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방북이 마침내 성사됐습니다. 남측 김대중평화센터와 북측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지난 6일 개성에서 실무접촉을 갖고 이 여사가 다음 달 5~8일 3박4일 동안 서해 직항로를 통해 방북하는 일정에 합의한 것입니다.

이 여사의 방북은 8.15광복 70주년을 앞둔 시기라 주목됩니다. 그렇다고 90세를 훌쩍 넘긴 노여사(老女士)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지는 맙시다. 무엇보다 남북관계가 최악인 현재 상태에서 자연인인 이 여사의 방북만으로 관계개선의 물꼬를 트기에는 힘이 부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여사의 이번 방북 성사에는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 이전의 숨은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남과 북의 신뢰문제입니다. 언젠가부터 남북관계가 꽉 막히고 또 뚫어지지 않는 이유는 남북 사이에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한때 남북 사이에 대화 문제를 놓고 서로 ‘진정성’ 운운한 것은 그 방증입니다.

이 여사의 이번 방북에 대해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현실적 시각보다는 남북 신뢰구축이라는 근본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여사의 방북 건은 이 여사와 북측 당국과의 약속인 동시에 이 여사와 남측 당국과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희호-김정은’, ‘이희호-박근혜’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사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개입돼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에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공동선언에 합의했으며, 2002년에는 박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도와 ‘박근혜-김정일’ 만남을 성사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이 여사의 방북은 각 가문(家門)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약속 이행’이 되는 셈입니다. 한반도 현대사에서 인간적 차원에서 이보다 더한 신뢰문제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생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은퇴한 김대중 대통령 부부에게 틈만 있으면 휴식차 방북을 요청해 왔습니다. 양김(兩金) 사후에도 이 약속은 살아있었고, 지난해 이 여사의 방북 문제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지난해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5주기 때 북측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조화를 전달하면서 “(이 여사 방북) 초청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밝힌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 3주기 때 이 여사가 조화를 보내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친서를 보내 사의를 표하면서 “다음해 좋은 계절에 여사께서 꼭 평양을 방문하여 휴식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시기를 기대한다”고 초청의 뜻을 전한 바 있습니다.

앞서 지난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5주기를 맞아 이 여사가 처음으로 추모화환을 보낸 데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답례 차원에서 초청하자, 이 여사가 북한 방문을 요청했고 이에 박 대통령도 “언제 한번 여사님 편하실 때 기회를 보겠다”고 답해, 승낙을 받아놓은 터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남과 북의 세 가문이 대(代)를 잇고 유지(遺志)를 잇는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이 여사의 방북인 만큼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닙니다. 이번 방북은 ‘김대중-김정일’ 두 고인을 인연으로 해 ‘이희호-김정은’, ‘이희호-박근혜’ 사이에서 약속이 성사된 것인 만큼, 넓게 보면 이 여사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당국이 약속을 지켜 신뢰를 구축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사가 방북한다면 김정은 제1위원장을 만날 확률이 큽니다. 이번 방북은 사실상 김정은 제1위원장의 요청이자, 의리와 인연을 중시하는 북측이기에, 김 제1위원장이 이 여사를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박 대통령도 이 여사가 방북하기에 앞서 초청해 만나야 합니다. 요즘 박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표현을 쓰며 찍어내기를 해 입방아에 오르고 있습니다. 세상사에서 배반은 흔한 일이고 특히 정치에서 배신은 다반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족문제에서 배신은 금물이고 오직 신뢰만이 관계개선의 척도입니다. 방북하는 이 여사를 만나는 게 노여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줄 것이고 나아가 북측에 신뢰를 보여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만남에서 박 대통령이 이 여사에게 남북관계 개선의 메시지를 찔러 준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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