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인류학박물관 정문 전경. 왜 인류학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사진-임영태]

멕시코시티 시내를 지나서

6월 12일,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났다. 아마도 전날 여정이 약간은 피곤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잠이 안 깼다. 여행 기간 중 이런 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디서나 잠을 잘 자는 나였지만, 그래도 중간에 한두 번씩 꼭 잠이 깼다. 그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수면 부족 현상을 겪었다.

여전히 와이파이가 됐다 안됐다 한다. 그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그래도 나는 중간에 끊어지기는 하지만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반면, 이 대표는 처음 한동안 와이파이가 아예 안 되다가 며칠 만에 봇물처럼 터졌다. 나는 카톡으로 한국으로 간단히 소식을 보냈다. 전날 찍은 사진 몇 컷과 일정을 알려주는 정도였다.

아침 식사는 누룽지 끓여 고추장에 전날 사온 야채(양상추, 오이 등)를 찍어 먹었다. 김도 있다. 나는 아무거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예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가급적 현지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토르띠야, 타코, 파히타, 부르히타, 퀘사딜라 같은 멕시코 음식을 맛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약간 느끼하거나 향료가 조금 거슬릴 수는 있겠지만 달달한 과일주스와 함께 마시면 그런대로 먹을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식단은 그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한국식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이어서 그걸 고수했다. 재료가 남아 있는 동안, 그리고 조리기구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에서는 한동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칸쿤으로 가면서 우리의 한국식단은 끝난다.

이번 여행에서 새롭게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다른 무엇보다 가장 보수적인 것이 입맛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홍 목사가 ‘민족을 특징짓는 요소 가운데 가장 오래 가는 것이 음식인 듯하다’는 이야기에도 일정하게 공감이 갔다. 실제로 입맛은 쉽게 바꾸거나 적응되지 않는 문제였다.

▲ 아침 식사. [사진-임영태]

8시 30분, 우버택시를 이용해 국립인류학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길이 상당히 막혔지만 서울의 교통체증과 비교하면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위키백과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멕시코시티 인구는 9백만 명 정도 된다. 1천만 명의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다. 서울 인구가 최근 다소 줄고 있는 반면, 멕시코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멕시코시티는 광역으로는 2천1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의 경우 광역(경기도와 인천을 포함한 수도권)으로는 2천 5백만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멕시코시티는 인구로 서울에 버금가는 거대도시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면적으로 보면, 멕시코시티가 서울의 2배가 넘는다. 멕시코시티는 1,400평방킬로미터, 서울은 605평방킬로미터다. 서울의 인구밀도가 멕시코시티보다 훨씬 높다는 이야기다. 멕시코시티는 서울과 달리 (초)고층아파트나 주상복합건물보다는 단독주택이 더 많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녹지면적도 서울보다 많다고 봐야 할 것이다.

멕시코시티 다운타운 지역을 지나면서도 서울처럼 현대식 초고층 빌딩 숲이 크게 발달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멕시코에 지진과 화산이 많다는 점과도 관계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서부의 최대도시인 로스앤젤레스(LA)의 경우도 지진 때문에 가급적 초고층 빌딩 건축은 자제하고 있다는 데 멕시코시티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1985년 9월 19일 멕시코시티에 진도 8.1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도시가 대거 파괴되고 1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 멕시코시티 시내 풍경. [사진-임영태]

인류학박물관에서 만난 멕시코 문명

10시부터 12시 30분까지 대략 2시간 반 동안 인류학박물관을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보았다. 유물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돌아보고 유물 사진까지 제대로 찍자면 아마 며칠은 걸려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만 하더라도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외국인이 제대로 관람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멕시코의 인류학박물관은 우리나라 중앙박물관보다 더 많은 유물을 보유하고 있으면 있었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인류학박물관 1층 전체에 멕시코 지역 고대문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류의 탄생부터 시작해 문명의 이전의 원시시대, 그리고 올멕, 톨텍, 테오티우아칸, 팔랑퀘, 아즈텍, 마야 등 멕시코 전역에 존재했던 고대문명 유물들이 인류학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2층은 원주민의 생활과 민속을 보여주는 민속박물관로 조성되어 있다. 멕시코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디오 종족들의 생활 모습과 풍습, 전통문화를 볼 수 있다.

인류학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멕시코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문명의 실상과 규모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배타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남의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안목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멕시코의 인류학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 또한 우리의 그것 못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 자칫 우물 안 개구리의 편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휙 돌아봤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의 감상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내가 인류학박물관에서 본 멕시코의 고대 문명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그 규모나 내용면에서 우리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물론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이루어진 문명을 단순히 양적으로만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멕시코를 비롯한 아메리카의 고대문명에 대해서 거의 무지 상태나 다름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사나 사회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은 실제로 그 실상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빛나는 문명의 꽃은 페루의 잉카 문명과 멕시코의 아즈텍, 마야 문명(1)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멕시코에는 이 외에도 톨텍, 테오티우아칸, 올멕 등 여러 인디오 문명들이 존재했고, 그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멕시코 지역에 살았던 선대 인간들이 남긴 흔적을 우리는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고스란히 만날 수 있었다.

▲ 인류학박물관 정문 표제석.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풍경. 생명수 나무를 형상화했다고 알려진다. [사진-임영태]
▲ 멕시카(테노치티늘란)관 현관에서 바라본 박물관 정문쪽 모습. [사진-임영태]

 

▲ 인류의 이동 경로. [사진-임영태]
▲ 인류의 여러 모습들.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에 있는 멕시코의 문화유적 지도. 고대문명 유적들이 중남부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사진-임영태]
▲ 멕시코 고대문명 연표. [사진-임영태]

 

▲ 박물관 2층에서 만난 사람들. 이들은 현지인들인지 외국인 관광객들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멕시코의 문화유적과 관련된 학습토론 모임이 아닐까 생각됐다. [사진-임영태]

박물관에서 만난 학생들

우리는 박물관을 관람하는 도중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을 여러 팀 만났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각급 학교 학생들이 다 있었고, 그들은 다양한 교복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멕시코나 쿠바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 인종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멕시코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주민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다수(60%)를 차지하고 인디오(30%), 백인(9%)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져져 있지만, 메스티소와 인디오, 백인도 하나가 아니고 다양한 여러 인종들이 있다.

멕시코 거리에서 우리가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만났듯이 우리는 박물관에도 다양한 모습의 학생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학생들의 교복과 차림새, 얼굴 생김을 보면서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격차를 금방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이 났다. 그야말로 촌티가 팍팍 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티가 줄줄 흐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전자는 도시 빈민가나 외곽 지역, 산동네나 원주민 지역의 공립학교 학생들일 것이고, 후자는 아마도 부자동네 사립학교 학생들일 것이다.

학생들의 외모에서 이미 그들의 계급적 계층적 차이가 금방 느껴져 마음이 쓸쓸했다. 하기야 이런 사회적 신분과 계급적 차이가 어디 멕시코에만 있는 일이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같은 서울 시내 학생이라면 외형적으로 금방 그 학생의 계급적 차이를 알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사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학생들은 교사의 인솔과 학부모의 참관, 해설사의 해설 등 다양한 형태로 박물관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과연 저 학생들은 인류학박물관 견학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자기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미국 옆에 있어서 불쌍한 멕시코’라고 탄식했던 멕시코의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될까?(2) 원주민 인디오 출신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의 투쟁과 멕시코 혁명에서 민중세력을 대변한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고민을 알게 되는 역사의식으로 발전하게 될까?

▲ 인류학박물관에서 만난 멕시코 학생들. 그들은 여기서 무엇을 배우고 갈까? 멕시코 찬란한 고대 문명에 대한 자긍심? 아니면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보게 될까?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에서 만난 멕시코 학생들.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에서 만난 멕시코 학생들.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에서 만난 멕시코 학생들. [사진-임영태]

혁명이 선물한 멕시코 공교육

나는 박물관에서 학생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멕시코의 학제나 교육제도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나는 멕시코 교육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멕시코의 학제는 우리와 비슷했다. 3(유치원)-6(초등)-3(중)-3(고)-4(대학)제다. 대학의 경우 우리의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2년제 공업기술대학과 6년제의 의과대학이 있는 것도 닮았다.

그런데 자료를 뒤지다가 놀랍게도 공립학교의 경우는 고등학교까지 학비가 무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면, 사립학교는 유료일 뿐만 아니라 학교마다 학비 차이가 많이 났다. 당연히 부자들이 다니니까 비싸다. 1년에 500만원~1,100만원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까 멕시코의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비싼 편이다.

대학의 경우에도, 국립대학은 무료이고, 주립대학도 소액만 내면 된다. 할리스코 주립대학인 과달라대학의 경우, 한 학기 등록금이 우리 돈 5만원도 안 되고, 그마저도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경우 더 적게 납부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니 국립대학과 주립대학의 경우 입학경쟁이 엄청 치열하다.

이에 비해 사립대학은 학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중산층과 서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2012년 기준으로 학비가 400만원~1,200만원으로 다양하다. 이런 실정이기 때문에 국립대학의 입학경쟁은 치열하고 학사관리도 엄격하다. 반면, 사립대학은 자체적으로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에 일부 명문사립대를 제외하고는 돈으로 입학과 졸업을 살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멕시코가 한국보다 경제수준은 낮지만(3) 학비 문제는 훨씬 나은 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사립대학의 비중이 높은 한국(내가 입학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사립대학, 그것도 수도권 사립대학의 비중이 엄청 높아졌다)의 학비는 이미 살인적인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졸업해봐야 취업도 어렵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평생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기 힘든 아이들은 알바 인생으로 청춘을 보내고 있는 게 한국 현실이다.

멕시코의 교육의 핵심이념은 무료, 의무, 정교분리·비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멕시코 혁명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멕시코 혁명은 의무․무상 교육과 함께 보수적인 가톨릭의 교육장악에서도 벗어나게 해주었다.

혁명 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엄청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교육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주민들에게 보수적인 신앙과 더불어 저항정신을 마비시키는 순종적인 종교 교육을 주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 후 정부가 (가톨릭) 교회의 교육 관여를 엄격히 금지하면서 정교분리․비종교 원칙을 세웠고, 교육의 책임은 국가가 지면서 무상교육과 의무교육을 도입했던 것이다.(4)

▲ 소칼로 광장 옆 대성당. 혁명 전 멕시코 교회는 대지주이면서 주민들의 교육을 장악한 교육기관이었다. 혁명 후 교회는 토지를 내놓아야 했고, 교육에서 손을 떼야 했다. [사진-임영태]

교육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멕시코 혁명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토지개혁과 함께 의무․무상교육, 의료보장을 선물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멕시코 혁명은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20세기 최대의 사회혁명으로 불릴만하다. 그러나 오늘날 멕시코에서는 그 혁명의 유산이 거의 사라지고 잔해만 남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오래 전 소수의 지주에게 집중돼 버렸고, 무상교육과 의료제도도 위협받고 있다.

특히 2012년 취임한 엔리케 페냐 니에또 대통령은 대대적인 교육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교육개혁의 핵심 목표를 교육의 경쟁력 강화로 잡고, 이를 위해 교원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정부의 교육개혁 방안에 반발한 교사들이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멕시코 사회는 심각한 갈등에 휩싸였다. 정부는 교육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교사의 경쟁력 강화가 필수적인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교사들은 정부의 교육개혁안의 핵심문제가 사교육 확대와 공교육 축소라며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 혁명기념관 주위 가두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교원노조원들. [사진-임영태]

현재 멕시코에서는 가족의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빈부격차가 확대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의 불평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논란이 될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교육의 강화는 교육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핵심주범이고 이는 결국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로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멕시코에서는 법과대학을 졸업하면 변호사자격을 자동취득하게 되기 때문에, 부모가 변호사인 경우, 대부분 자녀를 사립대학의 법과대학으로 입학시킨다. 그 때문에 명문사립대학 법학과가 국․공립대학 법학과보다 오히려 인정을 더 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변호사의 경우만 그럴까? 의사는? 또 관료는? 아예 재산을 그냥 통째로 대물림하는 재산 상속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한 인맥 쌓기와 노하우 교육, 즉 미국 MBA 유학이나 정경유착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빈부격차가 교육 불평등을 낳고 교육 불평등은 사회적 격차와 신분 차이를 고착화시킨다. 결국 멕시코에서는 ‘빈부격차의 심화-사교육과 사학의 번성-교육 불평등의 확대․심화-계급․계층간 분리와 교착화’라는 사회적 악순환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순환 고리에서 결정적인 것이 바로 교육이다. 봉건시대와 같은 신분(계급) 사회에서야 계급(신분)의 경계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었지만 근대사회에 들어와서는 공인된 사회적 신분은 사라졌다. 거기서 사회적 평등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몫을 교육이 담당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도 힘 있는 사람들은 계급적 경계선이 그어지기를 원한다. 이 사회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부자들 아닌가?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애초부터 다른 출발점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게 바로 신분의 차이를 확인시켜 주는 경계선이 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아예 가난한 집 아이들이 갈 수 없는 사립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자들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건 멕시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이이야기이기도 하다. 학원이라는 사교육 경쟁만으로 그 격차를 완벽히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예 가난한 집 아이들(5)이 가기 힘든 특목고와 명문(이름이 좋아 자립형) 사립학교를 대거 만들었다. 우리도 멕시코도 망가지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사진-임영태]
▲ 내부 모습. [사진-임영태]
▲ 벽화. [사진-임영태]
▲ [사진-임영태]
▲ [사진-임영태]
▲ 마야달력. [사진-임영태]
▲ [사진-임영태]
▲ [사진-임영태]
▲ 박물관 외부에 전시된 유적. [사진-임영태]

 

▲ 박물관 2층 전체가 인디오 원주민의 다양한 삶과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민속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인디오의 원초적 삶의 모습뿐만 스페인의 지배 이후 동화, 융합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문화 양상도 볼 수 있다. [사진-임영태]
▲ 인디오 원주민의 생활상. [사진-임영태]
▲ 인디오 원주민. [사진-임영태]
▲ 원주민이 만든 공예품. [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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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마야(Maya)문명은 멕시코 남동부와 과테말라, 유카탄반도 일대에 걸쳐 존재했다. 오늘날의 국경선 기준으로 보면 멕시코의 영역을 뛰어넘는 범위에 있다.

2) 30년간 독재정치를 펴다가 민중봉기로 축출되는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종종 이렇게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곤 했다고 한다. “불쌍한 멕시코야, 너는 하느님으로부터는 참 멀리도 떨어져 있고, 미국과는 너무 가깝게 있구나.”

3) OECD가입국이면서 G20국가인 한국과 멕시코는 경제규모가 비슷하다. 2014년 한국은 세계 13위, 멕시코는 15위였다. 그 전해에는 멕시코가 14위, 한국이 15위였었다. 하지만 멕시코 인구가 한국의 2배 이상(2015년 멕시코 약 1억2천만명, 한국 5천1백만명 정도)이므로 단순계산으로 보더라도 1인당 GNP는 한국의 절반도 채 안 된다.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은 2만3679달러(34위), 멕시코는 1만514달러(63위)였다.

4) 이광훈, 「멕시코 교육제도와 교육개혁」, 여성가족부 장기국외훈련 현지보고서, 2012(인터넷 검색자료-2015.7.22 검색); 임영태, 「멕시코 혁명」, 『스토리세계사 8』(21세기북스, 2014) 참고.

5) 성적이 나쁜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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