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아태평화재단 연구위원, 정치학)


1. 방북의 역사 : 언론의 소란스러움

그동안 방북사건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란스런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호 적대적 대결이 일상화되어 있는 분단상황에서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언론과 세인에게 충분한 관심거리가 되고도 남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분단의 역사에 존재했던 몇몇 방북사건만 돌이켜 봐도 명확해진다.

해방 후 좌우대결의 상황에서 휴전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조국을 물려줄 수는 없다며 평양길에 올랐던 김구 선생의 방북은 당시의 뉴스거리를 넘어 지금까지도 우리 현대사에 아쉬운 페이지로 남아 있다. 끝내 분단을 막지 못하고 당신마저 남쪽의 정치상황에 의해 교살되고 말았던 김구 선생의 방북 이후는 더더욱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남북 정부의 수립으로 분단이 공식화되고 이후 긴긴 세월 동안 극단적 대결상황이 지속되면서 남북간의 인적 왕래는 이른바 `공작원들`의 상호 불법적 파견과 당국 사이의 간헐적인 `不姙 대화용` 교류밖에 없었던 듯하다. 이때에도 방북사건이 뉴스의 관심을 끌기는 마찬가지였다. 1972년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발표된 7.4 공동성명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이후락 정보부장이 극비리에 북을 방문해 김일성 수상과 회담을 했던 것은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5·6공 시절 북한을 방문했던 이른바 대북밀사들의 행적 역시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후 언론들의 집중표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당국의 비밀스런 방북 말고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민간차원의 `불법적인`(?) 방북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당시 냉전의 종식이라는 외적 상황과 민주화라는 남측 내부의 정치지형 변화를 계기로 한반도의 통일열기가 후끈 달아 오른 상황에서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방북투쟁`은 국내 언론의 소란함을 넘어 반통일세력에 의해 매카시즘의 계기로 활용되기도 했다. 서경원 의원과 황석영씨, 문규현 신부의 방북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고 진행된 민간차원의 방북사건에 대해 일부 언론은 방북의 성과와 통일에의 기여는 무시한 채 불법성과 친북성만을 전면에 부각시켜 국내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치밀함마저 보였다. 방북사건의 호들갑을 이용해 현대자동차 노조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야당과 재야인사의 대북연계 의혹을 퍼트려 선거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당시 방북사건은 군부독재와 일부 냉전언론들에 의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기획된 뉴스거리`로 포장되어 버렸던 것이다. 방북사건에 대한 언론의 소란함이 결코 통일에 기여하거나 민족화해를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남북대결을 조장하고 색깔론과 국기론으로 남쪽 내부의 통일운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되는 것은 이때부터 하나의 공식이 되었다.  

이후 남쪽에서는 선거를 앞둔 시기마다 요란한 방북사건과 함께 친북혁명 조직사건이 보도되었고 언론은 이에 뒤질세라 법석을 떨곤 했다. 여전히 남쪽에서 방북사건은 평화와 통일의 디딤돌로 평가되지 못하고 냉전수구 언론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본말이 왜곡되기를 거듭했다.

2. 정상회담 이후

그러나 분단 반세기 동안 우리 기억에 남는 가장 극적인 방북사건은 작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일 것이다. 분단 사상 처음으로 양측의 최고지도자가 공식적으로 직접 만나 포옹하고 합의를 도출해 낸 것은 분단의 멍에를 이제라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은 극적 감격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직항로를 통해 55분이면 갈 거리를 55년이나 걸려야만 했던 양 정상의 만남 이후로 남북간 인적 왕래는 조금 더 자유롭고 용이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방북사건은 언론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고 이들의 관심과 소란스러움은 북을 방문한 인사들이 혹여나 친북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는가를 따지려는 체제색맹적인 감시의 목적이었다.

정상회담 성사로 새롭게 개막된 남북화해시대에는 당연히 과거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보다 자주 북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남북경협을 위해 입북하는 기업인들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위해 북을 방문하는 시민단체 인사들, 그리고 수차례의 당국간 회담과 실무회담 및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북을 찾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우리 언론이 별다른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또한 정상회담 직후 추진되었던 백두산 관광단의 방북과 언론사 사장단 방북 및 노동당 참관 방북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 언론은 큰 소란 없이 그냥 지나갔다. 아마도 냉전언론조차도 당시 조성된 민족화해의 대세를 거스르고 과거의 정치적 목적하의 호들갑을 떨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3. 8.15 방북과 언론의 `기획`

그런데 급기야 이번 `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한 대규모 민간단체들의 방북사건에서 우리 냉전언론의 소란스러움은 다시 재현되었다. 이는 이번 방북이 지난 해와 달리 북미관계 교착과 남북관계 소강이라는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개막식 장소와 관련한 남북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었으며 특히 300명이 넘는 다양한 견해와 입장을 가진 대규모 민간단체 대표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언론에게는 절호의 반격기회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6박 7일간의 방북사건은 과거와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 언론의 집중표적이 되었고 그 소란스러움은 사실상 민족화해를 막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또 한번의 기획으로 이어졌다. 분단상황에서 방북사건의 보도가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빌미로 언론이 호들갑을 떨려면 그것은 응당 통일에 기여하고 민족화해를 고양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8.15 방북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는 긍정적인 성과와 의미는 제쳐둔 채 몇 가지 돌출행동만을 집중적으로 과대포장하는 또 한번의 `의도된 호들갑`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번 방북은 분명 남북간의 민간교류 확대라는 차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른 분단 이후 최대 규모의 민간 대표단이 다양한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방북의 의미를 공유하고 민간교류의 지속과 확대를 위해 노력했으며 실제 상당한 성과를 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종교인, 학자, 경제인,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예술인 등 영역과 계층을 망라한 다양한 민간부문이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북측과 교류의 폭을 넓히고 일정한 합의를 도출한 것은 민간대화의 역사에서 분명한 성과를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6.15 공동선언에 명시된 다방면적인 교류협력이 당국간 대화뿐 아니라 시민사회 영역이 직접 나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의 방북사건 보도에서 이 부분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물론 방북단 취재를 위해 평양에 갔던 공동기자단은 나름대로 균형된 입장에서 성실하게 활동했지만 이들의 기사를 받았던 남쪽 언론사는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기사를 취사선택했고 특히 사주가 구속되었던 일부 언론사는 직접 기자를 파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맛에 따라 방북단 기사를 요리했다. 8.15 행사의 시점이 공교롭게도 특정 언론사의 사주가 구속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현 정부와의 대치선을 예각화할 수밖에 없었던 몇몇 신문사는 당연히(?) 방북단의 돌출행동을 마음껏 확대보도하고 이를 여론화시켰 것이다.

분단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간방북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성과는 도외시한 채 일부 인사의 개폐막식 참석에만 초점을 맞추고 특정인사의 만경대 감상록 문구만을 방북단 행동의 전부인 양 도배해버렸던 이들 언론의 호들갑은 급기야 열렬한 환대 속에 평양을 떠났던 방북단이 김포공항에서는 삼엄한 경비와 감시 속에 입국해야만 하는 전도된 상황을 만들어버렸고 환영과 비난의 남남갈등마저 증폭시켰다. 일부의 돌출행동에 대한 사법처리가 기정사실화되자 일부 언론의 의도된 호들갑에 놀아난 냉전수구 세력은 임동원 장관의 해임까지 걸고 넘어지면서 결국은 여여공조의 정국틀마저 깨트리는 가공할 정치적 결과를 산출해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 방북사건을 의도된 소란으로 몰고 간 언론으로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셈이다.

4. 요란한 기사거리가 되지 않는 방북의 날이 오길

필자를 포함한 방북단 모두는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방북기간 내내 북측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직접 목도해야만 했다.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고려호텔에서도 북쪽의 경제난은 실감할 수 있었고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비춰진 평양시민의 옷차림과 도시풍경에서도 경제상황의 심각성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칠흑같은 어둠이 이어지고 시내 한복판의 대형 아파트에서도 조명은 침침한 백열등이 전부였다. 70년대에서 정지해버린 듯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과 묘향산 가는 길에 보인 열손가락으로 헤아리고도 남는 자동차를 보면서는 그 누구도 북쪽을 도와야 한다는 데 이견을 가질 수 없었다.

최악의 경제상황을 직접 목도하면서, 그 안에 순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들의 곤경을 기회로 삼아 체제를 붕괴시켜야겠다는 생각은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마저도 쓸데없는 대북퍼주기로 비난하는 이들이 있는 한 지금 시기 시급히 북한을 방문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냉전적 대결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임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하는 방북이었다.

수백명이 방북한다는 사실만으로 언론이 요란법석을 떨고 그 소란함마저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막아보려는 의도된 기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지금의 남북관계는 여전히 힘겨운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더 이상 방북이라는 사건이 요란한 기사거리가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남북화해의 길은 열릴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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