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Daum영화]

젊은 아빠 대수가 말한다. “저는 아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합니다. 전, 그래요.”
그는 지금 아들과의 마지막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읽어 보지 않았지만, 영화의 원작은 소설이다. 그 소설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일곱에 나를 가졌다.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내가 열여덟이 될지, 열아홉이 될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 건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뿐이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나는 무럭무럭 늙는다.
누군가의 한 시간이 내겐 하루와 같고
다른 이의 한 달이 일 년쯤 된다.
이제 나는 아버지보다 늙어버렸다.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 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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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와 미라는 열일곱에 부모가 되었다.
강동원과 송혜교라는 아름다운 배우가 연출하는 열일곱은 싱그럽고 상큼하다. 하지만 현실 속 열일곱은 고등학교 1학년. 영화 속 장가 할아버지의 말처럼 열일곱 그 나이 무렵에 춘향과 몽룡은 평생을 기약하는 사랑에 빠지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우리는 고전을 현실에 대입시켜 보지는 않는다. 대수와 미라가 처했을 곤경을 영화는 상세히 묘사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열일곱 부모가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가히 상상할 만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외로워서 열일곱에 사고를 친 대수는 착했고, 천방지축 나돌던 미라는 용감했다. 그들은 어른들보다 더 어른스럽게 자신들이 벌인 일을 책임지는 길을 택했고, 씩씩하게 부모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대수와 미라의 빛나는 청춘은 끝났다, 아주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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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대수와 미라가 부모 노릇을 하는 길은 험난했을 것이다. 체고를 다니던 태권도 선수 대수는 아이가 성장하는 16년의 시간 동안 온갖 알바를 전전하다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생계를 위해 자질구레한 일당벌이를 하느라 주말에도 쉴 틈이 없다.

아이돌 가수를 꿈꾸던 미라는 아이를 들쳐 업고 장바구니 옆에 낀 아줌마가 되었다. 아픈 아이를 위한 간병인이자 전담 간호사 노릇을 겸하면서 맞벌이 전선에도 뛰어들어 세탁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1인 다역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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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수와 미라가 청춘을 희생하여 지킨 아이 아름이는 선천성 조로증 환자. 열여섯이 된 아이에게는 사춘기 소년이 갖는 열여섯의 설렘과 죽음을 생각하는 여든 노인의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장을 앞지르는 노화 때문에 제대로 발육하지 못해 또래보다 왜소한 신체와 볼썽사나운 노인의 얼굴은 한창 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질 사춘기 소년에게 견디기 어려운 상처가 된다.

인생의 두근거림을 채 알기도 전에 아름이가 깨닫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고 삶의 무상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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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냉대를 감수하며 청춘을 희생하는 결단도 하기 어려운 일이건만, 그 희생의 대가가 선천성 불치병을 지닌 아이라는 사실을 그 부모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흔히 부모의 사랑은 무한하며 부모의 희생은 당연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다.

부모가 되어 본 사람들은 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자식 때문에 포기한 것들을 억울해하는 부모들도 있고, 자식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자신의 삶을 앞세우는 부모들도 있다. 자식이 낳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건만,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자식이 인생의 걸림돌인 양 탓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뿐인가. 부모란 이름이 무슨 권력이나 되는 것처럼 자식 위에 군림하여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모란 이름에 대해 그 자식에게 보험이니 투자니 하며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못나고 부족한 자식은 부끄러워하고, 잘나고 똑똑한 자식은 값나가는 액세서리 두른 듯이 과시하려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 젊은 부모는 아이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똑똑하고 잘난 자식은커녕 단지 건강하기만을 소망했으나 그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아이를 잉태한 자신들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고, 여전히 서로를 굳게 사랑하며, 또한 그 사랑이 안겨 준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불치의 병을 안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는 이 아이가 세상에 내려와 자신들의 자식이 되었음을 온전히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미라는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부정하고 싶어 하거나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잠시나마 아이를 지울 마음을 품었던 사실에 대해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에게 미안해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남들에게 호기심과 놀림의 대상이 되는 아이를 지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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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나 역시 두 아이의 부모로서, 나는 이 젊은 부모 앞에 숙연해진다.

나는 생각한다.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는 없다. 열일곱이 아니라 서른일곱, 아니 마흔일곱이 되어도 부모 노릇하기는 언제나 어렵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부모 노릇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가진 게 많다고 훌륭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신체적으로 사랑을 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라면, 그 사랑의 당연한 귀결이자 결실인 ‘부모’라는 이름은 신의 선물이고 축복이다. 물론 그 사회의 관습이나 환경에 따라 결혼 적령기라 여겨지는 것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사회적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당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매도당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모든 부모는 희생을 치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얻는 데 아무런 대가가 없을 수 없다. 열일곱 빛나는 청춘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나이에 걸맞게 누리고픈 자유와 안락이 있는 법, 하지만 부모가 된 이상 자기만의 삶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 희생은 부모의 것만은 아니다. 한 아이가 제대로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회 복지 제도가 미비한 우리나라에서는 ‘수익자 부담 원칙’이란 이름하에 온 마을의 도움에 인색하지만, 하나의 우주를 길러내는 데에는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는 없다. 열일곱의 사랑이 죄가 될 수는 없다. 열일곱이 결코 부모가 되기에 적절치 않은 나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들이 이제 갓 사춘기를 벗어나 아직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존재이며, 우리 사회의 환경상 경제적으로도 양육의 책임을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된 나이임을 감안한다면, 열일곱에 부모가 되는 것은 분명 경솔한 일이다.

하지만 부모의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거나 심지어는 교육권을 박탈하여 그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고 부모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열일곱의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와 도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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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아름이가 묻는다.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대수가 대답한다.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하마터면 축복받지 못한 출생이 되거나, 또는 아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아름이는 이렇게 그 부모에게 기쁨의 이름으로 얻은 슬픔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두근거리는 열일곱 대신 자신을 태어나게 한 그 부모의 열일곱에 ‘두근두근 그 여름’이란 이름을 붙여 기록하기 시작한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두근거리는 존재이고, 그 인생이 설령 행복한 일로 점철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두근거리는 시간이 아니던가. 세상의 차가운 시선에 맞서 대수와 미라가 그 여름의 두근거림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아름이의 짧은 인생도 없었을 것이다. 아름이의 시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감격에 겨워하는 대수의 굳건한 사랑이 없었다면 아름이의 인생은 그저 미안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 열일곱에 애 낳은 여자야!”라고 외치며 아름이의 선글라스를 벗겨 주는 미라의 당당함이 없었다면 아름이는 출생도 인생도 남의 눈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부모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존재인가. 아름이가 쓴 ‘두근두근 그 여름’은 곧 그 부모가 아름이에게 선물한 ‘두근두근 내 인생’에 대한 긍정과 긍지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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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자식이 죽는다.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자식은 키우는 재미라는데, 이 부모는 아이가 성장하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서둘러 저물어가는 자식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크는 아이를 보는 기쁨 대신 인생의 생로병사가 흘러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이제 자신들이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열일곱을 채 맞지 못한 아이를 자신들의 곁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슬프고도 기괴한 상황인가. 부모가 죽으면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끼며 부모를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죽으면 아예 땅에 묻지도 못한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그 슬픔의 곡진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그 자식을 돌보고 무모하고도 덧없을지도 모를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부모의 하루하루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는 없다.

세월호 참사 앞에 온 국민이 슬픔과 충격에 빠진 것은 단지 희생자의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부모는 안다. 내 자식이 아니라도 부모의 마음은 그런 것이고, 또 그런 것이어야 한다. 어린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비통함은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른다고 엷어지는 것도 무뎌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부모가 되어 보면 비로소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다. 대수는 16년 동안 절연한 아버지를 찾아가고, 그 아버지는 집 나간 자식을 생각하며 손자의 모자를 챙겨 놓았다. 늙은 아버지와 젊은 아버지가 마주앉아 눈물을 삼키는 장면은 마음에 잔상을 남긴다.

또한 세상에 누군가의 자식 아닌 이는 없으므로, 부모의 마음이란 세상 모든 이의 슬픔과 고통에 감응하는 것이다. 나는 부모가 되고 나서 눈물이 많아졌다.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에 대한 애처로움이 내 눈시울을 짓누른다. 대수가 아름이에게 깊은 상처를 준 자에게 끝내 주먹을 날리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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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은 사투리로 연기할 때 더 편안해 보이고, 송혜교도 당차고 속 깊은 엄마로서 손색이 없다. 영화는 감정의 과잉 없이,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극단적 설정도 없이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듣고 나니 먹먹해진다.

영화는 자식들을 위해 고군분투해 본 적 있는 모든 부모들을 위로해 주는 듯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없이 용감해진다는 것이다. 열일곱에 아이를 낳았고, 후회하지 않았다. 생각 없는 이들이 아이에게 상처를 줄 때, 언제나 아이의 편에 서서 아이를 지켰다.

온 사회가 나서서 부모를 편들어 주는 사회라면 더 좋겠지만, 부모의 걱정을 덜어 주는 사회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부모는 용감한 낙천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지켜 주지 못한 자식을 위해 그 죽음의 원인이라도 규명해 내기를 원하는 부모들 옆에서 지겹다고 손가락질하고 폭식으로 조롱하는 사회라면 더욱이 그럴 것이다. 그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보거나 자식이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횡행하는 사회라면 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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