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연재를 시작하며]

주한미군으로의 탄저균 반입이 뜨거운 논란이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고 이를 위한 수단에는 제한이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세균을 사용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발상이다.

세균무기는 오늘날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이번에 벌어진 주한미군 탄저균 논란도 미국이 어떠한 입장과 목적에서 살아있는 탄저균을 이 땅에 반입하였는지 철저히 규명해야 할 것이다.

탄저균 반입 사건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세균전의 나라 미국>이라는 연재를 준비하였다. / 필자 주

<차례>

1. 전염병과 전쟁
2. 731부대장 이시이가 미국으로 간 이유
3. 최초로 폭로된 세균전, 한국전쟁
4. 쥬피터 프로그램이란?
5. 끝내 터진 사고
6. 세균, 방어용인가? 공격용인가?
7. 진화하는 세균전
8. 불안한 한국사회
9.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2년 1~2월,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 사이에서 일련의 심상치 않은 보건 문제가 발생했다. 그 지역은 이천, 철원, 평양 등이었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군기가 나뭇잎, 깃털, 면화 솜, 마분지, 콩 줄기와 꼬투리 등 이상한 물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군기가 떨어뜨리는 물질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살아 있는 곤충, 썩은 생선과 돼지고기, 개구리, 쥐 등을 채운 폭탄도 있었다. …… 2월 그 곳의 평균 기온은 영하 7.2도에서 영하 9.2도 사이의 혹한이어서 통상 곤충이 생존할 수 없고 자연적으로 번식할 수 도 없었다.”

이 내용은 토론토 요크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와 미 공군사관학교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해거먼의 저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이 전하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 군 당국과 보건당국의 조사 보고서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미국은 한국전쟁 중 북한에 세균전 실험을 명령했다 [사진=MBC방송 캡쳐]

1952년 2월 22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미군이 1952년 1월 28일부터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으로 한반도 상공에 살포하고 있다면서 유엔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중국의 총리 주은래 역시 같은 해 3월 미국의 비행기가 중국의 화북지역 및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미국을 비난했다. 북한과 중국의 주장은 질식작용제, 독성가스, 세균학적 수단을 전쟁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1925년의 제네바 의정서에 기초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미국은 세균전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미국은 세균전 의혹이 공산국가인 북한과 중국에 의해 근거 없이 날조된 것이라고 선전했다. 미국은 북한과 중국이 제기한 세균전 의혹이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공산국가의 악의적인 선전에 불과하다며 의혹 제기를 이념공세로 치부했다.

북한과 중국, 그리고 미국의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이 진실이었을까. 지금까지 조사된 사실과 여러 비공개 문헌들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균전이 최초로 폭로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1945년, 세균으로 도배될 뻔 했던 일본열도

미국의 세균전 능력은 언제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일까.

에드워드 해거먼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반에 이르러 세균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술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창설한 화학전부대 책임 장교인 윌리엄 포터를 중심으로 생물학전위원회를 꾸렸다고 한다. 윌리엄 포터는 1944년 6월, 4파운드짜리 폭탄 50만개를 만들어 달라는 영국의 주문에 맞추기 위해 탄저균 대량 생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했다. 윌리엄 포터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세균탄을 이용해 일본의 벼 농작물을 광범위하게 오염시킬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미 백악관은 일본 열도가 그들의 대 공산권 군사작전의 ‘불침항모’로써 기능해야 할 것을 예견하고 있던 상황에서, 통제가 불가능한 광범위한 세균전을 일본 본토에 벌이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의 세균무기 실전 투입은 자연스레 다음 전쟁으로 연기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전쟁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반도 세균오염대 설치 시도한 미국

미국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던 1951년,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을 연출한 김환균 PD에 의하면, 미국은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이 참여하는 화학전-방사능전-세균전 같은 특수전의 최고 결정기구이자 지휘기구인 ‘심리전략위원회(PSD, Psychological Strategy Board)’를 구성했고 한다. 이 위원회에서 최초로 내린 결정은 1951년 7월 이후 시작된 휴전회담이 실패할 경우를 상정한 ‘이륙작전(Operation Take-Off)’, 즉 세균폭탄을 투하하는 것이었다.

▲ 일명 '니덤보고서' 원문 [사진출처- 온라인 블로그 디센터]

일명 ‘니덤보고서’로 불리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조사 보고서’에는 당시 한반도에서 감행된 미국의 세균전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미 공군포로 쉐이블 대령의 진술에 의하면, 미국은 청천강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세균오염지대를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맥아더의 최후의 계획과 일맥상통한다. 압록강의 남쪽 연안에서 한반도를 가로질러 원폭을 제조하고 남은 부산물인 폐기물을 뿌려 ‘방사능 오염대’를 만든다는 것이 맥아더의 구상이었다. 세균오염대나 방사능오염대는 모두 후방 병력의 진출을 저지하고 보급선을 차단하겠다는 기본 목적을 갖는다. 니덤보고서를 분석한 김환균 피디는 미국이 이와 같은 목적에 따라 휴전협정 개시 이후 세균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니덤보고서는 당시 영국의 대표적 화학자였던 조셉 니덤과 원자폭탄 개발자로 유명한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던 국제과학위원회가 1952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의 결정에 따라 북한과 중국에 세균전 공식조사단을 파견해 작성한 보고서다. 여기에는 600여 페이지 분량의 세균전 의심 현장 사진, 세균전을 수행한 미군 포로들의 진술서,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피해 의심지역 주민 인터뷰 등의 자료가 실려 있다. 미 공군포로 쉐이블 대령의 진술도 니덤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이다.

미국, 1951년 세균전에 본격 돌입하다

미 당국의 특수전 최고 결정기구인 ‘심리전략위원회’의 결정은 곧바로 실행되었다. 1951년 미 합동참모본부는 작전 상황에서 세균전을 위한 특정 병원체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field tests)를 해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1951년 9월21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에 따르면, 1951년 당시 미국 합참은 “세균을 전술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현실적인 요구가 존재한다”면서 “이러한 세균을 개발하는 데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미국은 세균전을 다양한 형태로 수행하기 위해 세균이 담긴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 외에도 일반 전투폭격기의 외부에서 발사하는 형태의 폭탄도 개발하여 전쟁에서 사용하였다.

 

▲ 1952년 당시 미군이 세균을 살포한 38선 이북 지역 지도(자료 :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했던 세균탄의 실체는 일본 정강대학 모리 마사타카 평화학 강사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가 2002년 열린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 여수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시 사용됐던 세균탄은 두께가 3cm 정도의 철제로, 길이 1m20cm, 직경 37cm, 무게 70kg이다. 4칸으로 나뉘어진 세균탄은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등에 감염된, 서로 다른 종류의 곤충이나 나뭇잎 등으로 채워진다. 세균탄이 투하되면 30m 정도 높이에서 뚜껑이 열리고, 내용물들은 직경 1백m 면적으로 확산된다고 한다.

미국은 이와 같은 세균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제 731부대의 책임자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를 이용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니덤 보고서는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이 1952년 초 두 차례 연거푸 방한했고 같은 해 3월에도 한국에 있었다는 언론보도를 거론했다. 1952년 초면 미국이 한국과 중국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벌였다는 의혹이 일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 때문에 당시 미국이 이시이 전 731부대장으로 하여금 세균전을 지휘토록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세균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조사, 그리고 폭로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항공기 등을 이용한 세균전을 벌이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를 즉각 조사하여 폭로했다. 세균전이 감행되었다는 전쟁 당사자의 주장이 잇따르자, 전쟁 중 반인륜적인 불법행위를 감시하는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가시화되었다. ‘니덤보고서’를 발간한 국제과학위원회 외에도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한반도에서 조사에 들어갔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1946년 프랑스에서 조직된 비정부기구이자 UN의 자문기구로써, 오늘날까지 인권보호와 UN헌장 준수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권위 있는 기관이다.

박태균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1952년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당시 미국이 벌였던 세균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와 지방 항공 감시소들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중략) 많은 경우에서 특별한 종류의 파리, 벼룩, 거미 딱정벌레, 빈대, 귀뚜라미, 모기와 기타 곤충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곤충들은 많은 경우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예컨대 눈 위와 강의 얼음 위, 그리고 풀과 돌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전문 조사 결과 곤충들이 병균에 감염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곤충들은 인공적으로 배양된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 미국 군대는 북한 인민군을 반대하며 북한의 일반에게 죽음과 질병을 만연시킬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세균을 감염시킨 사례와 파리와 기타 곤충들을 고의적으로 살포함으로써 1907년 육전법규와 관습에 관한 헤이그 협약의 조문을 위반했으며 1925년 제네바 의정서에서 재확인한 세균전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가장 엄중하고 전율적인 범죄를 한국에서 범하였다.”

38선 남쪽에서도 벌어졌던 세균전

미군의 세균전은 38선 이북 지역과 중국 동북부에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라 지리산과 무등산 등 38선 이남의 주요 전장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는 2001년 8월, ‘미군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이하 전민특위)’의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 등 국제조사단 일행이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었던 정운용씨를 전격 조사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정운용 씨는 당시 조사에서, "51년 초가을께(3월이라는 주장도 있음) 무등산 자락인 규봉암 일대에 당시에는 `연습기`(쌍엽기로 추정)라 불렀던 작은 비행기에서 하얀 분말액을 뿌린 후 계곡 물에 세수하거나 물을 마신 빨치산과 마을 주민들은 온몸이 새까맣게 변하고 열이 나는 재귀열병에 걸려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비행기가 처음에 낮게 비행해 추락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분무액을 뿌리기 위한 저공비행이었던 것 같다"며, “분말액을 뿌린 며칠 뒤 토벌대들이 외서 빨치산과 주민과 피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민족정기구현회> 2대회장을 역임했던 역사연구가 홍갑표 선생도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양주시에서 자신이 당했던 세균전 피해에 대해 증언한 바 있다. 그는 “51년 초봄인가 별안간 우리 동네를 염병이 휩쓸었다”며 당시 많은 마을 주민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에 노출되어 죽어갔다고 했다. 홍갑표 선생은 훗날 당시 겪었던 병이 장티푸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전염병이 창궐했던 시기가 미군이 세균전을 벌였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들 외에도 미국이 38선 이남에서 벼룩 등을 이용한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증언은 다수 존재한다.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도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등지에서 감행된 미국의 세균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다만 미국이 38선 이북에서 감행한 세균전이 주로 1952년 초인데 반해, 38선 이남에서 감행한 세균전의 시기는 1951년으로 증언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적 차이를 보이는 미국의 세균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실증 조사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38선 이남에서도 세균전을 했다는 정황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시치미 떼기로 일관한 미국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반인륜적인 세균전을 감행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시치미 떼기로 일관했다. 미국의 심리전략위원회(PSB)가 작성해 1953년 7월 7일 알렌 덜레스 CIA 국장에게 보고된 비밀문서에는 당시 세균전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던 미국의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세균전에 관한 북한과 중국의 공세가 계속되자, 유엔에 현장 조사를 요구하였다. 니덤 보고서의 내용을 현장 조사를 통해 검증하자며 시치미를 뗀 것이다. 그런데 CIA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현장조사 요구는 정치공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국은 현장 조사 제안을 선호하고 있지만, 미국의 정책은 실제 조사를 선호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장 조사 위원회가 불가피하게 미 8군의 준비나 작전(예를 들어 화학전)을 알 수 있게 되어, 그것이 공개되면 우리에게 심리적이고 군사적인 차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이 주장했던 UN의 현지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CIA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당시 미국의 속내가 현장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감행한 세균전은 이를 일선에서 직접 수행했던 미 공군 장교들에게 조차 납득되기 어려운 반인륜적인 것이었다. 오마이뉴스가 최초로 보도한 니덤보고서의 내용 중 플로이드 오닐 미 공군 중위의 진술을 보자.

"나는 (미국의) 세균전 사용을 고발한다. 민간인들에게 소름끼치는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세균전은 아직도 미군에 의해 한국과 중국 동북부에서 수행되고 있다. 이런 참혹한 전쟁이 지속되면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이 사라질 것이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 상공에서 격추돼 포로가 된 그는 국제과학위원회 조사에서 본인이 세균전에 참여한 끔찍한 경험에 이와 같이 토로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세균전을 감행했던 미국의 행위가 최초로 폭로된 정규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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