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스톡홀름에서 국장급 회담을 가진 북한과 일본은 납치 피해자 조사와 대북제재 해제를 담은 합의문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은 물론 미국에게도 발표 직전에서야 합의문을 통보해줬고, 중국은 아예 통보도 못 받았다고 하니 아마도 북한과 일본이 주변국의 눈길을 피해 전격 합의한 모양입니다. 보통 이럴 경우 회담 대표단은 잠정 타결된 합의문을 직접 지참하고 귀국, 대면보고한 뒤 최고 정책결정자의 결재를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야만 보안이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북한과 일본이 가까운 중국이나 아시아 지역이 아닌 스웨덴 스톡홀름을 회담장소로 정한 것부터가 의도적일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막상 북.일 스톡홀름 합의문이 발표되자 한국과 미국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형국입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까지 한.미.일 3국의 찰떡공조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가 된통 당한 꼴입니다. “지켜보겠다”, “투명성이 매우 중요하다” 정도의 평가가 나온 것만 보더라도 불편한 심사가 충분히 감지됩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한국이나 미국이 아닙니다. 바로 깎아내리기(평가절하)와 겁주기(협박)라는 전가의 보도를 뽑아들었습니다.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2일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의미가 있지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동북아에서 가장 고립돼 있는 국가끼리 이런 합의를 한 것”이라며 “친구가 많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밤잠 안자면서 걱정할 필요 있겠느냐”고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북.일 합의문에서 제시한 일본의 독자적 경제제재 해제가 당장 북측에 큰 경제적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셈법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북일 교류의 상징인 ‘만경봉호’ 입항이 빠져있는 점을 지적하는가 하면 “원조처럼 (북한에) 덜렁 가는 건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해방전후부터 최근까지의 모든 일본인을 포괄해 범위가 너무 넓어 실제 성과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내비쳤습니다.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파 깎아내리기로 반격하는 것쯤이야 애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겁주기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고위당국자는 놀랍게도 “(북일 협상이) 진척돼서 일본이 판단할 때 인도지원 국면이 되면 대북 압박에 일본의 원조가 상당히 변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라며 “일본이 북한에 의미있는 식량원조를 할 순간이 되면 미국이 가만있을 리 없다”고 말했습니다. 북.일 합의문에 명시된 대로 일본이 “적절한 시기에 북한에 대한 인도지원을 실시”할 경우 한.미.일 대북 제재공조가 허물어지기 때문에 “미국이 가만있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발언은 일본에게 일종의 금지선(레드라인)을 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북.일 간에 납치자 문제를 협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인도적 지원부터는 불가하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같은 겁주기가 가벼이 넘기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史實)’들에 근거해 있다는 점입니다.

1990년 9월 집권 자민당의 막후 실세였던 가네마루 신(金丸 信) 당시 자민당 부총재가 자민당과 사회당 방문단을 이끌고 방북해 북 노동당과 3당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국교정상화 교섭을 8차례 진행했지만 결국 북핵문제와 이은혜 납치문제 등에 걸려 1992년 11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1992년 8월 가네마루 신 부총재가 택배회사 사가와규빈으로부터 5억엔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이른바 ‘사가와규빈 스캔들’이 일본 정계를 강타했습니다. 절묘한 시점이라고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어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당시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평양선언을 발표,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려 했지만 북측이 일시 귀국시킨 납치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은데다 켈리 미 국부부 차관보가 2002년 10월 방북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문제삼으면서 2차 북핵사태가 터져 역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켈리의 방북 역시 시점 치고는 절묘한 시점이었습니다.

아베 총리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이같은 역사적 과정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겁주기가 단순한 언술이 아니고, 한.미가 일본에 제시한 금지선의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일 합의는 발표됐고, 이행을 위한 양국간 협의는 이어질 것입니다. “동북아에서 가장 고립돼 있는 국가끼리” 과연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 지 궁금합니다.

벌써부터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첫 정상회담 상대가 아베 총리가 될지, 푸틴 대통령이 될지, 시진핑 주석이 될지 설익은 설왕설래도 있습니다. 물론 전격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먼저 이뤄질 수만 있다면야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습니다. 북.일 합의를 깎아내리거나 금지선 긋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긍정적 측면을 활용해 6자회담 재개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하고 있는 신뢰외교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에 부합하는 것 아닐까요?

(수정,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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