[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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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백종국, 『멕시코 혁명사』(한길사, 2000); 임영태, 「멕시코 혁명」, 『스토리 세계사 8』(21세기북스, 2014)을 참고.

2) 카우디요는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사적으로 군사력을 갖고 한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정치적 독재자를 말하는데, 멕시코의 산타 안나, 파라과이의 호세 프란시아, 아르헨티나의 후안 로사스, 베네수엘라의 호세 파에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각 지역을 장악한 작은 카우디요(군벌)들이 할거하면서 정치와 경제를 주물렀다. 이 같은 카우디요의 존재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발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20세기 군부쿠데타와 그 과정에서 나타난 독재자들의 행태는 이러한 카우디요들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멕시코에서는 혁명 이전은 물론이고, 혁명과 그 이후에도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일부 실력자들, 즉 카우디요가 할거하면서 정국을 주물던 것. 이들은 이념, 정당성이나 대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하며 혁명의 결과물까지도 사유화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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