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저술가, <스토리 세계사> 필자

 

중국 땅에서 우리 역사를 배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남과 북, 연변을 함께 보아야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 대성중학교 윤동주 시비 앞에서. 지난 10월 2일부터 6일까지 ‘소통과혁신연구소’에서 기획한 <백두산 역사평화기행>이 진행됐다. [사진 제공-임영태]

지난 5월 초 처음으로 백두산 기행을 다녀왔지만 기간도 짧았고 관광기행이 주된 것이어서 이 지역의 우리 역사를 돌아보기에는 너무 미진했다. 그럼에도 책으로만,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그곳을 돌아본 기쁨은 적지 않았다. 나는 그때 기회가 되면 역사기행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달 정도 배낭여행을 하면서 만주지역 곳곳의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 지역의 중요 역사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10월 2일부터 10월 6일까지 ‘소통과혁신연구소’에서 기획한 <백두산 역사평화기행>에 함께할 수 있었다. 책으로만 알고 있는 내용을 현장과 접목시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여기 기행에서 느낀 점을 여정을 따라 가면서 정리해본다.

인천공항에서 목단강공항으로

▲ 백두산 역사평화기행의 여정을 보여주는 지도. 목단강, 연길, 도문, 봉오동, 용정, 이도백하, 백두산, 통화, 집안, 단동, 대련으로 이어지는 상당히 먼 길이다. [사진 제공-임영태]

10월 2일 오전 11시 인천공항 D창구 떡집 앞. 이번 여행을 함께 할 22명이 모였다. 우리는 중국 남방항공 예약 티켓을 끊고 수화물을 부친 다음, 탑승수속을 밟았다. 연휴기간이어서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중국도 신정부 수립 65주년 기념일(국경절)이어서 상당히 붐빌 것으로 예견되었다.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중이어서 그런지 몸수색과 검색이 약간 까다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비행 목적지는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공항. 승객 중에는 조선족들이 다수인 듯 보였다.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이 연휴를 맞아 고향에 가기 때문인 듯했다. 현재 중국의 조선족은 대부분 동북3성(만주)에 거주하고 있다. 길림성에 사는 120만 명 중 약 80만 명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목단강보다 가까운 연길까지의 비행기 삯이 훨씬 비싸다고. 우리는 목단강에서 연길로 이동하는 길을 선택했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중국 조선족 현황을 간단히 살펴보자. 중국 조선족은 길림성 외에도 흑룡강성(성도인 하얼빈시 포함)에 45만 명, 요녕성(성도인 심양 포함)에 25만 명, 내몽골 자치구 약 2천 명 등이 거주하고 있다. 그밖에도 베이징(북경), 톈진(천진), 상하이(상해), 칭다오(청도), 광저우(광주), 선전(심천) 등의 대도시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는데, 2000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854,000명가량으로 추산되고 있다.(주1)

최근에는 조선족들이 동북3성을 떠나 중국의 대도시와 한국 등지로 퍼져 나가면서 중국 내 조선족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는 형편이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와 흑룡강성의 많은 조선족들이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한국과 중국의 대도시 지역으로 분산되어 살고 있다. 한국 정부(행정안전부)의 <외국인 주민현황>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약 50만 명의 조선족이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으로 귀화한 이도 2만 6천 650명이나 된다. 조선족의 30%를 웃도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다녀왔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한중 국교 수교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취업, 결혼,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한국과 중국 내 대도시 등으로 이주하면서 연변자치주를 비롯한 동북 지역의 조선인 거주 지역이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자리를 한족들이 메우고 있다. 우리 기행을 안내한 연변출신 가이드는 연변 조선족이 80만 명이라고 하지만 그건 등록상일 뿐 실제로 거주하는 조선족은 20만 명도 채 안될 것이라고 했다.

또 조선족의 경우 부부가 돈을 벌러 가면서 맡겨 놓은 아이와 그 아이를 돌보는 노인 세대만 남아 있는 형편이어서 청소년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부모가 부재한 상태에서 조부모 아래서 사춘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의 경우 문제아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부모도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돈으로 보상하려다 보니 아이가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을 흥청망청 쓰게 되면서 더욱 망가지는 것이다.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단순노동밖에 할 수 없게 되면서 삶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 조선족 사회는 그러한 순환 과정을 벌써 2대째 거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지난 번 여행에서도 들은 바 있었다.

과거 중국 소수 민족 중에서 생활수준과 교육수준이 가장 높았던 조선족들의 삶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의 책임도 없지 않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한국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우리 역사의 상흔이면서 동시에 자부심이다. 그들은 신분상 중국 국적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한민족의 일원이다. 남북한과 연변 조선족이 함께 풀어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8녀투강’ 기념비에 얽힌 이야기

▲ 항일연군기념관에서 만난 '투강8녀'의 모습. [사진 제공-임영태]

비행시간은 짧았다. 비행기는 12시 50분 영종도 인천공항을 이륙했고, 예정대로 중국시간 오후 2시 20분(한국시간 3시 20분) 목단강공항에 도착했다. 시차를 계산하면 비행시간은 2시간 30분에 불과했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목단강 시는 평원에 위치해 있었다. 흑룡강성의 평원 지대는 중국에서도 넓기로 유명하다.

수속이 끝내고 우리들은 4박5일간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를 만났다. 가이드는 5대째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었다. 그는 동북 지역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항일운동, 그리고 중국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조선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고, 현실에 대한 균형감각도 갖춘 훌륭한 젊은이였다.

우리의 첫 예정지는 원래 목단강시 빈강 공원에 있는 ‘8녀투강기념비’였다. 1938년 10월 10일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의 여성유격부대원 중 8명의 대원들은 일본군의 포위 속에 고립되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생포되어 굴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목단강의 지류인 우수훈 강에 몸을 던져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 후 영화, 연극, 동화책 등으로 각색되어 중국 전역에 항일전쟁의 한 전형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1950년과 1987년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이 중 1950년 <중화의 딸들(中華女兒)>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신중국 성립 후 첫 전쟁영화로 ‘카로위발리 영화제’에서 ‘자유투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주2)

1986년 9월 7일 목단강시는 이들 8녀들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빈강 공원 광장에 ‘팔녀투강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높이 13m, 길이 8.8m의 화강암으로 조각되었으며, 1989년 중국 국무원에 의해 ‘중점열사기념건축물 보호단위’, ‘성급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지정됐다고 한다. ‘8녀투강’의 제자는 주은래 총리의 부인인 등영초가 썼다고 한다.

중국은 2009년 신중국 창건 60주년을 맞아 중앙조직부, 중앙선전부, 중앙통전부 등 11개 부문 연합으로 “100명 신중국 창건에 특출한 기여를 한 영웅모범인물”과 “신중국 창건 이래 중국을 감동시킨 100명의 인물”을 선정했는데 그 중 ‘8녀투강’의 여전사들이 1위로 뽑혔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8녀 중에 조선족 열사인 이봉선과 안순복이 포함되어 있다. 안순복은 피복창의 책임자로서 사실상 8녀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시간문제 때문에 이 비를 참관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중에 이들의 모습은 통화에 있는 ‘동북항일연군기념관’에서 사진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기념관에서 보니 8녀 가운데는 13세의 나이어린 대원도 있었다. 이를 보고 누군가 13세의 어린나이에 어떻게 그처럼 투철한 항일의식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사정을 감안할 때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기 아이들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조숙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나이에 일본군에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눈앞에서 부모가 학살당하는 것을 경험한 어린아이들은 유격대를 따라 나서게 되고 자연스럽게 유격대원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명으로 후에 북한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최현의 경우에도 독립군이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11세의 어린나이에 전령병 노릇을 하면서 항일투사로 성장했다.(주3) 당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13세의 나이에도 일본군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투철한 항일의지를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경험과 세대의 사람들이 함께하다

▲ 연길에서 첫날 저녁 식사. [사진 제공-임영태]

현지시간으로 오후 3시 15분경,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첫 숙박지인 연길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는 아래 운전석과 짐칸이 있고, 2층에 승객 좌석이 있어서 다른 일반버스보다 약간 높았다. 59인석이어서 그런지 좌석의 앞뒤가 약간 좁았지만, 일행이 22명밖에 안 됐기 때문에 공간은 넉넉했다. 가이드는 한족 출신의 버스 기사로 그는 운전 실력이 뛰어나 빨리 가면서도 승객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는 최고라고 자랑했다. 과연 우리는 그의 운전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기행 중에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빡빡한 일정으로 우리는 항상 시간에 쫓겨야 했고, 예정시간보다 늦게 출발하기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예상시간보다 항상 빨리 목적지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목단강공항을 나와 시내를 달리면서 주변을 보니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시내를 벗어나 시골을 지나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길옆으로 온통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가이드가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고 향후 일정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이어서 참석자들의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다. 일행은 멀리 전남 여수, 순천에서부터 전북 전주, 강원도 삼척과 속초, 그리고 경기도 여러 곳에서 왔다. 민주연합노조 조합원과 그 가족이 절반 넘게 다수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시민단체와 진보정당 관련자, 개별 참가자 등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60세였고, 가장 어린 나이는 12세였다. 우리들은 직업, 경험,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기행을 함께했다.

목단강 시내를 지나고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연길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와 국도, 산길을 번갈아 탔다. 버스 차창 바깥으로 중국 동북 지방의 농촌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그러나 버스가 두어 시간쯤 달리자 그 풍경도 볼 수 없었다. 해가 지면서 금방 어둠이 찾아왔다. 5시쯤 되니 주위가 캄캄해졌다. 버스는 쉬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몇 시간을 달린 뒤에야 가까스로 한 곳에 버스가 멈추었고, 우리는 잠시 동안 급한 볼일을 보았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5시간 정도는 이웃집에 놀러가는 거리라고 한다. 그만큼 중국이 넓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시골길은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길로 가는 길은 멀었다. 거리상으로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우리처럼 고속도로가 잘 닦여 있지 않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휴게소도 없었고, 휴식도 없었다. 생리현상도 잘 조절해야 했다. 기행 기간 내내 버스가 멈추는 곳에서 가장 먼저 우리들이 찾은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래도 기사의 뛰어난 운전 실력 덕분에 예정보다 1시간이나 이동 시간이 단축되어서 7시 약간 지났을 즈음 연길시에 도착했다. 우리는 약간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터여서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할 수 있었다.

식사 후 첫날 숙소인 세기호텔(世紀酒店)로 이동했다. 나는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선생님과 룸메이트가 되었다. 우리는 호텔방에서 한국에서 가져간 소주를 한잔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잘 통했다. 기행 첫날밤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강변 야경이 화려했다. 중국은 어느 도시나 가면 중심가의 야경이 멋지다. 중국 당국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들었다. 호텔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약간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은 영하로 내려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5월 초, 연길에서 밤에 갑자기 눈이 왔던 생각이 났다.

경박호와 왕청현을 스쳐 지나가면서

▲ 도문의 중국 세관통관문 옥상 위에서 바라본 북한. [사진 제공-임영태]

첫날 우리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연길로 오면서 경박호와 왕청현은 들르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는 간단히 하고 넘어가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오늘날 경박호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백두산과 더불어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한국 독립군과 항일무장투쟁의 많은 사연이 깃들인 곳이다. 1933년 2월 황학수가 지휘하는 한국독립군과 시세영의 중국구국군은 연합작전을 펴 경박호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주군 100여명을 섬멸하는 ‘경박호대첩’을 이끌었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와 더불어 한국 독립군의 4대첩으로 일컬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또한 1936년 1월에는 경박호 북쪽의 북호두에서, 그리고 2월말부터 3월초에는 경박호 남쪽의 남호두(南湖頭)(주4)에서 조중연합의 항일무장부대인 항일연군의 주요 지휘관 회의가 개최되었다. 위증민, 주보중, 김일성, 왕덕태, 이학충 등 동북항일연군의 중국인 및 조선인 주요 지휘관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당시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민생단 문제’를 마무리 짓고,(주5) 김일성이 지휘하는 항일연군 2군 6사는 통일민족전선에 입각한 조국광복회 결성 등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처음 북호두 회의에서는 당시 북만 중국 공산당 서기 위증민이 코민테른 7차대회의 결정에 기초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중국인부대와 조선인부대로 분리하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김일성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국제주의 원칙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항일을 기치 아래 공동투쟁을 벌여온 사정을 고려할 때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생단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분리할 경우, 소수인 조선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해지고 조중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와 분열이 생길 수 있음을 감안한 것이었다. 당연히 위증민, 주보중 등의 중국인들도 이를 환영했다.

이러한 역사적 결정이 있었던 곳이기에 북한은 이 지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북한이 이 회의를 얼마나 중시하는가는 2010년과 201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두 번이나 이곳을 방문하고 식사까지 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주6)

왕청현 또한 항일유격대의 근거지가 있던 곳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소왕청의 마촌 지역은 초기 항일유격대 사령부가 있던 지역으로 1933년 4월과 12월의 2차에 걸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방어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중국 구국군과 공산당 유격대, 조선인 유격대 등이 함께 참여했다. 북한은 이 ‘마촌 방어전투’를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 ‘간삼봉 전투’ 등과 더불어 항일투쟁 시기의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고 있을 정도이다.

중국 도문 시에서 바라보는 북한 땅

▲ 중국 도문에서 바라본 북한 남양역. [사진 제공-임영태]

10월 3일 금요일, 기행 둘째 날. 우리는 7시 30분, 호텔을 출발 도문으로 향했다. 1시간 뒤 우리 도문시 북중 국경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이곳에서는 플래카드를 내걸 수 없다고 미리 경고했다. 우리는 그 뒤에도 백두산과 광개토왕릉 등 중국이 예민하게 생각하는 곳에서 플래카드는 물론이고 구호도 외칠 수 없다는 경고를 수차례 더 들어야 했다.

두 번째 도문행이어서 낯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감회가 깊었다. 유행가 가사에 등장하는 ‘두만강 푸른 물’은 없었다. 물길은 누런 흙탕물에 가까웠다.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선착장도 있고 유람선도 운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북중 국경을 가로지르는 도문강 다리로 갔다. 두만강 다리도 입장료를 내야 했다. 중국은 모든 곳에서 입장료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곳에서도 입장료를 받았다. 인구가 너무 많은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관광지가 사람으로 넘쳐나 금방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가 너무 돈을 밝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을 연결하는 두만강 다리는 좁았다. 차 두 대가 교차할 수나 있을까? 우리의 걸음은 다리 중간 북한과 중국의 경계에서 멈춰야 했다. ‘조중변계선(朝中邊界線)’이라고 한글과 중국어로 쓰여 있고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을 넘으면 북한 땅이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그 경계선 위에서 사진을 한 장 찍는 것으로 끝나야 했다. 저 멀리 다리를 따라 끝부분에 온양역인 듯 보이는 건물 벽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북한쪽은 평온한 가운데 사람들의 움직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4, 5명이 움직이는 모습이 언뜻 들어올 뿐 사람들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이다. 한국은 공휴일이다. 나는 어쩌면 북한도 개천절이어서 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북한에서는 개천절날 쉬지는 않지만, 이날 평양에 있는 단군릉에서 단군제를 지내며 기념한다고 소개되어 있었다.(주7)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두만강교 중국쪽 입구에는 중국세관으로 들어가는 화물차 교각이 서 있는데, 그 높이는 10미터는 될 것 같았다. 왼편 좁은 계단을 통해 그 교각 위로 올라가면 북한과 국경 주변을 잘 볼 수 있다. 교각 통로와 꼭대기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는데 북한돈과 북한담배도 팔았다. 이 지역을 방문한 모든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북한의 산들은 대부분 나무가 없었다. 중국쪽은 산들도 완만하고 숲도 우거진데 비해 북한쪽 산들은 가파를 뿐 아니라 나무까지 없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든다.

중국의 창지투 개발, 그리고 북중의 경제적 밀착

▲ 도문시에서. 뒤로 두만강과 강 건너 북한을 배경으로 선 필자. [사진 제공-임영태]

도문시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북중 국경을 연결하는 요충지의 하나다.(주8) 도문은 중국의 변방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에서도 중심지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이 동북지역을 전략적 개발지구로 지정하고 창지투(창춘-지린-투먼) 개발을 추진하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중국의 창지투 개발은 해안을 따라 이어진 동남지역의 성장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서안 등 내륙지역과 동북지역 등으로 개발을 확대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중국은 변경지역의 여러 국가들, 즉 북한, 러시아, 몽골 등과의 연계 개발을 통해 이들 국가를 중국의 경제권 내로 포섭하려 하고 있다. 도문은 그런 중앙정부의 전략적인 동북 개발의 출발점이며 북한으로 연결되는 길목이다.

현재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적으로는 밀착되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소원한 관계에 놓여 있다. 북한이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감행하고, 중국 지도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장성택을 처형한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2008년 이후 중국이 북한에 대한 광물자원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으며, 창지투 개발과 위화도 개발, 나진선봉지구 개발, 황금평 개발, 나진항과 청진항 장기임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양국의 경제관계는 매우 밀착되어 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북한 전문가들과 관련자들이 북한 경제의 중국에의 종속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북한은 석유 등 전략물자를 비롯한 무역의 대부분은 중국에 의존하고 있고, 북한에서 유통되는 상품 또한 90%가 중국산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에의 경제적 의존도가 깊어진 상태이다. 광물 등 북한의 천연자원에 대한 중국의 독점적 확보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남한과의 경제협력 창구가 막힌 상태에서 북한이 그 활로를 중국에서 찾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북한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 경제가 1970년대 초반까지 일본 경제의 하위하청구조로 전락했다고 평가받았지만,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는 주요 산업분야에서 일본과 대등하거나 능가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일본과의 격차가 근본적으로 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북한 경제 또한 장기적으로는 중국에의 의존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북중 경제가 밀착되는 것이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촉진할 수 있으므로 이 또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불리할 것이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주9) 결과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고민은 많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봉오동 전투 현장 답사

▲ 봉오동 전적비 앞에서. [사진 제공-임영태]

도문의 북중 국경 관람이 끝난 뒤 우리는 그곳에서 가까운 곳(30리가량 떨어진)에 위치하고 있는 봉오동 전투 전적지로 향했다. 봉오동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시골 농촌의 풍경이 펼쳐졌다. 주변에는 옥수수밭이 계속되었고, 산과 들에는 어느 듯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산들은 한국처럼 가파르지는 않았고,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있어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간간이 마을이 보였고 주변에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봉오동으로 가는 길은 깊은 계곡과 산골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법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을 지나 담장이 있고 건물이 있는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정문에는 우리말과 중국어로 ‘도문시 봉오동 저수지’라고 쓰여 있었다. 봉오동 전적지는 도문시민들을 위한 상수도 수원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길 양 옆으로 백양나무가 보기 좋게 심어져 있었다. 한 5분쯤 걸어 들어가니 왼편 산기슭에 ‘봉오동반일전적지’라고 이름이 붙은 기념비가 나타났다.

1993년 6월 중공시 도문시위통전부, 도문시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가 세운 작은 전적비가 한 구석에 놓여있고, 2013년 6월 도문시인민정부가 새로 세운 전적비가 모양새 좋게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적비는 제법 그럴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큰 규모는 아니었다. 나중에 보게 되는 ‘청산리 전투 전적비’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종종 보게 되는 현충탑처럼 규모가 컸다. 봉오동 전적비 위쪽 중앙에는 붉은 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내게는 이채롭게 다가왔다.

봉오동 전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사령으로 한 독립운동대한북로독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골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 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올렸다. …

연변반일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 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 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
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의 승첩이다.(주10)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어 있다. 홍범도 장군이 한국에서 저평가된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소련으로 건너갔으며,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념의 잣대로 모든 것을 보려는 냉전시대의 유물이 독립운동사를 바로 보는 일도 가로막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홍범도 장군의 업적이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시작해, 의병장이 되었고, 포수부대를 거느리며 전설적인 위용을 떨친 홍범도 장군.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학식이 부족한 평민출신의 의병장, 머슴, 포수, 전설적인 독립군 지도자 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우리의 인식을 깨뜨릴 결정적인 증거물이 발견되었다. 연해주에 있는 어느 박물관에서 도올 김용옥이 찾아낸, 홍범도가 의병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인석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뛰어난 학식을 소유하고 달필을 자랑하는 인물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독립투쟁 과정에서 뛰어난 전략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실천적 경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사물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학식과 지적 능력을 소유한 때문이었던 것이다.(주11)

본래 봉오동 전투가 치열하게 펼쳐진 마지막 장소는 전적비가 있는 곳에서 한창 계곡 위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저수지가 되어 있다. 시간이 촉박한 때문에 저수지까지 올라가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언뜻 중국의 도문시 정부도 한국 방문객들에게 여기서 사진 한 장 찍고 끝내라고 전적비를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오동 전적비 앞에서 우리들은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플래카드도 펼쳤다. 그날 봉오동 전투 현장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보려면 골짜기를 보는 것은 필요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에는 반드시 그곳을 가보리라 다짐하면 그 자리를 돌아섰다.

연변박물관을 돌아보며 드는 생각들

▲ 연변박물관 혁명역사관에 전시된 조선족의 항일활동 사적. [사진 제공-임영태]

봉오동 전적지를 떠난 우리들은 다시 연길로 향했다. 연변 조선족박물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연길까지는 대략 1시간쯤 걸렸다. 연변박물관은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 연변조선족혁명기념관, 연변조선족자치주민속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5층으로 된 박물관의 규모는 제법 컸다. 박물관에는 연변지역에서 발굴된 고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연변조선족의 역사, 민속과 생활 풍습, 연변 조선족들의 혁명운동 역사와 혁명열사 열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역사 등이 차례로 정리되어 있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 3일 중국 55개 소수민족 최초의 자치주로 성립되었다. 연변자치주가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은 조선족이 중국 혁명운동 및 신중국 건립 과정에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조선인들은 중국 내에서 일제에 저항하여 중국인들이 항일투쟁을 벌이기 전부터 반일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30년대 중국 민중과 연대하여 항일연군을 조직하고 반일투쟁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이 끝난 뒤 1945년부터 시작되는 국공내전에서도 조선인들은 중국 공산당군이 장개석의 국민군을 물리치고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주도인 연길시를 비롯하여, 용정시, 훈춘시, 화룡시, 도문시, 돈화시, 왕청현, 안도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인구는 220만 명, 조선족은 80만 명에 이른다. 8개의 시·현 가운데 조선족 비율이 2%에 불과한 돈화시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46.5%가 조선족인 셈이다. 처음 연변자치주가 구성되었을 때는 조선족이 70%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그 비율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현재는 80만 명의 조선족 등록인구 중 실제거주자는 20만 명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한다. 한국과 중국 내의 대도시 지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때문이다. 이는 조선족 연변자치주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태이다. 이곳에 한국을 비롯한 해외 기업들이 유치되어 경제발전과 함께 일자리가 대거 창출되면 그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없다.

연변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나는 중국 조선족이 앞으로 지금과 같은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그 주역이었던 예맥족(고구려의 지배족이며 지금의 한국인의 조상)은 만주땅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일부는 고려에 흡수되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서 삶을 터전을 이어갔지만 주도적 지위를 상실하면서 고유의 문화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고려 시대 만주지역에서 흥기한 거란과 여진이 중원을 위협하고, 한반도에까지 압력을 가했으나 그들은 고구려의 주역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맥계 고구려족의 통제를 받던 주변의 이민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고, 나아가 발해와 거란의 후예들까지 포섭,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규합한 뒤 후금을 세우고 뒤이어 중원을 장악하며 청나라를 세웠다. 이 만족 속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들이 포섭되었지만 그들은 한반도 국가와는 사실상 별개였다.

지금 연변자치주 조선족은 대부분 조선 말기, 또는 일제 침략시기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우리가 북간도라고 불렀던 이 지역에는 조선인들이 70% 이상을 점했고, 항일투쟁에 참여한 사람들도 조선인이 다수였다.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가 다른 어떤 소수민족 지역보다 가장 먼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생활수준이 높았던 연변조선족자치주도 개혁개방에 따른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크게 변화했다. 1940년대까지 가장 먼저 산업이 발전했던 동북지역은 경제 발전에서도 뒤떨어진 중국의 변방 지역이 되었다. 그와 함께 조선족은 연변자치주에서조차도 소수로 전락했으며 그 정체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연변박물관뿐만 아니라 우리가 돌아본 역사유적지, 동북항일연군기념관(양정우공원), 고구려 광개토왕릉과 장수왕릉, 압록강단교(항미원조기념관) 등에서 중국 조선족의 현재적 위상과 더불어 그들이 겪는 정체성의 위기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은 철저히 중국의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따라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나는 연변박물관에서 조선족의 역사, 혁명운동사 등에서도 그런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용정의 대성중학교 건물을 돌아보다

▲ 용정 대성중학교 자리 복원 건물. [사진 제공-임영태]

연변박물관을 주마간산 식으로 흩어 본 다음, 우리는 용정으로 향했다.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대성중학교 건물은 지금의 용정중학교 옆에 재현, 보존되어 있었다. 대성중학교 건물 정면 오른 쪽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적혀 있는 시비가 있었고, 조금 비켜선 곳에는 이상설 기념비가 서 있었다. 윤동주와 이상설은 1910년대부터 시작되는 민족운동의 요람인 이곳 용정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윤동주는 한국 국어 교과서에도 많은 시가 실린 탓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친구로서 명동 소학교에서 같이 공부했으며, 이곳 용정의 은진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다시 문익환과 함께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고, 연희전문을 졸업했다. 윤동주는 그 뒤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도지사대학에 재학 중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1945년 2월 16일 사망했다.

이상설은 대한제국 시절의 관리 출신으로 나라가 망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곳 북간도 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용정에 최초의 조선인 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우고 초기 민족운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는 이회영 등과 함께 헤이그 밀사 사건을 준비, 기획하고 직접 헤이그에 파견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 용정에서 민족운동을 펼쳤다. 그는 1917년 2월 17일 독립운동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지만 초기 민족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다. 서중석 교수는 ‘그가 살았다면 아마도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주12)

서전서숙이 있던 자리는 용정실험소학교가 들어서 있고, 건물 한 모퉁이에 ‘서전서숙 옛터’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 기념비 하나만 남아 있다. 중국 국경일이어서 학교 문이 닫힌 관계로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멀리 담장 바깥에서 사진만 한 장 찍고 돌아서야 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요무대 중 하나이기도 한 용정은 1920년대 북간도 항일민족운동의 요람일 뿐 아니라 당시에는 가장 큰 도시였다. 이곳에는 민족운동의 상징이 된 명동촌 등에 여러 민족학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동흥중학과 대성중학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지금의 대성중학은 대성, 은진, 동흥, 광명, 명신여학교, 광명여학교가 합쳐진 것으로 이곳 출신의 유명인물로는 윤동주와 문익환을 비롯하여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청년문사 송몽규, 항일무장투쟁시기 중공당 동남만성위 조직부장 이동광,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1사 참모장 이민환, 왕청현위 제1서기 김훈, 훈춘현위 서기 오빈과 서광, 요하중심현위 서기 박진우,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당위서기 겸 조직부장 박봉남, 항일연군 제7군 제3사 정치부 주임 이일평, 항일연군 제8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김근, 북만성위 서기 겸 항일연군 제3로군 지도자 김책, 항일연군 제3방면군 참모장 안길 등이 있다. 북한의 전 총리 이종옥, 한국 전 국무총리 정일권과 이주일 장군도 이곳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용정 대성중학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윤동주 교실 등이 있고, 2층은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간단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곳에서는 용정중학교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용정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사, 민족학교의 역사 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한 바퀴 돌아 내려오면 방명록과 함께 성금함이 있다. 대성중학을 돌아보면서 나는 남과 북, 중국과의 관계에서 연변의 미묘한 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탈바꿈한 윤동주

▲ 윤동주 생가 안에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비. [사진 제공-임영태]

대성중학을 관람한 뒤 우리는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한 30분쯤 달리니 작은 농촌 마을이 나왔다. 명동촌은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가 명동소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침 윤동주 생가는 문이 잠겨 있었다. 가이드가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조금 있으니 관리자 여성이 나타나 자물쇠를 풀어주었다. 우리는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복원한 생가 집 안에도 들어가서 살펴보았다. 그 바람에 이곳 조선족 가옥의 실내구조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동주 생가는 조부에 의해 처음 복원되었는데, 2012년 중국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다시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들은 본래 있던 그대로였으나 대 곳곳에 새로 시비가 세워졌다. 그렇게 해서 윤동주의 시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돌에 새겨져 여기저기 놓여졌다. 생가 입구 정면에 ‘중국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새긴 큰 돌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건 확실히 중국의 의도적인 행위가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윤동주를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윤동주가 ‘조선족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를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그리고 수많은 시집에서 만났다. 그래서 너무나 친근했던 탓에 나는 그가 중국에서 살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윤동주는 중국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을 때에도 조선인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전에도 조선인이었다.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 지역으로 넘어갔다. 윤동주는 당시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성장하면서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조선인으로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윤동주가 단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중국땅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늘날 중국은 그를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는 중국인이라는 주장이다. 윤동주 생가를 돌아보면서 나는 동북공정이 생각났고,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떠올랐으며, 중화역사의 탐원공정과 중화주의, 더 나아가 중화제국주의가 떠올랐다.

우리가 윤동주를 두고 중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윤동주의 시를 중국인들이 중국어로 번역해 놓았다고 해서 그가 중국의 조선족 애국시인이 되는 것일까? 그의 정서와 언어, 감정 상태는 온통 조선인의 그것인데 말이다. 중국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가 얼마나 한국어의 언어적 감성과 한국인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미묘한 언어적 감수성을 절대로 중국어로는 옮길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윤동주의 시가 중국 교과서에 실릴 날도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마음이 안타깝고 서글프다.

우리 민족의 끈기를 보여주는 연변 특산물 사과배

▲ 연변의 특산물 사과배. 물이 많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사진 제공-임영태]

연길에서 용정으로 넘어오면 구릉지역을 따라서 끝없이 과수원이 펼쳐진다. 우리는 그 과수원에서 나는 연변의 특산물 ‘사과배’ 맛을 보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연변의 사과배 맛이 일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변에 가면 꼭 한번 맛보고 싶었으나 지난번에는 5월이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정을 지나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가이드가 마침 과수원 옆에다 차를 세우고 2박스나 사서 그 맛을 보여주었다. 사과배는 사과의 속성이 포함된 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양과 때깔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맛은 좋았다. 그다지 달지 않으면서도 물이 많아 시원하고 담백했다. 농약을 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는 쓱쓱 닦아서 그 자리에서 한입씩 베어 물고 그 맛을 즐겼다.

사과배의 역사는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2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2대째의 최병일이라는 분이 동생에게 부탁해 조선에서 가져온 여섯 그루의 배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노력 끝에 추운겨울도 지내고 해서 6년 만에 여섯 그루 중 세 그루에서 배가 열리는 결실을 맺었다. 이 배는 1930년대 연변지역에 널리 퍼졌고, 맛이 일품이라고 해서 ‘참배’라고 불렸다. 1952년 길림성 과일품종조사팀은 이 과일이 확실히 새로운 품종이라고 확인했고, 그것이 사과를 닮았다고 해서 ‘사과배’로 불리기 시작했다.(주13)

용정에는 무려 25만 그루나 되는 사과배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수원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만무과원’이라고 불리는 이 과수원은 1952년 초대 연변자치주장 주덕해가 처음 구상했다. 용정시의 구릉을 따라서 끝없이 펼쳐지는 사과배 농장을 보면서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한 우리 조상들의 고난의 역사를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땅에 처음 벼농사를 시작한 것도 조선족이고, 따뜻한 지방에 자라던 배나무를 추운 북방에서 살려내어 새로운 사과배 품종을 만들어낸 이들도 조선족이다. 용정벌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 더 넓게 펼쳐진 사과배 과수원을 보면서 나는 새삼 우리 조상의 끈기와 지혜에 감동했고, 그들에게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동촌을 구경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 연길 곰 사육장을 돌아보았다. 이곳에만 1800마리의 반달곰이 있고, 북경에도 1800마리가 있다고 했다. 곰사육과 관련된 설명, 그리고 곰쓸개(웅담)를 채취하는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우리 일행 중 몇 사람이 웅담을 구입했다. 과연 웅담의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일행 중 당장 그 덕을 본 사람이 있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명준이가 첫날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다. 음식에도 적응이 안 돼서 힘들어 했다. 그런데 웅담을 물에 타 먹고 다음날부터 상태가 좋아졌다. 웅담 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비이락이라고 해야 할까?

어둠 속에서 청산리 대첩 전적비를 만나다

▲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사진 제공-임영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화룡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예정 시간보다 2시간 이상 지체되어서 마음이 급했다. ‘청산리 대첩 전적지’로 가는 길은 시골길의 연속이었다. 연길에서 한동안 버스가 달리니 해가 서산에 짧게 걸려 있었다. 청산리 전적지로 가는 길은 봉오동 전투 현장보다 훨씬 더 깊은 산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청산리 전투는 한 골짜기에서 하루 만에 끝난 전투가 아니다. 적어도 열흘 이상에 걸쳐 여러 골짜기와 들판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주변 지역이 모두 청산리 전투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적비 앞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전적비 앞에는 인가가 한 채 있었으나 주변은 적막강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가에서 나온 몇 마리의 덩치 큰 개들이 방문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버스에서 내려 전적비 계단을 올라가니 주위는 금방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확실히 산골은 해가 넘어가면 금방 어둠이 찾아온다. 우리 일행은 단체사진도 한 장 찍지 못한 채 그곳 떠나야 했다. 주위가 어두워서 지형도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청산리 전적비는 봉오동 전적비와 비교하면 매우 웅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념비에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한글과 한자로 쓰여 있었고, 아래쪽 기단을 돌아가면서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비문은 중국어(한문)로 되어 있었고, 비문 마지막에는 중국어로 ‘연변각족인민 경건, 2001년 8월 31일 준공’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기념비가 건립된 과정이나 사연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너무 궁금했다. 왜 비문에 이런 표현이 쓰였으며, 비문은 왜 중국어로만 쓰여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이 기념비는 봉오동의 그것보다 웅장하게 만들어졌을까?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김삼웅 선생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기에도 중국 동북공정의 여파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주14)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굳이 여기서 그 내용을 재차 정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청산리 대첩은 봉오동 전투, 대전자령 전투와 더불어 독립군의 3대 승첩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때의 독립군은 민족주의 계열만을 의미한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을 포함한다면 훨씬 많은 대규모 항일전투승첩이 있다. 아무튼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서군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등의 연합부대가 만주 길림성 화룡현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간도 일대에 진출한 일본군 부대와 벌여 크게 승리한 전투를 총칭한다.

삼둔자와 봉오동 등지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기 위해 ‘훈춘 사건’(주15)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했다. 이에 독립군 연합부대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한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조선인 학살, 조선인 마을과 기관의 초토화를 가져온 경신대참변이 벌어졌으며, 일본이 중국에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한국 독립군들은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져 러시아로 건너가는 등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런데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이 청산리 대첩의 실제 주역은 홍범도 장군이지만, 주인공이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이는 이승만 정권 시절 내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바 있는 이범석 등의 왜곡된 증언에 의존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장세윤 등의 국내학자와 박창욱 연변대 교수 등에 의해서 새롭게 확인, 정리되었다.(주16)

우리는 전적비를 벼락치듯 돌아보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때부터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까지는 내내 산길이었다. 어둠 속에서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역시 기사의 운전 실력이 빛을 발휘했다. 이동 시간을 1시간 이상 단축하여 8시경에 우리는 이도백하의 어느 식당에 도착했다.

저녁 9시경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군안호텔에 투숙했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여관처럼 보였으나 실내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객실이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방을 찾는데 한참을 헤맸다. 방은 약간 썰렁했다. 난방을 틀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난방을 포기하고 그냥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다시 어찌어찌 리모컨 조작에 성공해 1시간가량 난방을 할 수 있었다. 따뜻하니 좋았다. 다음날 일정은 더 빡빡할 것이므로 30분 더 빨리 움직일 것이라고 가이드가 말했으나, 나는 룸메이트와 함께 소주를 한잔씩 하고 잤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성산의 위용을 보다

▲ 버스 안에서 백두산이 보일 때 찍은 광경. [사진 제공-임영태]

10월 4일 토요일, 기행 셋째 날. 새벽 5시 모닝콜이 울렸다. 우리는 이미 그 전에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속옷도 갈아입고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백두산에 올라가면 날씨가 추울 것이므로 파커도 꺼내놓았다. 6시에 식사를 했다. 식사는 전날과 비슷했다. 어쩌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향료 샹차이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바람에 약간은 괴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만주지역 호텔과 한국식당의 음식들은 내 입맛에 비교적 잘 맞았다. 일행 중에 고추장과 젓갈을 가져온 사람이 있어서 그걸 나눠먹기도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가급적 그 지역의 음식에 적응하는 걸 여행의 원칙으로 삼는데 음식은 대체로 내 입맛에 맞았다.

버스는 7시경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옆으로 자작나무 군림이 있었고, 전나무 숲도 보였다. 버스는 한 시간 가량 달려 백두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오늘 오를 길은 서파 코스였다. 보통 북파와 서파를 많이 선택하는데, 서파는 마지막에 계단을 걸어서 오르고 북파는 지프차로 산 정상까지 오른다. 계단을 걸어서 올라간다는 말에 나는 적지 않은 기대감을 가졌다. 1박2일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강호동이 나와서 이곳을 올라가면서 헉헉대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보니 헉헉 되면서 올라갈 그런 코스는 아니었다.

백두산 입구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기 위해 일행은 모였다. 한번 이동하면 바로 화장실부터 갔다는 오는 게 우리들의 행동준칙이었다. 물론 그것도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지만 때로는 착오가 생기게 마련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이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모두가 한참동안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이드는 담배 피우다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한다며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담배의 유혹을 쉽게 끊어 버리기는 힘들다. 우리 일행은, 중국인이 담배를 피우다 공안에 의해 라이터가 부셔지고 담배도 부러뜨려지는 장면을 목격했단다. 그럼에도 우리 일행 중 누군가는 열심히 담배를 피웠다.

티켓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는데 한참동안 줄을 서야 했다. 중국인들의 질서의식은 생각보다 좋았다. 사람들이 범칙행위를 할 수 없게 제도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를테면 줄을 서는 데 나무로 꼬불꼬불하게 막아 놓아서 아예 새치기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새치기를 하려면 그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기어들어가야 하는데 금방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기다리는 것을 그다지 조급해 하지도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짜증을 내고 투덜댈 텐데 중국인들은 별로 그런 기색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기 위해 30분가량 기다렸다. 국경일 연휴여서 사람들이 많은 탓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다행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버스 한번 타는 데 3시간씩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서파를 택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백두산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는 한 시간 이상을 달렸다. 버스가 처음 출발할 때는 주변에 큰 나무들이 있어서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따위들이 보이고 곧바로 달리다가 가끔씩 커브를 돌아서 달려 나갔다. 그렇게 한동안 달리다 보니 저 멀리 흰 눈을 뒤집어 쓴 백두산의 위용이 눈에 들어왔다. 성스러운 흰 머리의 산 백두산이 보이자 버스 안에서 승객들의 탄성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뒤이어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두산과 주변 풍경을 스마트폰과 카메라에 남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고도 버스가 한참을 달리자 마침내 관목이 사라지고 백두산 툰드라 지대가 나타났다. 버스는 비교적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백두산 정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서파는 북파보다 각도가 확실히 완만했다. 그 때문에 사륜구동의 지프차가 아닌 버스로도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듯 보였다. 정상을 향해 나가면서 옆을 보니 간간이 보이는 자작나무들은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고 잎은 다 떨어진 채 꼿꼿한 노인처럼 바람과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 외에는 모두가 풀들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이제는 마른 풀도 사라지고 이끼류 식물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올라가니 마침내 정상 바로 아래쪽에 버스 정류장이 나타났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다

▲ 서파정상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 [사진 제공-임영태]

버스를 내려 화장실을 갔다 온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모두 1,440여개 정도였다. 계단마다 번호가 적혀 있어서 일일이 셀 필요는 없었다. 계단은 처음 나무 계단으로 시작되다가 중간에 돌계단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나무계단이었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달랐고, 중간에 쉬거나 돌아서 내려 올 수 있게 연결되어 있었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대열의 속도는 점점 더 느렸다. 빨리 가고 싶어도 쉽게 추월해서 가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계단에 차 있었다.

올라가면서 보니 중간 중간 가마가 대기하고 있었다. 걸어서 올라가기 힘든 사람을 가마에 메고 올려다 준다는 것이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까 비용은 편도에 우리 돈 10만원, 왕복 20만원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우리나라 어떤 관광지에도 이런 가마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중국에는 이곳뿐만 아니라 계단으로 돼 있는 높은 산에는 가마가 어디에나 있다고 한다.

이걸 보면서 나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문화적 차이, 의식의 차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몸이 건강한 사람은 이걸 타고 오르지 않는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굳이 가마를 타고 남의 힘을 빌어서까지 정상에 오르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그게 아니다. 내가 돈을 주고 올라가는데 그게 뭐 문제 될 게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데 젊고 건장해 보이는 사람이 가마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 모자를 쓰고 멋진 색안경까지 끼고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떳떳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중국의 왕조교체와 황제로 즉위한 인물들의 면면이 생각났다.

중국 왕조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자주 교체되었고, 기간도 짧았다. 또한 새로운 왕조의 창건자도 귀족이나 왕족, 또는 상당한 직위에 있던 인물이 아니라 신분이 낮은 평민 중에서도 많이 나왔다. 한 고조 유방, 명 태조 주원장이 대표적이다. 당 왕조 창건자 이연은 군 실력자였고, 송 왕조 창건자 조광윤은 후주의 장군이었다. 중국의 경우 실력만 있으면 평민이라도 언제든 황제가 될 수 있고, 돈이 있으면 황제처럼 살아도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중국인이 한국인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이야기다.

계단으로 오르는 길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계단 폭이 너무 넓지도 높지도 않아서 천천히 올라가면 쉬지 않고도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만했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온도가 조금씩 내려갔다. 정상에서는 바람막이 안에 겨울 파커를 받쳐 입어야 했다. 정상에 오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서파의 오른편은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그 때문에 관광객이 발을 디딜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았다. 천지의 물은 얼지 않은 채 그 파란 물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상근처에는 사람이 있는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오른편 경계에서 사진사가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즉석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한 장에 우리 돈 1만원(중국돈 60원)이었다. 사람들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5분도 안 돼 바로 그 자리에서 뽑아 주었다. 언뜻 보면 사진사가 떼돈을 벌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울타리 경계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4명이나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일정액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인화비용도 주어야 하고, 저 밑에 관리소에 임대료도 내야 할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도 얼마만큼의 돈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과연 사진사는 만원 중에서 얼마나 자기수중에 넣을 수 있을까? 인간세상은 어디나 먹이사슬이 존재한다.

우리들은 백두산 정상에서 크게 외치지도 못하고 작은 소리로 ‘파이팅’하면서 포즈를 취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일행은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백두산을 돌아보면서 든 생각들

▲ 금강대협곡 경관. [사진 제공-임영태]

계단을 내려온 우리는 돌아오는 셔틀 버스를 탔다. 백두산 정상에서 즐길 여유가 없어서 아쉬웠으나 금강대협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기에 기대감을 가졌다. 우리는 한참동안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금강대협곡으로 가는 길은 사람으로 넘쳐났다. 백두산을 소개한 영상물을 보니 금강대협곡의 장관이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 못지않게 웅장하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협곡을 따라서 만들어진 나무 길에서만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길 외에는 땅에도 내려서지 못하게 엄격하게 통제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멋진 장면이 곳곳에 연출되었다. 찬찬히 돌아본다면 정말 멋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속 길은 산책로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협곡 옆에 붙어서 사진을 찍어댔지만 멋진 광경을 제대로 찍기가 쉽지 않았다. 사진 찍을 자리를 잡기도 힘들만큼 사람이 너무 많았다.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여러모로 통제가 심해 관광객은 불편했지만 한편 자연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철저히 통제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금방 훼손되고 말 것이다. 망가진 자연을 되돌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예방이 최선이다.

협곡 구경을 끝낸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버스에 올랐다. 주차장에서 나가는 차량이 너무 많았다. 버스는 왔던 길로 나가지 못하고 좁은 임도로 나가기 시작했다. 일방통행의 임도는 포장도 안 돼 있어서 울퉁불퉁했고 빨리 달릴 수도 없었다. 그 길조차도 완전히 막혀서 차량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휴일 관광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임도를 빠져 나오는 데만 2시간이나 소요되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우리는 예정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은 3시경에야 예약한 식당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 탓에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끝내고 4시경에야 통화를 향해 출발했다.

나는 버스가 임도에 갇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을 때, 우리의 백두산 관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연변조선족자치구에 속해 있던 백두산 관할권이 지금은 길림성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 소식은 한국 TV에서도 크게 보도된 적이 있고, 가이드도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지금 중국은 백두산을 10대 명산 중 하나로 지정하고 대대적인 개발에 들어간 상태라고 한다. 이번에는 못 보았는데, 지난번에 왔을 때 나는 곳곳에서 펜션과 숙박시설을 짓는 것을 목격했다. 대규모 5성급 호텔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는 것도 보았다.

중국이 백두산 관할권을 옮긴 것은 아마도 백두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한족이 이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이 지역에 많이 오고가면서 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연변조선족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점점 조선족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 들은 사실인데, 연변대학 상황도 심각하다고 한다. 대학생 정원의 30%를 소수민족(조선족)이 채우지 못하면 (소수)민족대학 자격이 취소되는데 그렇게 되면 지원이나 혜택이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지금 연변대학의 강의는 대부분 중국어로 하고 있다고 한다. 점차 조선족의 한국어 구사능력이 점차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선족 학생의 비율도 매우 낮은 상태라고 한다. 위기의 연변대학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위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백두산에서 통화까지는 보통 6시간 정도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역시나 기사의 뛰어난 운전실력 덕분에 4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중에 국내 공영 방송에서 방영한 영상물을 시청했다. ‘시사기획 쌈’에서 북한의 광물자원에 대한 중국의 독점적 확보와 남북관계를 다룬 것이었다. 또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북한 대표단과 응원단 참여)를 앞두고 KBS 특집으로 ‘남과 북, 지난 시기 어떻게 살아왔나’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남과 북이 화해하고 서로 사이가 좋을 때,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상황이 달라지는가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저녁 식사는 8시가 조금 넘어서야 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9시경 우리는 숙소인 ‘만통호텔(萬通大酒店)’에 들었다. 호텔 로비는 화려한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한편에서는 리모델링 작업이 한참이었다. 한쪽 벽에는 사장과 통화현 서기가 찍은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현서기가 바뀔 때마다 사장과 찍은 사진들이었다. 이른바 중국의 ‘꽌시(關係)’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호텔 내부는 외관에 비해 별로였다. 호텔 바로 앞이 통화역이어서 밤새 기차소리가 들렸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통화는 역시 큰 도시답게 활기가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동북의 항일영웅 양정우를 찾아서

▲ 동북항일연군의 영웅 양정우 장군 부조. [사진 제공-임영태]

10월 5일 일요일 넷째 날. 새벽 5시경 눈을 떴다. 한국의 집으로 짧은 소식을 보냈다. 날씨 때문인지 비염 증상이 나타났다. 급히 남아 있던 약 한 봉지를 입에 틀어넣고 물을 마셨다. 새벽 통화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일정이 약간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비는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떠날 때 그쳤다. 통화는 상당히 큰 도시로서(주17)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우리는 동북항일연군기념관이 있는 양정우 공원(중국명 ‘정우능원’)을 찾았다. 양정우 장군은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로 중국에서 주보중과 더불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동북 항일 영웅이다.(주18) 그는 동북항일연군 시절 제1군 군장으로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던 인물이다.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된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양정우 장군은 1940년 2월 배신자의 밀고로 숨어 있던 곳이 발각되어 일본군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길림성 몽강현(지금의 정우현) 한 밀림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일본군은 양정우, 위증민, 주보중, 김일성, 최현 등의 목에 높은 현상금을 걸었는데,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 속에서도 그들은 살아남아서 계속해서 일본군과 위만군을 괴롭혔다. 일본군은 양정우를 사살한 뒤 그의 목을 잘라 시내에 내걸었으며, 그의 배를 갈라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의 배 속에는 나무뿌리와 풀잎, 그리고 솜이 나왔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는 겨울 산 속에서 나무뿌리와 입고 있던 솜옷을 뜯어 먹으며 버텼던 것이다. 불굴의 항일투사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신중국 건립 후 중국 정부는 양정우 장군의 애국 공적을 기리고 후대 교육을 위해 정우능원을 조성했다. 능원은 1954년에 착공하여 1957년에 준공했다. 1958년 하얼빈에서 양정우 장군의 유골을 여기로 모셨다. 능원은 영당, 영묘와 진열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정부는 양정우 장군의 영웅사적을 높이 평가하여 정우현 남쪽 5킬로미터 지점의 양정우 순국지에 장군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으며 이곳 통화시에 정우능원을 세웠다. 정우능원을 열 때는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주덕 등 혁명원로들이 친히 꽃다발을 보냈고, 주덕 총사령관은 친히 “인민영웅 양정우 동지 영생불멸하리라”는 내용의 비문을 썼다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능원 개원을 축하하며 꽃다발을 보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양정우 장군을 기렸다.

“해방 후 중국당지도자의 한 사람은 동북항일유격전쟁의 위치를 밝히는 글에서 20여 년간의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가장 간고한 세 싸움은 첫째는 2만5천리장정이고 둘째는 노농홍군 주력이 장정한 후 남방에 남은 홍군의 3년간의 유격전이고 셋째는 동북항일연군의 14년간의 고투였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이 진행한 영웅적 항전의 기발에는 중국인민이 낳은 열렬한 공산주의자 양정우의 피도 스며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공동항일의 길에서 양정우가 이룩한 빛나는 투쟁업적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동북항일연군기념관에서 역사를 다시 생각하다

▲ 동북항일연군기념관 내에 있는 이름없는 항일투쟁에 나선 인민전사들의 모습. [사진 제공-임영태]

우리는 위쪽에 있는 양정우의 능에는 가보지 못하고 능원 아래쪽에 조성된 ‘동북항일연군기념관’만 관람했다. 기념관은 생각보다 상당히 잘 짜여져 있었다. 처음 들어가는 입구 유리문에는 중국어로 ‘철혈영혼 동북항일연군’이라고 붉은 글씨로 각인되어 있었다. ‘철혈영혼’은 큰 글자로, ‘동북항일연군’은 작은 글자로 돼 있었다. 왜 이렇게 배치해 놓았을까? 한참을 생각했으나 언뜻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기념관 내부는 동북지역의 항일운동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역사적인 자료들을 잘 배치해 놓았다. 동북항일연군의 활동 내역도 지도와 도면, 사진자료들을 함께 첨부하여 잘 정리해 놓았다.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의 전투상황을 디오라마로 만들어 전시하기도 하는 등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한 중국 인민들의 투쟁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있게 돼 있었다. 항일투사와 인민을 잔혹하게 살해한 일본군의 만행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군의 잔혹상을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다. 목단강 시에서 보려했으나 보지 못한 ‘투강8녀’의 내용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동북항일연군이 조선과 중국이 연합하여 활동한 군대라는 내용이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 김일성 주석과 주은래 총리 사이의 회담에서 동북항일연군은 ‘중조인민의 연합군’이라고 정리한 바 있는데, 그런 사실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조선인의 항일투쟁을 중국 조선족의 항일투쟁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1930년대 이후 중국 만주지역에서 싸운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은 어느 나라 역사로 보아야 할까? 항일연군 속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중국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역사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 이후 이른바 1국1당 원칙에 따라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중국 혁명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투쟁이라는 또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당연히 조선(한국)의 항일투쟁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은 동북항일연군 중 일부, 그러니까 김일성이 이끈 1로군 2군 6사 등의 활동만을 조선의 항일운동으로 취급하고, 그 나머지 모든 조선인 혁명가들의 투쟁을 중국의 역사로 파악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6사뿐만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2군 전체가 조선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김일성과 마지막까지 함께 활동했던 주보중도 그의 일기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 항일유격전쟁 중 중조인민은 공동사업을 위하여 선혈로 맺어져 있었다”라고 평가했다.(주19)

동북항일연군의 다른 많은 부대의 경우에도 조선인 혁명가들이 무장부대를 처음 조직할 때부터 마지막까지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김책, 최용건(최석천), 안길, 강건(강신태), 최현, 김일 등 북한 정권의 핵심인물들은 여러 부대들에서 핵심 간부 직책을 맡아 항일투쟁을 수행했으며, 중간 간부와 대원들 중에도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볼 때 동북항일연군 전체를 조중연합군으로 파악하는 것이 정당한 역사 인식이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입장에서 중국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해방 전 중국 땅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이미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환이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그러한 입장에서 1920~30년대의 독립군과 1930년 이후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조선족)중국인의 항일투쟁으로 정리하려는 것이다.

연변의 한 조선족 교수에 따르면, 중국 조선족의 경우에도 “젊은 학자나 세대일수록 만주 지역의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을 중국 조선족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그들은) 대표적으로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의 활동 일부만 조선인의 반일활동으로 인정하고, 동북항일연군의 각 군에 참여해 활동했던 대다수 조선인을 ‘조선족’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활동한 항일활동만 남북의 항일무장투쟁사로 인정할 뿐이고, 나머지 중국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인의 중국공산당이나 항일단체 활동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항일투쟁사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주20)

나는 정우능원 아래 조성되어 있는 ‘동북항일연군기념관’에서 중국의 이런 입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중연합이란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고, 항일연군의 중국 지도자들과 함께 중국의 조선족 항일투사들만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윤동주 생가 입구에 쓰여 있던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는 이와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만이 아니라 현대사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서 우리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협력하고, 역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광개토왕릉을 돌아보고 단동으로 향하다

▲ 집안광개토왕릉 비 앞에서. [사진 제공-임영태]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막혔다. 국경일 연휴여서 곳곳에 단풍 구경을 나온 관광객들로 넘쳤다. 시간은 지체되었지만 그 바람에 통화에서 집안으로 넘어가면서 자연 풍광은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시골 산길이 계속되었다. 산에는 이미 단풍이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강원도 어느 산길을 달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험한 길은 아니었지만 꼬불꼬불한 산길은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길 같았다.

곳곳에서 만난 농촌 마을 지붕 위에는 태양열로 온수를 데우는 온열장치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제 막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빠른 것 같다.” 자신의 집에도 태양열 온수장치를 설치했다는 어느 선생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며 한 말이다. 우리보다 개발이 늦은 중국이지만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빠른 부분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안으로 가는 길에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고구려 역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고구려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이 전쟁에 고구려가 패배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영역은 만주에서 한반도로 축소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으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와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우리는 예정보다 1시간 이상 지체되었다. 광개토왕릉은 사진에서 본 대로 무너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 규모나 위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도굴 과정에서 무너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왕릉에서 가까운 곳에 광개토왕 비석이 서 있었다. 사진으로 익히 봐 왔던 대로 광개토왕의 비는 유리집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안에서는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다. 광개토왕릉 주변에서 본 집안은 상당히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압록강 너머의 북한이 보였다.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힌 가운데 북쪽 사이로 좁은 길목이 있어서 지키기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집안 광개토왕릉 모습. [사진 제공-임영태]

▲ 집안 장수왕릉 앞에 선 필자. [사진 제공-임영태]

주마간산으로 광개토왕릉과 비를 본 다음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장군총으로 갔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는데, 광개토왕릉에 비해 그 모습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고 있었다. 광개토왕릉보다는 작았지만 위용 있게 서 있었다. 나는 중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에서 신라 왕릉을 보고 그 규모에 놀랐지만, 이번에는 그런 느낌은 안 들었다. 사진으로 하도 많이 봐온 탓도 있지만 규모면에서 중국에는 너무 큰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장군총 옆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가 있었다. 도굴로 앞면이 다 드러나서 마치 우리나라의 북방식 고인돌처럼 보였다. 장수왕이 총애했던 애첩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고 있는 부속무덤이다.

왕릉 주변에서 우리는 주민이 팔고 있는 찰떡과 사과를 한 무더기 샀다. 찰떡은 하나에 3천 원하는 것을 4개에 만원을 주고 샀다. 일행이 하나씩 먹을 수 있었다. 맛도 괜찮았다. 누군가 사과도 샀다. 약간 신맛이 나는 홍옥이었다. 어린 시절 먹은 바로 그 맛이었다. 집안의 홍옥 사과 맛은 나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일깨워주어 즐거웠다.

우리는 점심식사 후 2시경 단동을 향해 출발했다. 단동까지는 보통 4시간이 걸린다는데, 시간은 오후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단동은 압록강변을 따라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온다. 우리는 가는 동안 압록강과 함께 건너편 북한땅이 보이다가 한동안 사라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렇게 가다보니 어느 듯 단동에 가까워졌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후 5시경 우리는 마침내 압록강 하류의 작은 선착장에 도착했다. 압록강 넓은 물길 좌우로 섬이 보였다. 왼편 강 건너 섬은 북한 것이 분명했으나 오른편 섬은 중국쪽에 거의 붙어 있어 중국 것이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위화도란다.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러 왔다가 개경으로 되돌아 간 곳이란다. 최근 중국이 북한으로부터 장기 임대해서 개발하려 했다가 불발된 섬이기도 하다.

시간이 늦어서 유람선은 탈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우리는 8명씩 탈 수 있는 작은 쾌속선을 탔다. 배는 압록강 물길을 가르며 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향해 한참 동안 나아갔다. 좌우의 섬도, 앞에 보이는 땅도 북한 땅이다. 우리는 북한쪽 광경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이미 해는 넘어가 금방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 배가 돌아가야 했다. 돌아오는 길, 해는 넘어가고 배가 물결을 가르며 달리자 물이 튀었다. 약간 춥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동 시내를 산책하고 노동문제를 토론하다

▲ 압록강 하류의 선착장. 오른편에 보이는 섬이 위화도. [사진 제공-임영태]

우리는 단동시내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가일양광(假日陽光)호텔로 향했다. 호텔 시설은 매우 훌륭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낸 호텔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역시 단동은 큰 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우리는 시내 구경에 나섰다. 네 사람이 함께 나섰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잠시 방황하다가 시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시내 식당에는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간간히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술 취한 주객은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시끌벅적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단동시는 통화시보다 약간 큰 규모의 도시지만(주21) 훨씬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중 국경의 무역도시여서 이동인구도 많고 그만큼 식당, 유흥업 등 소비규모 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내 안쪽은 도로 포장도 엉망이고 인도는 정비가 제대로 안 돼 있었다. 한참을 걸었더니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우리는 왔던 길로 돌아서 다시 우리가 묶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는 호텔을 지나 압록강변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사거리가 나오고 오른편으로 공원 간판이 보였다. 우리는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술을 먹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공원이 적당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원 이름은 금강산공원(锦江山公园)이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金剛山)과는 다른 글자였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늦은 밤이어서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두어 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도 있었고, 나이든 사람들도 있었다. 공원 규모 꽤 커 보였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공원의 밤공기가 상쾌했다. 날씨가 쾌청한 탓도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자동차가 많지 않아서 공기가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중국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대국일 뿐 아니라 최대의 소비대국이다. 미국을 넘어선 지 한참 됐다. 현재는 1년에 1,600만대 가량 판매되고 있다. 2012년 통계로 중국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1억2천400만대였다. 오토바이도 1억300만대나 되니 엄청나다. 조만간 중국도 1가구 1차량 소유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기오염이 얼마나 심각해질까? 그런데 이 문제는 단지 중국만의 고민거리가 아니다. 중국의 환경오염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공원 입구 주변만 간단히 돌아보았다. 밤도 늦었고 지리도 알지 못하는데다가 언어소통도 안 되는 상황임을 감안했다. 다음날 가이드에게 들으니 이곳에서 주은래 총리와 김일성 주석이 만난 적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라고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금강산 공원은 상당히 규모가 컸다. 동물원, 간단한 아이들 놀이시설, 해방기념관, 태평대(연회장), 연꽃 연못과 정자, 미로정원, 걷기 코스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산으로 이어진 숲과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얼마동안 정문 주변을 배회하다가 공원을 나왔다.

압록강변까지 걸어가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호텔로 돌아와 소주를 한잔했다. 우리의 대화는 노동 문제가 중심이었다. 비정규직 문제가 주요하게 거론되었다. 기업별 노조의 문제점도 거론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자, 하청업체와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 대책 없이 길거리로 내몰린 중장년의 퇴직자들 문제가 현재 노동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노동운동이 이런 문제를 책임지려면 결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수반하는 정책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는 곧 노동자의 정치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노동자도 역사의식, 정치의식을 가져야 하며, 노동문제를 전체 사회문제의 하나로 바라보고 활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12시를 넘어 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압록강 단교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다

▲ 압록강 단교와 건너편의 압록강철교(중조우의교). [사진 제공-임영태]

10월 6일 월요일, 마지막 날. 5시에 모닝콜이 들어왔다. 룸메이트는 벌써 일어나 샤워 중이다. 나는 거실 텔레비전을 틀었다. 전날 저녁에 보니까 KBS 2TV가 나오는 것 같았다. TV에서는 아침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래 자막에 북한 고위급 인사가 김관진 안보실장과 회담을 했다는 내용이 떴다. 깜짝 놀라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확인을 했다.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대남당당 비서가 아시아경기대회 폐막식에 참석한 뒤 김관진 안보실장 등과 2시간 동안 만났다는 것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말 그대로 김정은 시대의 핵심인사이자 실세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시아 경기대회를 구실로 남한을 방문, 청와대 핵심참모와 회담을 했다는 것은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최룡해 비서가 북한 체육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단장은 황병서 총정치국장이었다. 북한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 중의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정확이 알 수 없었지만 북한이 적극적으로 대남행보를 하고 있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의 방남을 통해 남북은 고위급 접촉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탈북자단체의 대북선전 비라 살포와 한국 정부의 방조로 파탄 위기에 몰리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북한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탈북자 단체가 삐라를 뿌리자 10월 10일 북한이 고사총탄을 발사했고 남한도 이에 대응, 총격사건이 벌어진 것이다.(주22)

일행은 아침 식사 후 7시까지 호텔 로비에 모였다. 우리는 금강산 공원 옆에 위치한 잡화상에 잠깐 들른 다음 압록강 대교로 향했다. 중국은 아직도 연휴여서 인지 압록단교는 사람들로 붐볐다. 표를 끊고 들어가니 다리 아래쪽에 6.25 참전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말 6.25 때 사용된 포인지는 모르겠다. 압록강 단교로 올라가는 계단과 맞닿는 곳에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둥근 포대가 건재하게 서 있었다.

압록강 대교는 일제가 1911년에 건설한 것이었는데, 6.25 전쟁 당시 미군이 폭격을 해서 북한쪽만 끊어진 상태다. 1932년 통계에 의하면 보도 대교 통행자만 연간 2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리는 원래 큰 배들이 지나갈 수 있게 중간에서 열고 닫을 수 있는 개폐식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쪽에서 아홉 번째 연에서 열면 십자가 되고 닫으면 일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다리 보존을 위해 1934년 11월부터는 열지 않았다고 하며, 해방 뒤 기념하기 위해 한 번 열었다고 한다.

압록강 단교 옆에는 중국 단동과 북한 신의주를 이어주는 압록강 철교가 서 있었다. 중국은 이 다리를 ‘중조우의교’라고 부른다. 이 다리를 통해서 북한과 중국 사이에 대부분의 물자들(70%)이 오고간다고 한다. 이 다리 또한 일제 말기인 1943년에 건설한 것이다. 미군은 어째서 압록강 다리는 폭격했으면서 철교는 폭격을 하지 않았을까? 중국 국경일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압록강 철교를 오고가는 차량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가 구경하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 지나는 차량을 한 대도 구경하지 못했다.

다리 입구 벽 쪽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을 상징하는 대형 부조가 있었다. 조각상의 가장 앞에 선 인물이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일 것이다. 사령관 옆에는 돌격명령을 내리는 한 지휘관이 사령관보다 작게 형상화 되어 있었다. 그 뒤로 총을 멘 지원군 병사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철교에는 6.25 당시의 기록물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승만과 맥아더가 악수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다리는 거의 중간쯤에서 끊어져 있었는데, 중국은 이걸 깨끗하게 손질해서 관광 상품으로 잘 활용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단동과 북한은 대조적이었다. 단동은 화려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강변을 따라 늘어서 중국 경제 성장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 관광객을 실은 중국 유람선이 떠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1980년대 5공 시절 정수라가 부른 “강물엔 유람선 떠 있고, … 아 ~ 대한민국” 하던 그 노래 <아,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우리가 있는 단동 쪽은 부산했으나 강 건너편 신의주 쪽은 조용해서 적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북한 신의주 쪽에는 철교가 시작되는 부분에 부서진 잔해가 아직도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강가에는 숲이 우거진 가운데 간간이 오래된 건물들이 보였다. 한편에서 크레인을 설치한 바지선이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큰 선박에 무언가를 싣는 것인지 내리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신의주에 새로 짓고 있는 고층건물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거의 다 지어가는 듯 보였다. 타워 크레인 높이 가까이까지 건물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통일뉴스인지 아니면 다른 신문이나 잡지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북한 소식을 전하는 데서 신의주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듯도 했다. 그 전체 모습은 볼 수 없고 완공 단계에 있는 한 건물만 보일 뿐이었다.

여기서 압록강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현재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신압록강 대교를 건설 중이고, 북한과 중국이 공동 개발하고 있는 황금평이 나올 것이다. 황금평은 위화도처럼 중국쪽에 붙어 있는 북한 땅이다. 북한은 이 지역을 특구로 지정해 2011년부터 중국과 공동개발 중에 있다. 북한이 확정한 ‘조중 나선 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 경제지대 공동개발 계획 요강’에 따르면 북한은 중국에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황금평에 상업센터와 정보산업, 관광문화산업, 현대시설농업, 가공업 등 4대 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북한이 땅을 내주고 중국의 투자를 유치해 고용을 창출하는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 버스에 올랐다.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를 기리며 여순으로 향하다

▲ 안중근이 재판받은 일본 관동법원 내부 모습. [사진 제공-임영태]

단동에서 대련까지는 3시간 30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국도를 달려서 기사의 운전 실력으로 시간을 단축하는 게 가능했지만 고속도로는 한계가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뒤따랐다. 일정이 여전히 빡빡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히 비사성을 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비사성은 요동(여순)반도에 있는 고구려의 성 중에서 바닷가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성이다. 그러나 비사성은 여순 반도의 제일 위쪽에 있고, 여순감옥은 가장 아래쪽에 있어서 그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비사성 보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여순 감옥을 찬찬히 오랫동안 돌아볼 수 있었다.

단동에서 대련으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면서부터 단동 평야가 펼쳐졌다. 한동안 평야와 함께 똑바로 뻗은 고속도로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처럼 굴곡지거나 커브를 도는 일은 없었다. 고속도로 옆 가을 들판이 황금물결로 넘실댔다. 저 멀리 산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조차도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들판에는 벼도 있고, 옥수수도 있었다. 단동 쪽에는 벼를 심은 논들이 많았다. 대련 쪽으로 갈수록 점차 구릉이 나타나고 옥수수밭들이 많아졌다. 대련에 가까이 다가가자 다시 평지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한동안 산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김제평야는 댈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평지에는 수목원, 과수원이 있었다. 그리고 채소나 원예작물을 심은 시설물들이 나타났다. 우리의 비닐하우스와는 달리 아주 낮게 만들었지만 시설농업 재배인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대련을 향해 가는 동안 독립운동과 관련된 영상물을 시청했다. 여순에서 만나게 될 안중근과 이회영에 관한 것이었다. 안중근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졌으므로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독립군으로 시작해서 곤란에 처해 중국과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인사와 만난다는 정보를 얻은 다음 저격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저격을 감행하고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고, 사형되기까지 과정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회영 또한 이제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고 있다. 이회영 일가는 이항복의 자손으로 삼한 갑족이라고 할 정도의 명문가였지만 이회영의 제안에 따라 6형제는 모든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길에 오른다. 그들이 급히 처분한 재산은 현재 시가로 600억원이 넘는 거금이었는데(주23) 그들은 이 모든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독립운동가 양성 등을 위해 사용한다. 결국 해방 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6형제 중에서 넷째 이시영밖에 없었다. 그들 형제 중 어떤 이는 굶어서 죽다시피 했다. 이회영 또한 독립운동에 마지막까지 진력하다가 중국 땅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 일행은 모두들 숙연해졌다.

신채호 선생도 여순 감옥과 깊은 인연이 있다. 신채호는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한 역사학자이도 하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며, 소설가, 타협을 모르는 선비정신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등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의 비타협적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한말 유생으로 출발했으나 애국계몽운동가, 민족독립운동가를 넘어서 아나키스트로 사상적 진화를 이룬 끝없이 자기변화를 추구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신채호는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분개, 임정을 탈퇴한 국민대표자회의를 소집, 임시정부를 새로이 창조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의열단의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 만주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를 연구하여 한국사의 새 지평을 개척했다. 그는 이회영 등과 ‘무정부주의 동방연맹회의 북경회의’를 조직하는 등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1929년 5월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0년 형을 언도받고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 2월 이곳에서 옥사했다. 우리는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의 숨결이 살아 있는 여순 감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항일 역사의 기념물들을 잘 보존하는 중국

▲ 여순의 일본 러시아 감옥 자리. [사진 제공-임영태]

우리는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까 날씨도 점차 따뜻해졌다. 대련은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하다고 한다. 우리는 단동에서 1시간가량 달린 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장하(庄河)휴게소였다. 그곳에서 간단히 휴식을 취한 다음 계속 달려 드디어 대련 시로 들어섰다. 대련시는 상당히 컸다.(주24) 여순 반도는 현재 대련시의 일부로서 여순구로 되어 있었다. 여순과 대련의 관계, 굴곡 많았던 이곳의 근현대사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느라 고전한 상황, 그리고 여순 지역을 점령한 다음 2만여 명을 학살한 사실, 그것이 중국 침략 과정에서 있었던 첫 대량학살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관련된 보충 설명도 있었다.

오후 1시경 우리 일행은 마침내 여순에 도착했다. 먼저 식당으로 가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메뉴는 김치제육볶음, 된장찌개 등이 나오는 한식이었다. 우리 입맛에 맞았다. 우리는 비사성 보는 것을 포기한 덕분에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거기다가 월요일이어서 여순 재판소와 감옥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국경일이어서 문을 열어 놓은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자세히 그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우선 안중근 열사가 재판을 받은 여순 관동 법원으로 갔다. 일본이 이곳을 점령한 뒤 설치한 여순 관동 법원 자리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 옆에는 중국의 법원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관동 법원과 여순감옥을 처음 만든 것은 러시아였는데, 러일 전쟁 뒤 이곳을 장악한 일본은 관동법원과 여순감옥을 그대로 이어갔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하얼빈이었고, 그곳은 당시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안중근에 대한 관할권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이 이곳으로 이송해서 관동법원에서 재판에 회부,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신채호 선생에 관한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동영상물도 있어서 시청할 수 있었다. 잘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개략적인 내용은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있어서 재판과정이나 그 밖의 여러 자료, 시설들에 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현지 가이드는 조선족 여성이었는데 연변 억양이나 북한 억양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한국에서 온 연구자 같은 느낌을 주는 차분한 인상이었다.

법원 자리를 돌아본 뒤 우리들은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여순 형무소 자리로 갔다. 국경일이어서인지 법원자리보다는 훨씬 많은 관람객들이 있었다. 역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서 우리는 신분증(여권)을 보여주어야 했다. 왜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유가 있겠지만 가이드도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우리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분은 좋지가 않았다.

감옥은 꽤 넓었다. 내가 받은 느낌으로는 우리의 서대문형무소(지금은 서대문역사박물관) 자리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고, 시설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사 교육의 장으로서 잘 준비돼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나라의 서대문역사박물관보다 훨씬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었다. 감방과 병동도, 사형장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사형시설은 두 곳에 있었는데 안중근이 사형을 당한 특별 사형장도 잘 보존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특별감방도, 신채호 선생이 수감돼 생활하던 감방도 있었다. 이회영 선생은 이곳이 아니라 대련의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곳에서 옥사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이곳에도 그의 감방이 있었다.

이곳 여순감옥 자리에는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선생과 관련된 소개 자료들과 함께 얼굴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마치 한국 감옥을 돌아보는 느낌이었다. 사실 서대문역사관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게 없어서 아쉬운 점이 많다. 건물도 그렇고, 역사 자료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애를 마감하거나 그쳐간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또 서대문형무소는 해방 후에도 1984년 서울구치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서대문형무소, 서대문구치소 등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전후 시기 좌익수와 군부정권 시절 민주화운동가들이 수도 없이 그쳐갔다. 이곳을 제대로 보존하자면 이런 모든 내용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야 하지만 한국사회를 장악한 사람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우리 역사를 배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 대성중학교 자리 앞에 있는 윤동주 시비. 중국은 윤동주를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지칭한다. 아울러, 중국 만주지역의 역사유적을 돌아보면서 중국이 우리보다 후대에 대한 역사교육을 훨씬 잘 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우리 역사를 배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진 제공-임영태]

나는 이번에 중국 만주지역의 역사유적을 돌아보면서 중국이 우리보다 후대에 대한 역사교육을 훨씬 잘 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나친 민족주의의 강조는 이웃국가들과 불필요한 마찰, 갈등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우리는 너무 민족교육이 부족하다. 부족하다 못해 부재한 상태이다. 사실 현대사에서 남한을 지배해온 세력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자기 조상의 치부를 드러내는 그런 교육을 제대로 시키려 했겠는가. 하지만 중국은 항일투쟁을 벌였던 그 사람들이 신중국의 지도부가 되었으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으로 자본주의화 된 지금도 역사교육을 확실히 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적이지만 역사전시관, 박물관, 유물, 유적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특히 항일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게 곳곳에 그와 관련된 전시관, 박물관 등이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항일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겨우 독립기념관 하나 갖고 있을 뿐이지만, 그 마저도 임시정부와 우파 민족주의에 편향되어 있어서 반쪽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응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중국에서 반일의식이 고조되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항일역사를 중국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여순 감옥을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고려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중국에서 한국인이 민족박물관을 운영할 수는 없어서 민속박물관 한 켠에 자리를 얻어 우리역사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었다. 유물들은 의외로 다양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관장이 마침 일 때문에 부재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솔한 가이드도 그 내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상황이라 설명은 생략되었다. 가이드가 말하는 어감으로 봐서는 박물관장이 한국 재야 사학계의 강한 민족주의적 한국사 인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중국의 역사관을 크게 벗어나기 힘든 연변출신의 가이드로서는 다소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고려박물관장의 설명을 꼭 들어보고 싶다.

고려박물관을 핑 돌아보고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마지막으로 각자 느낀 소감을 한 마디씩 했다. 나는 역사기행 전반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이야기하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생략하기로 했다. 그 대신 ‘역사의 현재성’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냈다. 고대사도, 중세사도, 근현대사도 결국 현재의 역사이며, 현재의 관점이 과거의 역사 또한 규정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번 역사기행에서 똑똑히 보았다. 역사를 배우는 것도 결국은 현재의 우리 삶을 위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오후 은시 15분쯤에 공항에 도착해서 티켓을 끊고 수속을 밟았다. 비행기는 7시 정시에 출발했다. 오는 도중에 중국산 샌드위치가 간단한 기내식으로 나왔다. 비행시간을 짧았다. 2시간이 채 안됐다. 저녁 9시 조금 안 돼서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수속을 끝내고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9시 40분을 넘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져 버스에 오르니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4박 5일의 짧은 여정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역사를 향한 나의 고민과 노력은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
<주>

1) 위키백과 ‘조선족’ 항목 참고

2) 김혁, “목단강의 꽃이 된 그녀들”, 연변일보, 2011년 7월 25일

3) 최현의 아버지 최화심은 홍범도 부대에서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었으며, 현 북한 노동당 비서인 최룡해는 최현의 친아들로 알려져 있다.

4) ‘호수 남쪽머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열린회의를 두고 중국은 ‘미혼진회의’, 북한은 ‘남호두회의’라고 부른다. 북호두(北湖頭)는 ‘호수의 북쪽머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936년 남호두와 북호두에서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한 중요한 회의가 각각 열렸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조국광복회 결성과 국내 진공작전(보천보 전투) 등이 전개되었다.

5) 코민테른 7차대회는 중공당 동만위의 ‘민생단 투쟁’이 좌경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민생단 투쟁 과정에서 조선인 항일활동가들이 500여명이나 살해되는 엄청난 참극을 빚었는데, 살해된 대다수가 민생단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건은 중공당 동만지역에서 발호한 좌경적이고 급진적인 노선의 후과로서, 일부 간부들이 조중 사이의 민족 감정을 지도권 장악의 기회로 삼고자 하면서 비극이 확대되었다.

6)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창기, 경박호는 동지애로 뭉친 북중혈맹의 상징, 자주민보.net, 2011년 6월 23일(http://www.jajuminbo.net/serial_read.html?uid=7199&section=sc10)을 참고할 수 있다.

7) 통일부 공식블로그 ‘통일미래의 꿈’(http://blog.unikorea.go.kr/879) 참고

8) 2000년말 통계에 의하면 인구는 136,018명이고, 그중 조선족이 57.2%, 한족이 41.18%, 기타 소수민족이 1.53%를 점했다.

9) 이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근∙송문지, <북중경협 강화와 한반도 미래>, 세종연구소, 『국가전략』 제20권 2호(2014 여름호)를 참고 할 수 있다.

10)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4일 두만강변 삼둔자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그 날 새벽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삼둔자를 출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가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양민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범진령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했다.
이에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이 바짝 올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를 편성하고 추격에 나섰다. 야스가와 소좌가 이끄는 추격대는 6월 6일 밤 9시 두만강을 건너 9월 7일 새벽 3시 30분 독립군의 근거지가 있는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에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봉오동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고, 봉오동 상동의 험준한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일본군 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 추격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했다. 그날 아침 8시 30분경 월강 추격대 첨병이 독립군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뒤 독립군이 이미 도주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추격대 본대를 불러들여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 월강 추격대는 봉오동 하동을 마음껏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 대오를 정돈하여 중동과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 날 오후 1시경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이 고지로 둘러싸인 상동 남쪽 300미터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바로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끈질기게 주력부대를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드디어 홍범도 장군은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의 총에서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처음 당황했으나 곧 필사적으로 공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공격에 일본군 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을 끈질기게 버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일본군은 더 이상 전투는 감행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퇴했다. 독립운동사상 통쾌하고 빛나는 최초의 승전이었다. 봉오동 전투에 대한 사상자의 피해 규모는 독립군과 일본군의 주장이 엇갈린다. 당시 중국 <상해시보>는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여 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11) 박도, <우리에게는 자랑스럽고 영광된 역사가 있다: 제87주년 봉오동전투 전승기념식 열려, 『오마이뉴스』, 2007. 6. 8; EBS, 다큐멘터리 <도올이 본 독립운동사 10부작-4부 청산이여 말하라> 참고

12) 자세한 내용은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역사비평사, 2001)을 참고할 수 있다.

13) 자세한 내용은 김혁, <중국 조선족의 애환 담긴 명물 ‘사과배’>, 『민족21』129호(2011년 11월)을 참고할 수 있다.

14) “한국 광복회는 청산리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 현재 화룡시 용성면 청산촌 앞 구릉진 산봉우리에 높이 17.6미터의 화강암 석비에 <청산리대첩 기념비>라고 국한문으로 병시하고, 그 아래 소총과 기관총을 쏘며 일제침략군을 격퇴하는 한국 독립군의 용감한 모습을 담은 가로 4.8미터, 세로 2.5미터의 흰색 화강암 부조물로 장식한 기념비를 세웠다. 한국 광복회가 2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여 연변조선족 자치주 국제 공공관계협회에서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아 1년 2개월의 공역 끝에 건립한 <청산리대첩 기념비>는 뒤에 부착한 동판 기념문에, “연변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선열들의 충혼을 기리고 이 위업을 천추만세에 전하노라”고 기록하여 연변 각 민족의 주권만을 강조하였다. 중국정부의 ‘동북공정’의 여파가 청산리 대첩 기념비에도 작용한 것이다.”(김삼웅의 인물열전 블로그-빨치산대장 홍범도 평전-[40회] 청산리 전쟁의 주역은 홍범도)

15)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훈춘현에 있던 일본영사관이 일본군이 사주한 마적떼에게 습격, 방화당한 사건으로, 이는 일본군의 만주출병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본군이 마적떼에게 돈을 주어 조작한 사건이다.

16) ‘청산리 전투’의 주역을 탈바꿈하는 데는 당시 20세의 나이로 이 전투에 참가한 이범석이 후에 쓴 회고록 <<우둥불>>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우둥불’의 내용은 여러 면에서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게 역사학자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김삼웅, 위의 글; EBS, 다큐멘터리 <도올이 본 독립운동사 10부작-4부 청산이여 말하라> 참고

17) 지급 시로서 인구는 230만 명, 면적은 1만5천 평방킬로미터 정도이다.

18) 양정우(杨靖宇) 장군은 1905년 하남성 확산현에서 출생했고 본명은 마상덕(马尚德)이다. 1927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확산 농민폭동과 류점의 추수봉기를 지휘하면서 확한 농민혁명군 총 지휘, 중국 공산당 예남 특별위원회 서기 및 무순 지부서기 등을 역임했다. 1931년 ‘9.18사변’ 후, 항일전쟁의 필요에 따라 양정우는 중공당조직의 명을 받고 동북의 항일총회 회장, 중국공산당 하얼빈시위 서기겸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 중국 공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 정치위원, 중앙 공농민주정부 집행위원, 남만항일연군총지휘, 동북인민혁명군제1군제1독립사사장 겸 정치위원, 군장겸 정치위원, 동북항일연군 제1군군장 겸 정치위원, 중공남만성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31년부터 2년간의 준비를 거쳐 1933년 반석현에서 정식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제1독립사의 창건을 선포하고 사령관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인민혁명군이 성립된 후 적의 주력을 피하고 약한 고리를 공격하는 유격전술을 채택하면서 반석, 화전, 이통현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주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양정우 장군의 머리에 은전 5만냥을 내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1935년, 일본군은 만주군과 일부 일본헌병으로 ‘토벌군’을 조직하여 미친 듯 포위전을 시작했다. 제1군은 양정우 장군의 인솔하에 먹을 것, 겨울옷과 무기가 부족한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면서 간고한 유격전을 벌여 적들을 하나하나 격파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량의 무기를 노획하고 군사도 2배나 확충했다. 이때 혁명군은 보총에서 일본식 보총으로 바꾸었으며, 그들은 “총이 없고 대포가 없으면 적들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준다!”는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1936년 4월, 양정우장군은 부하들을 인솔하여 집안현의 산지에서 매복전을 벌여 만주군 봉천기병교도부대 3개 연대를 격멸하는 전과를 올리며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19) 정창현, 만주항일무장투쟁 중국사에 포함 움직임, 남북역사학계의 공동대응 절실, <민족21> 2007. 7. 28 (http://blog.daum.net/skxogkswhl/13243989)

20) 정창현, 위의 글

21) 지급 시로서 인구는 240만 명을 약간 상회하고, 면적은 1만 5천 평방킬로미터 정도다.

22) 그 전 10월 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오자 남한 해군함정이 함포 사격을 하고 북한경비정도 이에 대응하여 기관총을 쏘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는 북한의 NLL 무력화 전략으로서 의도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3) 급히 처분해서 제값을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 가치로 따진다면 그 액수는 600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엄청난 재산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4) 면적은 1만3천 평방킬로미터 정도이고, 인구는 560만 명이 넘는 부성시급 도시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