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우연히 찾아온 멕시코-쿠바 여행의 기회 

지난 6월, 20여일간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나는 이 명칭을 편하게 생각하지만, 책을 몇 권 썼다고 해서 어떤 이는 ‘작가’로 부르기도 한다).

내가 이 여행에 합류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2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쿠바 여행 갈 생각 없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멕시코와 쿠바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세 사람은 결정이 된 상태로 한 사람 정도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처음 나는 이 이야기를 술자리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해외여행 경험이 거의 없는 내게 멕시코-쿠바 여행은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유럽이나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동남아나 인도, 네팔 한 번 가보지 못했다. 기껏 중국으로 간 백두산 기행 2번, 3박 4일의 베트남 하롱베이 패키지여행 한 번이 내 해외여행의 전부였다.

내게 멕시코와 쿠바는 너무 먼 나라였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쿠바 여행을 많이 간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그건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작년 월드컵 기간 동안 TV에서 보여주는 브라질의 빼어난 경관을 보면서 ‘야. 브라질 여행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하지만 내게 중남미 여행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우연이라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그날 그 술자리에 간 것도, 내게 그 이야기를 한 것도 우연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여러 날 그 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했다. 당연히 아내가 반대할 줄 알았다. 시큰둥했더라도 나는 더 이상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갔다 오라”고 말한다.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정말 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 먼 곳에 가보겠어? 하지만 지금 사정이 도저히.’ 고민이 됐다. 전 같았으면 당연히 못 간다고 간단히 결론 내렸을 것이다.

사실 나는 과거 여러 번 해외에 여행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아는 선배가 영국에서 런던 오는 비행기 표만 끊어서 오면 다 구경시켜 준다고 했을 때에도, 여동생 가족이 중국 창사에 살고 있을 때에도 끝내 가지 않았다.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갈 기회도 몇 번 있었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내 형편에 해외여행은 호사’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내 생각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 것은 작년부터였다. 어차피 인생은 짧은 순간일 뿐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불필요한 고집은 버리자.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좀 더 유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자. 기회가 되면, 지금부터라도 다른 세상을 보고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을 다니도록 하자. 생각의 변화는 이런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멕시코-쿠바 여행에 합류하게 됐다.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다 

각자의 개인적인 사정을 제외하면, 이 여행의 주된 계기는 미국과 쿠바의 수교 발표였다. 작년 12월 양국은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수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것은 어떤 언론인의 말처럼 ‘작은 나라 쿠바의 위대한 승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쿠바는 세계 최강 미국의 봉쇄와 압박을 견디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신들의 압박외교가 실패였음을 미 대통령의 입으로 공식선언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쿠바와 국교수립을 하게 된 것은 중남미의 외교 상황과 관계가 있다. 즉 고립되는 쿠바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현실, 그리고 더 이상 봉쇄정책이 유효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교정상화가 미국 자본의 진출에 유리할 것이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어쨌든 국교가 수립되면 미국의 금수조치가 풀릴 것이고 미국자본도 본격적으로 쿠바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쿠바도 빠르게 변화할 것이고, 옛 모습은 사진 속에만 남게 될지 모른다. 자본주의 경제방식이 들어가면 쿠바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방식도 바뀔 것이다. 이미 중국과 베트남에서 우리는 그런 변화를 보았다. 변화하기 전 쿠바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 이것이 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였다. 나도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쿠바를 찾고자 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살고 있고, 상대방인 북한을 자유로이 방문할 수 없는 처지다. 이제 북한은 미국과 수교(협상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면서 미국의 금수조치와 봉쇄조치를 받고 있는 사실상 세계 유일의 국가이기도 하다. 쿠바, 이란도 얼마 전까지는 같은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언젠가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봉쇄조치도 풀리겠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지금으로서는 전망하기 힘들다. 북한은 못 가지만 쿠바는 갈 수 있다. 북한과는 또 다른 사회주의(어쩌면 마지막 흔적이 될지도 모르는)의 쿠바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쿠바 못지않게 멕시코에 대한 관심도 컸다. 말만 듣고, 책에서만 본 아즈텍, 톨텍, 마야 등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20세기 최대의 사회혁명으로 평가되는 ‘멕시코 혁명’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멕시코 혁명 역사를 보면서 나는 멕시코 사람들에게 강한 끌림과 매력을 느낀 바 있었다. 한편, 찬란한 고대 문명과 20세기 최대의 사회혁명인 멕시코 혁명을 창조한 그들이 오늘날 저렇게 망가진 이유도 알고 싶었다. 며칠간의 주마간산 식 여행으로 과연 그 파편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연과 행운이 우리의 여행을 도우다

이번 여행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태어나 경험한 가장 긴 여행이었다. 집을 떠나 지냈던 가장 긴 시간이기도 했다.

전체 준비 모임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상견례를 위해서였고, 한 번은 여행계획과 준비물 등 점검사항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도 개별적인 접촉은 다양하게 있었다. 비행기 티켓과 숙박 예약은 원장님이 책임졌다. 여행 일정과 계획은 젊은 우리(실제로는 내)가 맡았지만 준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여행 경험이 부족한 나의 일정표는 엉성했는데, 뼈대만 있고 살은 없는 격이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모든 것은 디테일이 중요한데도 말이다. 결국 여행도중 일정은 수시로 변경됐고, 현지 사정에 따라 즉자적으로 대처해야 했다. 그 바람에 여정을 이끌어야 했던 원장님의 고생이 특히 자심했다. 그의 빛나는 기지와 순발력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여행은 무사히 끝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치밀하고 꼼꼼한 여행 계획의 부재, 부족한 여행지 지식, 여행지 준비 학습의 부족, 예약 숙박시설 확인 미흡 등 준비 부족과 함께 의사소통 능력의 한계(스페인어), 가이드 부재, 여행자의 연령대와 체력, 팀워크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여행에 몇 번의 고비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고비마다 우연과 행운이 따라 그 고비를 잘 이겨내고 여행을 무사히 마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난감했던 적도 없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웃지 못 할 해프닝과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보고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소박하게 할 생각

긴 시간동안 돈 들여 먼 여행을 하고 왔으면 남기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도 있고, 평소 인풋(소비)이 있으면 아웃풋(생산)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소신 때문에 여행기랍시고 이 글을 쓰게 됐다. 따지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사람들이 ‘작가’라고 부르는 것을 그냥 용인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여행기와 같이 말랑말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능력은 애초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힘들어도 밥값은 하고 살아야 하니 피할 도리가 없다.

글은 내가 쓰지만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우리 일행의 공동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위의 주체가 때로는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분명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행위 주체이지만 굳이 그 구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은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시각과 생각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다른 분들은 전혀 다르게 봤거나 느꼈을 수 있고, 어떤 문제에 대한 생각과 판단도 다를 수 있다는 걸 말해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연재를 결심하고도 과연 <통일뉴스>에 멕시코-쿠바 여행기를 연재하는 게 필요한 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우리는 무슨 준비된 계획에 따라 움직이면서 공신력 있는 기관이나 단체, 또는 그 사회의 구조를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 전문가나 명망 인사를 만나 취재를 하거나 설명을 들은 것도 없다. 그야 말로 배낭여행처럼 이리저리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대충 우리 눈에 띄는 몇 가지만 보고 왔을 뿐이다. 자칫 신변잡기와 가십거리에 불과한 이야기들이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통일뉴스 독자들 중에는 멕시코나 쿠바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가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못 가볼 사람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곳의 이야기를 본대로라도 전해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쿠바의 경우는 여러 면에서 통일뉴스 독자들에게도 관심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냥 그곳에서 만난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도 글을 쓸려니까 걱정이 앞선다. 사실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보고, 메모도 열심히 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쓸려고 하니까 당시 느꼈던 생생함이 부족하고, 메모를 봐도 잘 생각나지도 않는 부분이 많다. 사진 또한 그다지 쓸 만한 것도 없고 꼭 찍었어야 되는데 빼먹은 것도 많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되는 대로 풀어보는 수밖에. 그냥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주력하고 있다. (사)현대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다.

저서로는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