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 2세, 배안 NGO활동가가 9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한에 다녀왔다. 배안 활동가로서는 33년 만에 다시 찾는 평양행이었다. 아울러 원산도 둘러보았다. 평양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리고 북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왔을까? 강산도 세 번 이상 바뀐 33년만의 방북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33년 만에 찾는 북쪽 땅은 어떤 모습으로 날 맞아줄까?

▲ 33년만에 찾은 평양의 모습. [사진 제공-배안]

대학 졸업한지 3년째 겨울 석 달 동안을 머문 그 땅은 이제 내겐 아득히 먼 낯 설은 땅이 되고 말았다.

만경봉92가 북과 일본을 맺어주고 많은 동포들이 그곳을 다닐 적에도 조일 간엔 숱한 문제와 과제들이 가로 놓여져 있긴 했지만 재일동포들은 조국의 북쪽 땅에 가족, 친척들, 친구들을 보러 다녀왔었다.

일본인 납치 사건이 북의 만행이란 사실이 전해진 그 순간부터 씨를 뿌리며 물을 주며 기른 친선과 우호는 옛이야기로 돌아가버렸고 지금도 양 국민 사이의 신뢰도 조일 간의 느슨한 교류도 더더욱 연약해지기만 한다. 일본이 실시한 북에 대한 제재에 의하여 만경봉92 뱃길이 막아졌고 자손들을 북으로 보낸 고령 동포들이 가족들간 서로의 정을 나눌 가냘픈 끈은 끊겨가기만 한다.

일본에서 날마다 알려지는 북에 대한 정보는 북 붕괴설뿐이며 연예인 스캔들처럼 북의 국내 뉴스를 날조하며 떠들썩하게 만든다. 그래서 여기선 남쪽에서와 마찬가지로 북의 진실이 전해지지 않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만 3번보다 더 변한 우리 조국 북쪽 땅은 어떤 모습으로 날 맞아줄까? 그곳 사람들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 진실을 알고 싶다. 가족, 친척들은 어떻게 살며 학창시절 함께 지내던 우리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이런 마음을 안고 나의 북행은 시작되었다.

하네다공항-북경공항-순안공항

11일 동안의 휴가를 겨우 얻어낸 나의 여행은 하네다공항에서 시작된다.

재일 조국평화통일협회 대표단 단원으로서 떠나기로 했다만 조국통일 위업에 내가 얼마만큼 도움을 줬느냐 누가 물어 봤다면 있을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할 만큼 부끄러웠다. 하긴 꼭 평양을 다녀와야 한다는 결심은 올해 들어 더욱 굳세졌고 어느새 가슴속에 굳게 묻어져 버리고 있었다.

하네다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난 다음에도 일본에 두고 온 일덩어리들에 대한 걱정이 ‘후회’란 돌멩이가 되어 가슴속에 눌러 앉긴 했지만 이미 떠나버린 길이었고 비행기는 오직 북경을 향해 내 망설임과 어긋나게 힘차게 날개를 펴고 있었다.

북경공항 트랜짓 수속의 엄격함과 직원들의 불친절 때문에 겁을 먹으며 아슬아슬 탐지기 문을 빠져 세관검사를 마쳐나오면서 일본을 떠나온 후회는 절정에 다다랐다. 우리 대표단 어르신 속엔 처음으로 비행기로 해외여행 다니시는 분들도 몇 명 계셔 익숙지 못한 수속 절차 때문에 트러블이 일어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그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맑지가 못하다는 정도가 아닌 중국의 공기를 더는 쉬고 싶지 않았고 기분이 어지러워질 정도의 요란을 떠는 그 공간에 한시라도 더 머무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빨리 떠나고 싶었다. 내 마음은 더더욱 평양을 향했고 기나긴 그 세월 보지도 못하고 지내온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게 했다.

비행장 맨 끝에 가야만 탈 수 있는 평양행였다만 시트에 앉자마자 온몸에서 땀이 쏟아져 나와 나도 몰래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첫 평양 풍경 ‘올핸 벼가 잘 된 것 같다’

▲ 비행기에서 창밖으로 내려다 본 평양의 야산과 논. [사진 제공-배안]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출발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국경을 지나 목적지가 차츰 다가온다. 상공에서 내다 보이는 경치는 정리가 잘 된 밭이며 누렇게 물들여진 논들이다.

33년 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배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고 원산에서 기차를 타고 하룻밤을 차 중에서 묵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땐 11월 달이라 추수를 끝낸 늦가을이라 하기보다 초겨울의 벌거벗은 경치가 펼쳐졌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벼가을을 앞둔 무르익은 이 땅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올핸 벼가 잘 된 것 같다’고 누군가 속삭인다. 그 말에 왠지 마음이 놓인다.

이렇게 평양으로 들어갔다.

아직 여름향기가 남은 그곳 날씨가 워낙 상쾌하게 느껴진 것은 북경공항의 소란스러움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배려와 봉사를 모르는 그곳 공항 직원들을 떠올리면서 차분하게 그냥 업무에 충실하게 일을 보는 순안공항 직원들이 얼마나 다정스럽고 사랑스러웠던지 모른다.

입국을 위한 모든 수속을 끝내고 한 발자국 밖으로 나가자마자 어떤 남성 한 사람이 뛰어나와 “평통에서 오신 선생님 맞으시죠? 입국심사가 얼마나 까다로웠겠습니까? 거기 지나오기만 하면 이제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라 하였다.

우리말이 따끈하게 내 가슴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중국공항에서 일어난 이런 저런 일들은 한겨울의 차디찬 바람으로 우리 일행 모두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였지만 우리말이란 봄바람이 내 마음을 눈 녹듯이 누그러뜨려 준다.

‘조국과 고국’

▲ 평양순안공항. [사진 제공-배안]

‘조국에 왔구나’ 그런 감정이 우러나온다. 나는 과거 여러 번 남쪽 땅을 밟아보았다. 그러나 이남 땅 치고 조국이란 감정을 단 한 번 느껴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우리 민족의 일원이라 자각하는 사람이다. 나뿐만 아니라 조선적이란 무국적자들이 남쪽으로의 입국허가를 얻어내기까지의 고생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사람마다 국적과 색깔을 따져가면서 고국 땅을 밟기조차도 쉽게 허락하지 않은 남쪽은 고국 이상의 곳이 아니다. 나 역시 이명박 정권 이후론 한 발자국도 남쪽 땅을 내디디지도 못하고 있다.

물론 정다운 친구들, 철쇄로 묶여진 군사독재를 이겨낸 우리 민족들은 영원히 나의 자랑이며 내가 그 불 같은 의사를 품은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은 영광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민중들을 조국이라 부른다면 틀림없이 내 조국은 남북, 해외를 포함한 온 세계라 할 수 있겠다.

나와 마찬가지로 재일동포들의 90% 이상이 남쪽에 고향을 두긴 하지만 조국과 고국이란 말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은 나뿐만이 아니다.

북은 그 어려운 국가건설의 나날에도 우리 재일동포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아니했던 나라이다. 6.25전후 평양이 잿더미로 변하고 물 한 모금 먹기에도 힘들었던 복구건설의 그날에도 공장 하나 못 짓더라도 우리말, 우리글을 배우는 우리 아이들을 도와줘야 한다며 일본에 막대한 돈을 보내준 나라였다. 그 돈을 가지고 우리의 선열들은 학교를 세우고 우리는 민족교육을 이어받으며 지켜왔다.

1997년 이후 연이어 일어난 홍수와 흉작,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 때문에 고난의 행군으로 나서야 할 그 힘겨운 나날에도 재일동포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따뜻한 품이었다. 우리말을 지키며 우리 문화를 익히며 우리 민족의 넋을 잃지 않고 내가 지금도 내가 나답게 조선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이런 도움이 있기도 해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북을 조국이라고 부른다.

33년 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평양

▲ 평양 순안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차창으로 본 평양거리. [사진 제공-배안]

평양 순안비행장은 대공사 중이었다. 군복 웃옷을 벗어 던진 인민군 대원들인가, 청년봉사대들도 있을 것 같다. 전력과 연료, 차량, 기계가 충분하다 할 수 없는 사정은 인해전술로 공사를 다그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안내원을 따라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하는 찻간에서 보이는 평양은 33년 전의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정비된 길들이며 건물들. 그땐 외국에서의 손님들이 탄 자동차, 버스가 지나가기만 하면 인민학교(현재는 소학교) 학생들이 소년단 경례를 하더만 이제는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고 대열을 짓고 행진하면서 등하교를 하던 학생들의 그 모습도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각자 어여쁜 색깔의 옷을 입은 여자학생들이며 여성들의 멋진 옷차림이 내 마음을 흥겹게 해준다.

시내 이곳 저곳에 지어놓은 이전엔 보지도 못했던 건물들이며 새로 펼쳐진 거리가 눈앞에 안겨온다. 새로운 평양의 모습이었다. 그 때문인지, 내 기억이 희미한 탓인지, 과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도 없다. 버스가 우리 대표단 첫 방문지인 만수대언덕에 다다를까 말까 할 지경에야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평양을 한 가슴에 껴안은 듯 내다보이는 이 언덕이 나를 껴안아주었다.

어렴풋이 눈에 비친 그리웠던 평양. 11일간의 여행을 예고해주듯 이때 반갑게도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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