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민전 신향식 선생 제32주기 추모제가 9일 낮 경기도 광주공원묘원에서 열리고 있다. 여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추모객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남민전 신향식 선생 제32주기 추모제가 9일 낮 경기도 광주공원묘원에서 4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제는 부인 이계영 여사의 참배로 시작되어 묵상과 추모 노래, 추모시 낭송 등이 이어졌으며, 추도사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결의 노래, 추모객들의 분향재배로 마무리되었다.

이날 추모제는 남민전 관련자들을 비롯해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양심수후원회, 유가협, 범민련남측본부, 민자통, 4.9평화통일재단, 추모연대와 서울대민주동문회 등 각계 인사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고인의 약력을 소개하는 남민전 관련자 김경중(오른쪽), 김부섭 선생.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故 만성 신향식 선생 약력

- 1934. 12. 1 전남 고흥군에서 한학자이신 아버님 신춘우 님과 어머님 정정옥 님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 1958. 경복고등학교 졸업. 4월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입학.
- 1959. 11. 30 전남 고흥군 풍양면 이계영 님과 결혼.
- 1964. 2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 1965. 5 동아출판사 제작부 취직. 임금투쟁과 노조결성 주도.
- 1968. 8 ≪통일혁명당≫사건으로 구속되어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간첩방조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월 선고.
- 1972. 2. 25 비전향 만기출소.
- 1976. 2. 29 이재문, 김병권 동지들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 중앙위원으로 활약. 1979년 파쇼세력에게 피검되기까지 3년 8개월여 동안 반제반파쇼민족해방투쟁 전개.
- 1980. 12. 23 피검 후 군사독재세력의 참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투쟁의 정당성과 순결성을 고수. 81년 4월 14일 사형이 언도된 이후에도 법정투쟁을 계속 전개, 81년 12월 23일 대법원 상고심 공판이 기각됨으로써 법정최고형인 사형 확정.
- 1982. 10. 8 정오 12시 서울구치소 교수대에서 형 집행.
*** 유족으로 부인 이계영 님과 장남 원호, 따님 선미, 차남 유호가 있음.

▲ 고인의 광주공원묘지.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참배를 끝낸 부인 이계영 여사(왼쪽).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추도사를 하는 김규철 범민련남측본부 의장권한대행(왼쪽)과 고인과 동갑내기 남민전 동지인 황금수 선생.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고인을 기리는 장남수 유가협 회장(왼쪽)과 서울대민주동문회 김명원 공동회장.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남민련 관련자인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1976년부터 79년 사건 발표까지 당시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남민전 사건이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이라는 비교적 긴 이름의 ‘남민전 사건’이란 1976년 2월 비밀단체를 조직해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79년 84명이 검거된 유신 말기 최대 공안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이라고 발표했고 법원은 관련자에게 사형, 무기, 징역 15년 등 대부분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2008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남민전 사건 관련 신청자 중 고(故)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29명에 대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위원회는 당시 남민전 사건의 지도급 인사인 이재문, 신향식 씨에 대해서는 심의를 보류했다.

▲ 참배하는 유가협 회원들. 오른쪽 두 번째는 1988년 실종된 안치웅 열사(서울대 국제경제)의 모친.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2차 송환 신청 장기수 박희성, 김영식 선생과 류종인 선생.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김명운 추모연대 의장 등 회원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양심수후원회 회원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1969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내란예비음모’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한 고 권재혁 선생의 딸 권재희(가운데) 씨와 같은 사건으로 10년을 살고 출소한 이형락 선생의 딸 이단아(왼쪽) 씨. 올해 5월 16일 대법원 재심 재판부는 불법감금과 고문으로 조작된 이 사건에 대해 45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32년 전 옛 동지에 절을 올리는 남민전 관련자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올해 처음으로 추모제에 참석한 서울대민주동문회 회장단.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추모제 후 기념사진.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추모시 <전사 2>
- 남민전 동지 고 김남주 시인이 신향식 선생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쓴 시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수십만 명이 다시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압제와 착취가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어떤 사람은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 죽어갔다
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은 승리의 막바지 단계에서 죽어갔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
쥐도 모르게 새도 모르게 죽어갔다
감옥의 문턱에서
잡을 손도 없이 부를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피의 땀과 눈물의 양분 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투쟁의 나무를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 낸 것은
가신 님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투쟁의 길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 죽음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쑥스럽게 부끄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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