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와 제주는 분명 닮았다.

두 곳 모두 따뜻한 날씨, 에머랄드 빛과 짙푸른 색 바다를 모두 가진 동북아시아의 아름다운 섬이다. 닮은 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해변은 제주와 닮았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일본 본토 방어 위해 요새화된 제주와 오키나와

오키나와와 제주는 모두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요새화된 역사를 갖고 있다.

1945년 패색이 짙어가던 일제는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경로를 7가지로 설정하고 결1호, 결2호….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 결7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결7호작전이 바로 제주였다. 1945년 3월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을 준비하고 있는 때 일제는 결7호작전을 확정, 시달했다.

당시 제주도민은 22만명, 7만5천여명의 일본군이 배치됐다. 제주 주민들에 대한 수탈과 착취로 해안과 산간을 가릴 것 없이 수백개의 진지, 비행장, 격납고 등이 만들어졌다. 제주 섬 전체가 본토 방어를 위한 총폭탄이 되는 격이었다.

1945년 7월 일제는 오키나와에서 25만명에서 30만명이 희생되는 참극으로 전투에서 패하자 제주의 병력을 서남부에 집중했다. 일본 본토를 위해 ‘버린 돌’이 됐던 오키나와 운명이 제주를 덮치려 할 때, 일제의 항복 선언이 나왔다.

전쟁이 조금만 늦게 끝났더라도 오키나와 대살육이 제주에서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일본의 본토 방어를 위한 ‘버린 돌’이 됐던 오키나와와 결7호의 대상이었던 제주의 운명. 현재도 이 두 곳은 모두 미국과 일본의 본토 방어를 위한 군사기지가 들어선 땅이 됐다. 같은 처지에 놓였던 역사는 이렇듯 현재도 닮은 꼴을 만들고 있다.

‘찌비찌리 가마’와 제주의 동굴진지

사키마 미술관에서 본 『오키나와전쟁도』가 영상에서 채 사라지지 않은 때, 찌비찌비(치비치리) 가마(동굴) 앞에 도착했다. 오키나와 전쟁(전투) 당시 집단자결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집단학살지 중 한 곳이다.

▲ 조각가 긴조 미노루의 조각상이 세워져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찌비찌리 동굴 입구 오른쪽 편의 모습.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안내 표지판도 없는 한적한 수풀 속에 위치한 찌비찌리 동굴의 입구 오른쪽 편에는 조각가 긴조 미노루의 조각상이 세워져있었다.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동시에 집단학살을 고발하는 조각상이다. 140여명 중 83명이 집단자결을 했다고 알려진 동굴은 어두컴컴한 게 꽤 깊어보였고 입구도 좁고 낮았다. 주변의 무슨 풀 때문인지 좋지 못한 냄새까지 났다.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처참한 비극이 일어났던 곳.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평화기행 일행은 선뜻 찌비찌리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묵념을 하고서 몇몇만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동굴 안을 둘러봤다. 얼마전까지 유골이 발견됐다는 동굴은 짐작보다 더 깊었다.

제주, 옥쇄(玉碎)작전 피했으나 4.3의 비극으로

찌비찌리 동굴 앞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있다.

‘집단자결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고 죽는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황민화 교육과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된 죽음이다.’

▲ 찌비찌리 동굴 앞에 세워진 비석.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오키나와 주민들을 지켜줄 줄 알았던 일본군은 주민을 지키지 않았고 ‘옥쇄’ 명령을 내렸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의 ‘옥쇄(玉碎)’, 명예를 지키며 깨끗이 죽으라는 ‘옥쇄’ 명령은 강요된 집단자결, 집단학살을 낳았다.

오키나와가 함락된 이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일본군은 제주 역시 ‘옥쇄’ 작전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것처럼 제주 주민들을 볼모로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죽음으로 내몰았을 터다.

일제가 구축한 제주의 동굴진지는 확인된 것만 700여개. 제주 서남부 일대는 비행장과 격납고 등으로 거대한 결전기지가 됐고 송악산과 모슬포 일대는 지하요새화됐다.

찌비찌비 동굴은 제주의 숱한 동굴기지를 떠오르게 했다.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제주에선 지옥같은 옥쇄 작전이 펼쳐지진 않았다. 그러나 제주는 당시 일제가 만든 동굴진지에서 또다른 죽음과 지옥을 맞이한다. 바로 2년 뒤부터 벌어진 제주 4.3항쟁이다.

“한국에선 제주 군사기지에 대해 본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데나 인근 휴게소는 가데나 기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100엔을 넣으면 미군기지 격납고 안에 들어있는 비행기까지 볼 수 있었다. 생경했다. 우리나라에선 2007년 주한미군 기지 등을 촬영했다는 이유로 사진작가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기도 했는데 이 곳은 여느 관광 장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서 승 교수는 일행에게 “마음껏 사진을 찍어도 되니 염려말라”며 농을 하기도 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데나 기지. 오른쪽에 미 공군 비행기가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가데나 기지는 총면적 445㎢, 오키나와의 남북을 가르는 중앙부에 위치해 섬 3분의 1을 차지한다. 또 가데나시의 83%를 차지하고 있어 가데나시는 제 모양을 갖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동북아시아 최대 규모의 미 공군기지인 가데나 기지를 상대로 주민들은 오랫동안 싸워왔다. 2011년엔 가데나 기지 주변 주민 2만2천여명이 소음에 따른 피해보상 소송을 내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기지를 둘러싼 사고와 사건은 끊이질 않았다. 미군기지 인근에서 벌어진 군용기 사고, 장갑차 사고, 미군 성범죄 등.

이날 저녁 만난 일본의 평화운동가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는 미군기지 문제들에 대해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면서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한국에선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본토(육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로 생각합니까?”

▲ 망원경으로 보면 가데나 기지 격납고 안이 더 자세히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평화의 섬’을 붙인 오키나와와 제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은 해군력의 60%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하고 있는 미국으로선 항공모함을 정박할 수 있는 전초기지를 얻는 일이다. 또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이전은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의 말대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을 뒷받침”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서 교수는 일행에게 한미일 삼각동맹의 주요 거점이 되는 오키나와와 제주의 특성을 설명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제주와 오키나와가 모습만이 아니라 그 운명 또한 닮게 한 배경이 된 지정학적 위치. ‘평화의 섬, 제주’, ‘평화의 섬, 오키나와’라며 ‘평화의 섬’이라는 같은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것 또한 필연인 셈이다.

류쿠무라 민속촌, 노랫말을 흥얼거리다

▲ 류쿠무라 민속촌의 모습.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오키나와 옛 민가들을 볼 수 있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두 번째 날, 마지막인 일정인 류쿠무라 민속촌으로 향했다. 독립된 류쿠 왕국이었던 오키나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과는 다른 오키나와 고유의 문화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백년이 넘는 옛 민가들을 볼 수 있고 류쿠의 전통 악기인 ‘산신’과 염색 등을 체험할 수 있게 해놨다. 또 사자를 오키나와식으로 부르는 이름인 ‘시사’(シーサー)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 민가의 한 쪽에 ‘시사’가 나란히 놓여있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민가 지붕 위에도 ‘시사’가 세워져있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압권은 민속춤 공연이었다. 대개 야외에서 공연하는데 이 날은 비 때문에 실내에서 공연을 한다고 했다. 작은 타악기인 캐스터네츠와 비슷한 악기를 들고 여성들이 추는 민속춤은 반복되는 음에 맞추는 느릿한 춤사위였는데도 강렬한 인상을 줬다.

▲ 여성들이 느릿한 민속춤을 추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 ‘에이사 북춤’의 한 장면이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이어진 오키나와 전통 춤인 ‘에이사 북춤’은 남성들이 북을 들고 추는 춤인데 휘파람을 불면서 흥을 돋구었다. 단순한 북소리와 추임새인데도 중독성이 강했다. 몇 사람이 추는 단순한 춤인데도 눈길을 잡았고 익숙한 듯한 멜로디는 흥겹게도 들리고 구슬프게도 들렸다. 몇마디 안되는 반복되는 노래말도 인상적인데 일행 중 누군가가 ‘일본 말이 아니라 오키나와 말로 추임새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키나와 고유의 말로 흥얼거리는 외침 같은 노랫말.

제주 사투리가 떠오르는 노랫말이 입안에 오래동안 맴돌았다.

▲ 류쿠무라 민속촌을 떠나도 한동안 노랫말이 맴돌았다. [사진-통일뉴스 오삼언 통신원]

(오키나와 여행기⑤ 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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