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 6.15산악회 회원


▲ 6.15산악회 4월 산행은 북한산 우이동 소귀천 계곡을 따라 대동문까지 올랐다가 진달래 능성으로 하산해 4.19기념탑에 도착하는 코스였다. [사진-이창훈]

아침 햇볕이 따갑다. 아직 여름이 시작도 안 됐는데 이 정도면, 진짜 여름이 오면 햇살이 얼마나 뜨거워질지 걱정이 앞선다. 나도 나지만 오늘 같은 등산길을 오르게 된 80세 고령의 등산반 대원들은 어떨지 더 걱정된다. 게다가 진도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온 국민이 침울한 이때에... 마음이 무거운 산행이 시작된다.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마음이 무거운 산행

아침에도 뉴스에서 생존자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다들 반갑다고 인사말을 건네지만 얼굴은 그리 밝지 않다. 오늘 등산에 참여할 회원들이 다들 모였나 보다. 총무를 대신하여 이정태 회원이 회비를 걷는다고 부산하다. 회비는 3천원이란다. 십 년 전부터 그랬는데 인상이 된 적이 없다고 한다. 저렴한 맛에 선뜻 지갑을 열어 회비를 낸다. 참고로 뒤풀이 비용은 별도다.

아침 9시를 전후로 6.15산악회(회장 권오헌) 등반대원들이 모인 장소는 북한산 우이동 유원지 입구에 있는 다리께다. 등산코스는 소귀천 계곡을 따라 대동문까지 가는 5km 남짓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산행이다. 소귀천은 도선사 아래에서 시작된 계곡물과 소귀천 계곡물이 합쳐졌다가 우이천으로 들어서는 물줄기다. (헌데 소귀천이나 우이천이나 같은 뜻인데... 하나는 한글로 하나는 한자어로 표기해 놓은 것이네... 무심한 공무 탓인가?)

▲ 6.15산악회의 등산대장들과 건장한 남성들. [사진-이창훈]

소귀천 계곡이라 불리는 곳은 산세가 깊어 녹음이 짙은 여름이면 하늘을 쉽게 볼 수 없는 곳이다. 좌측은 4.19묘지를 감싸고 있는 평균 300m의 진달래 능선이 뻗어있고, 우측으로는 삼각산(북한산) 주능선인 대동문에서 인수봉까지 뻗어있는 평균 600m의 높다란 산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산행은 가을 산행이 최고다. 높은 주변의 산자락들 때문에 빛의 방향과 상관없이 온 종일 단풍을 즐길 수 있다. 단풍경관이 단풍으로 유명한 산들에 제법 견줄만하다. 그리고 깊은 계곡답게 중간 중간에 약수터가 있어 목마른 등산객들을 반기고 있다.

꿩 한 마리가 산행길 입구에서 우리를 반긴다. 꿩이라는 소리에 여러 명 달려와 지키고 쳐다보며 이리저리 말들이 많은데도... 뭔 생각을 하는지 움직임도 없이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고거 참 신기한 놈일세!’

대동문에 오르다

▲ 평양성 대동문은 아니지만 마치 평양에 온 것 같은 포즈로 북한산 대동문 입구에서. [사진-이창훈]

북한산성에는 모두 14개의 성문이 있다. 원효능선 상에 시구문, 북문 등 2개의 성문이 있고 주능선 상에는 위문, 용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등 6개의 성문이 있으며 의상능선 상에는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그리고 성안 쪽으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중성문과 수문이 있다.

이 성문들 중 동쪽에서 가장 큰 문이 대동문이다. 또 대동문 안쪽에는 너른 공간이 있어 등산객이 수시로 드나들며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대동문을 오른다고 하니 앞서가던 통일광장 어르신 한 분이 북의 국보 1호인 평양 대동문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신다. “아 그곳엘 언제 다시 가보나?”

두 시간여 끝에 대동문에 오르자 점심시간이다. 대동문에서의 점심은 이젠 좀 지겹다. 많이 방문한 탓도 있겠지만, 이곳에는 항상 많은 등산객이 모여들고, 점심과 산행의 중간 기착지 혹은 종착지점으로 정해놓아 많은 사람이 오고 간다. 항상 북적인다. 누군가 주능선을 따라 5, 6분만 더 오르면 좋은 자리가 있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미 배낭을 풀고 자리를 깐 등산객들이 그러지 않아도 지쳤는데 그리로 가자는 사람 하나 없다. 거기도 매한가지라는 생각에 그냥 자리를 잡았다.

조촐하지만 풍성한 식탁

▲ 조촐하지만 풍성한 점심식사. [사진-이창훈]

자리 탓을 한참하고 났더니 더 배고프다. 돗자리 세 개를 이어붙이자 이십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큰 자리가 만들어진다. 가방을 열고 서로 싸온 음식을 내어 놓는다. 나는 평상시대로 막걸리 2통과 사발면 하나 그리고 김치 한 통과 사과 한 개를 내놓았다.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음식을 내놓는다. 다양한 속들로 채운 김밥이 나오고, 강낭콩이 곳곳에 박힌 도시락도 나오고, 특별하게 눌린 돼지머리 고기와 홍어무침이 별미로 나왔다. 조촐하지만 풍성한 식탁이다.

한 이십여 분 식사를 진행했을 때 벌써 자리들을 치운다. 눈치 없는 신입회원인 나는 여적 막걸리 잔을 돌리며 '천안함 사태와 이번 진도 세월호 침몰사태'에 대한 장구한 이야기를 마구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나만 혼자 막걸리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짧은 식사시간이라니...

그러자 누군가 이야기한다. 오늘은 4.19묘역 참배가 있기 때문에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 이번 산상강연은 묘소참배 후에 4.19묘역에서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제야 눈치를 챈 신입회원은 서두른다. 에고.. 대동문에서의 즐거운 만찬을 기대했던 신입회원은 혼비백산 서둘러 짐을 챙겨 선임자들을 따라 나선다.

하산길 삽화와 도원결의

하산길은 빠르다. 내리막길이기도 하거니와 4.19묘역 참배행사를 진행해야 하기에 서두른다. 서두르면 사고가 나는 법. 하지만 우리 대원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한 등산객 같지 않은 사람(신발은 운동화였고, 복장은 산 아래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분기탱천하여 대동문을 오른 듯해 보이는)이 그만 중심을 못 잡고 구른 것이다.

도화꽃 아래에서 도원결의하듯  얼마전 9순 잔치를 치른 최고령 등산대원 류기진 선생님(우측)과 필자. [사진-이창훈]
그러면서 6.15합창단 단원으로 오늘 산행에 참여하신 한 여성분을 덮친(?) 것이다. 다행히도 운동으로 단련된 이정태 회원이 중간을 막아섰다. 그렇지 않았으면 자갈길 아래쪽까지 구를 판이었다. 지나던 타인의 등산객들도 모두 쳐다보며 119를 불러야 한다고 한마디씩 보탠다.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조심조심하던 나도 서둘러 사고장로 간다.

누군가 가방에서 맨소래담과 연고를 꺼낸다. 발목부위와 팔꿈치 부위에 연고를 바른다. 여성회원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데 그 등산객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은 좀, 아니 아주 놀랐나 보다. 얼굴색도 말이 아니다. 상태를 물어보니 이리저리 답은 잘한다. 진정이 되면 나아 질 것 같아 119는 부르지 않기로 했다. 하마터면 큰 사고가 될 뻔했다.

하산길은 대동문에서 진달래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수유리로 빠지는 길이다. 한 번의 큰 홍역을 치른 후에 산 아래로 내려오니 주거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적한 공간이 나오자 모두 쉬었다 가자고 한다. 그곳에는 반갑게도 붉은 도화 꽃이 만발했었다. 꽃잎은 작아도 단단한 것이 왜 꽃보다 훨씬 예쁘다.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한 컷 찍기로 한다.

한 시간여 시간 끝에 하산을 완료하였다. 4.19묘소에 들어서니 사월혁명회 노중선 선생이 우리를 반긴다. 오늘 산상강연의 주인공이시다.

4.19기념탑에서 참배와 함께 산상강연

▲ 4.19묘역 참배 후 기념탑 앞에서. [사진-이창훈]

간단한 참배행사를 마친 후 산상강연을 위해 기념탑 뒤쪽 묘역 자리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았다. 따가운 햇볕이 나뭇잎 그늘 사이로 간간이 비춘다. 양심수 후원회 모성용 부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오늘 산상강연은 이곳 4.19묘소에서 진행합니다. 54년 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희생당하신 분들이 곁에 계시니 더욱 숙연해집니다. 첫 순서는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의장님이 시국상황 정리를 해주시겠습니다." 권오헌 선생의 이야기가 끝나자 산상강연을 위해 노중선 선생이 앞에 나선다. ‘지난한 4.19혁명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노중선 선생의 산상강연은 십여 분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 이야기였다. 54년 동안 우리는 미완의 혁명을 제대로 된 혁명으로 만들어내자고 이야기해왔다. 나도 20여 년 전 사월 정신을 처음 접하고 분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4월 묘역 주변은 최루탄으로 가득했다. 어린 나는 선배들의 손에 끌려 눈물 속에서 4월을 지냈다. 가슴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이제 정부가 공식인정하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식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식순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4월 혁명의 완성이 아니다. 4월의 영령은 아직도 통곡한다. 4월의 긴 이야기는 ‘미완의 굴레’에서 벗어날 그 날을 기다리며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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