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 마을 주민 추모비’ 앞에서 이번 추모연대 광주 순례 행사에는 서울 대구 광주 지역의 회원 30여명이 참여하였다. [사진제공-이창훈 통신원]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한 다음 날 18일 나는 팽목항을 찾았다. 광주에서 내비게이션으로 찍어 보니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고 했지만, 실제는 조금 더 걸렸다. 어제의 피곤함이 겹쳐서인지 몇 차례 휴식시간을 갖고서야 팽목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팽목항에는 언론에서 본 것보다 한산했다. 사고 초기와 달리 방문객이 뜸해진다고들은 것도 같다. 팽목항은 진도 섬 남쪽 끝에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서고 나서도 한 삼십 여분 더 가야 한다. 팽목항으로 가는 도로 곳곳에는 노란 리본이 묶여 있었다. 심지어는 중앙분리대에도 묶여 있는 것도 있다.

진도읍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진도체육관에 마련된 분향소다. 우리는 우선 팽목항부터 찾아가 보고 분향소를 찾기로 했다. 팽목항 입구는 두 군데였다.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가면 이번 사고로 유명(?)해진 진도VTS가 나오고 유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항구 쪽 천막촌으로 걸어갈 수 있다. 우측 길은 바로 주차장이 있고, 그곳에 차를 세우고 팽목항으로 걸어가야 한다.

▲ 팽목항 방파제 ‘등대 가는 길’ [사진제공-이창훈 통신원]

항구로 가는 길목엔 전국에서 모여든 구호물자를 보관하는 천막들과 자원봉사자들과 실종자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텐트촌도 나온다. 하지만 그 텐트촌을 방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종교단체와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종교인들이 기도처로 세워 둔 천막들로 인해 사고 난 바다 쪽을 직접 보기가 어려웠다. 등대가 설치된 방파제 길 위에도 텐트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또 방파제 안전대에는 무사귀환을 바라는 글귀들이 적혀 있는 노란 리본들이 빼곡히 묶여 있다. 우리는 등대까지 걸어갔다.

서로 말수들이 없다. 조용히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사고 난 해역이 어딘지를 몰라 주변에 있던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배를 타고도 한 시간 이상 나가야 사고해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조용히 안내원이 가르쳐 준 사고해역 쪽 바다를 보면서 서 있었다. 그곳에 수십 명의 사람이 같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도 떠드는 사람이 없다. 방파제 입구 쪽에서 먼 바다를 보며 무사귀환을 바라는 스님의 목탁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 한 구의 시신을 더 찾아내어 이제 실종자가 18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 팽목항에서 바라 본 남해 사고해역. [사진제공-이창훈 통신원]

어제 17일 저녁에 광주 시내에서 벌인 추모행사는 여느 해와는 달랐다. 금남로에는 수천여 명의 인파가 몰렸지만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무대 위에는 세월호 사망자의 영정을 대신한 꽃 그림 영정 수백 기가 놓여 있었다. 단원고 또래의 고등학생들이 올라 '단원고 이보미 학생'이 졸업식에서 불렀다는 '거위의 꿈'을 부르기도 했다. 행사 내내 ‘5.18영령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자리’로 진행되었다.

5.18 광주 학살극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이나, 부정선거로 정권을 잡은 채 무능함만 내보이는 박근혜 정권이나 모두 국민의 목숨은 안중도 없었다.

▲ 망월동에서 만나 대학생 순례팀 단체 티 뒷장에 써진 글귀. [사진제공-이창훈 통신원]

17일 오전에 방문한 망월동 묘역의 분위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묘역에 도착하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들 무리가 내 앞을 지나치는데 모두 검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등에 흰 글귀가 보이기에 자세히 보았더니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 5.18과 세월호'라고 쓰여 있었다.

마침 앞서 유가협 회원들이 와 계셨다. 칠팔십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매년 빼놓지 않고 5월이면 광주를 찾고 계시다. 묘역에서는 봉사단체들이 나와 주먹밥을 만들어 참배객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또 주먹밥을 받아든 참배객들에게는 노란 종이로 접은 배와 리본을 나눠주면서 묘역 주변에 걸려 있는 줄에 매달아 놓으라고 한다. 나도 글귀 하나를 적어 매달아 놓았다.

"잊지 않겠습니다. 5.18영령들이여 세월호의 희생자들이여"

▲ 망월동 묘역 ‘주먹밥 나누기’ 사진제공-이창훈 통신원]

망월동 묘역 참배를 마치고 나니, 오후 2시가 넘은 시각이다. 바로 광주 시내로 이동하였다. 유적지 참배를 하기 위해서다. 먼저 들른 곳은 조선대 이철규 열사 추모비다. 안내를 맡은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 회원인 황차은 씨도 세월호 이야기를 한다. "열사투쟁이 바로 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거죠. 열사를 보내고 또 열사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가 잘 싸우지 못했던 것이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철규 열사의 정신을 아는 사람으로서 단원고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현재의 조선대도 마찬가지다. 이철규 열사는 1989년 조대의 가짜 설립자 박철웅 총장을 몰아내기 위한 학원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대는 일제강점기 시절 전라도의 일반 백성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설립한 '민립대학'이었다. 헌데 어느 때부터인가 당시 민립대 추진위원장이었던 박철웅이가 설립자 행세를 하더니 대학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만들어 내던 교지 '민주조선' 편집장이었던 열사를 사상범으로 몰아 정보기관의 수배를 받게 하고 결국 의문사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조선대의 투쟁은 날로 커져 박철웅 일가를 몰아내고 초기의 민립대학의 위상을 다시 찾는 듯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보수정권들이 들어서면서 박철웅 집안에 힘을 실어 주더니 어느새 재단 이사까지 차지하고 나선 것이다. 지금 조선대는 제2의 이철규 투쟁을 하고 있다. 민립대학의 위상을 제대로 찾는 날까지...

다음으로 찾은 유적지는 '배고픈 다리'가 있는 동구의 홍림마을을 찾았다. 배고픈 다리 이름이 재밌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이 다리를 만들었는데 우리 민족의 전통양식을 따르지 않고 다리 가운데를 오목하게 만들어 다리 이름이 '배고픈 다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5.18유적지로서의 의미는 한스럽기만 하다. 이곳은 항쟁 당시 시민군이 돌과 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원들과 대치를 했던 곳이다. 5.18동지회 윤다현 동구지회장은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이곳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물러간 뒤 계엄군의 재진입을 막기 위해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던 곳입니다... 그때 안타까웠던 것은 공수부대원이 점령했던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밥까지 해서 받쳤는데 나중에는 공수부대원들이 그들마저도 잡아다가 고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을에 내려온 공수부대원을 잡아서 시민군과 교환하는 일도 있었죠..." 생생한 이야기가 듣다 보니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듣고 있다. "근처에 주남마을이라고 있는데 그곳은 화순-광주 간 도로가 있는 곳이거든요. 그때 그곳을 지나던 버스에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사격을 한 거예요. 타고 있던 사람 중 단 1명만 살아남았죠."

▲ 주남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장승. [사진제공-이창훈 통신원]

▲ '주남창조마을' [사진제공-이창훈 통신원]

그런 슬픔을 간직한 주남마을이 요즘은 달라졌다. 2012년 광주시의 '행복한 창조마을 만들기'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와 인권이 숨 쉬는 주남마을'로 변모한 것이다. 주남마을에 얽힌 5.18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이야기가 있는 마을'로 변신한 것이다. 주남마을에는 마을벽화를 비롯하여 평화기원 솟대, 공수부대가 총질한 버스이야기를 담은 버스 모양의 정류장, 그리고 당시 희생된 두 명의 마을 주민 위령비, 인권 테마 공간 등 그리고 마을회관은 '마을 역사관'으로 개조하였다. 주남마을의 변화는 마을의 변화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의 모델이 되었다. 5.18민중항쟁의 정신이 새롭게 계승하고 있다.

팽목항을 둘러보고 서울로 오는 길에 무수한 생각이 든다. 진도의 팽목항이든 안산의 단원고든 지금은 감히 뭐라 이야기할 수 없는 슬픔의 장소이다. 고통의 장소이다. 세월호는 세월을 따라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히거나 박제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아픔을 같이 느꼈던 우리는 그냥 그렇게 둬서는 안 될 이다.

주남마을 변화의 일등공신인 김재림 통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처음 이 일을 하자고 할 때는 무서웠습니다. 저도 광주항쟁 당시 여고생이었거든요. 그날의 악몽을 어떻게 표현할지 무척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술인들과 많은 마을 만들기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도와주시다 보니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잊지 않으면 된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만 팽목항과 단원고를 기억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만 슬픈 팽목항이 ‘희망의 항구’로 다시 제 모습을 찾을 것이며, 단원고의 아픈 기억이 ‘안전한 대한민국’ 시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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