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법달(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북한에서의 천도교 활동은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현 위원장:류미영)를 1946년 2월에 천도교북조선종무원으로 발족하면서 조직화되었다. 1974년에 현 명칭으로 개명하여 활동을 해왔다. 현재, 북한은 천도교인 수는 1만 3천 5백여 명, 청우당원 수는 1만 4천여 명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는 평양 문수리에 있는 4층 건물에 위치해 있으며, 약 100석 규모의 중앙교당이 위치해 있다.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은 외래종교보다는 민족종교인 천도교에 더욱 큰 호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천도교와 관련한 동학혁명을 우리나라 근대역사에서의 대표적인 반봉건투쟁으로 평가하고 이를 천도교의 민족적 특성으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천도교는 김일성ㆍ김정일에 이어지는 북한 정권과 깊은 연대를 하여 왔으며, 사회주의 이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86년 4월에 천도교 창도 126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 후 활발해 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남한에서 천도교 교령 직을 맡았던 최덕신과 그 부인 류미영이 캐나다에 거주하다가 1986년 9월 월북함으로써 그 여건이 더욱 단단하여진 것으로 보인다. 1989년 5월(5.30)에 「조선종교인협의회」를 발족시키면서 당시 천도교 중앙지도위원장이던 최덕신을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 이후에도 천도교 위원장이 주로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을 맡도록 하였다.

최덕신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종교단체의 통일전선을 주도하였으며, 류미영은 최덕신의 1994년에 사망이후 천도교를 책임지게 되었다. 천도교는 류미영이 강동 단군릉의 총책임자이며, 1993년부터 개천절을 기념하고, 1994년부터는 단군제를 거행하는 등 대종교 및 민족종교를 대표하여 활동하고 있다.

남북천도교 교역자들 간의 첫 접촉은 1991년 10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네팔 카투만두에서 개최된 제4차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si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약칭 ACRP)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북한이 ACRP 가입을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면서 조선종교인협의회장인 정신혁(당시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장)을 대표단 단장으로 참가시켜 남한에서 참석한 임운길(당시 천도교 중앙총부 교화관장)과 만나게 되었다.

1992년 12월에 남한의 천도교는 1993년에 예정된 4월 5일 천일 기념행사에 류미영 위원장을 포함한 북한천도교 대표단을 초청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천도교 오익제(당시, 천도교 교령)는 1993년 10월(10.19-20) 이틀간에 걸쳐 북한의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 류미영 위원장과 북경 신만수호텔에서 회동하였다. 이 회동은 남북 종교교류의 과정에서 볼 때 종단대표가 서로 만나는 첫 번째 회담이기도 하였으며, 남북 천도교 교류를 위한 다음과 같은 5개항의 공동합의문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1. 조국을 통일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최대의 숙원이며 지상의 과제다. 남과 북의 천도교인들은 우리나라의 통일을 7․4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따라 실현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2.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서는 전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남과 북의 천도교인들은 전민족의 대단결이 천도교의 화합정신에도 부합된다고 인정하면서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같은 배달민족으로서 모든 것을 민족공동의 숙원인 조국통일위업에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3. 1990년대를 조국통일의 연대로 장식하여야 한다. 남과 북의 천도교인들은 서로 접촉하고 대화하면서 조국통일 위압을 실현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한다.

4. 1994년은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100돌이 되는 해이다. 남과 북의 천도교인들은 이날을 공동으로 뜻있고 보람있게 기념하기 위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하여 남북천도교대표들의 실무접촉을 1994년 1월말~2월초에 판문점에서 진행한다.

5. 천도교중앙총부 교령은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초청하였으며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은 천도교중앙총본부 교령이 평양을 방문하도록 초청하였다. 쌍방은 편리한 시기에 서로 서울과 평양을 방문할 용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 2008년 12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오익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그는 1997년 월북했으며 2012년 타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100주년 공동기념을 위한 남북 천도교 실무대표들의 제1차 접촉이 1994년 3월(3.9일-10)에 북경에서 열렸다. 남측 대표로는 방진규(천도교 종무원장), 홍장화(종무위원) 등이 참석하였고 북측 대표로는 한영수(조선 천도교 중앙위 부위원장), 심상용(조선 천도교 중앙위 부부장) 등치 참석하여 ‘동학 100주년 남북공동기념행사(3월 21일)’에 관한 실무문제들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 행사는 북한의 핵 문제 등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97년 8월에,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한 천도교 교령을 지낸 오익제의 월북사건으로 천도교의 남북교류는 주춤하였다. 1999년 8월에 들어와 북측의 접촉제의에 의해 남북 천도교대표회담이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북측의 초청에 의한 천도교 중진급 교역자 3명의 방북추진이 이루어졌으나, 북한의 정치적 이용 가능성을 우려하여 남한정부는 승인을 유보함으로써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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