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과 8일 통일맞이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할 때 평생 동안 조직활동가라고 생각한다. 힘은 조직에서 나온다.”

최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이자 통일맞이 이사장을 맡게 된 이창복(75세) 의장은 8일 <통일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통일운동의 해법으로 ‘조직’을 강조했다.

이창복 의장은 14대째 삶의 터전을 이어오고 있는 원주에서 ‘카톨릭 노동청년회’(JOC) 활동을 시작으로 재야운동에 투신해 민통련, 전민련, 전국연합으로 이어지는 정통 재야운동 조직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통일맞이나 6.15남측위원회나 다 같이 민족문제에 대해서 정말 집요하고 집중적으로,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포괄적으로, 대중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조직정비와 체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통일맞이에 대해서는 “선각자인 문익환 목사의 생각과 행동들을 배워가면서 실천해 나가는 계승사업도 중요하다”면서도 “문익환 목사의 뜻을 펼쳐나가기 위한 대중운동 조직체로서 발돋움해야 한다. 통일운동 조직으로서 확대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6.15남측위원회에 대해서는 “6.15남측위원회가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은 남남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며, “조직 내부의 갈등도 우선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라면서 “전 분야에, 전국적으로 조직을 해서, 조직의 힘을 좀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해외 3자의 공동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지만 안 되면 국제 학술대회라도 외국에서 소집할 계획”이라고 밝혀 주목된다. 공동행사가 가로막히더라도 북측까지 참여하는 국제 학술대회를 해외에서 개최하겠다는 구상이다.

“항상 남북문제는 민간 활동부터 시작이 돼서 정부가 받아들임으로써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 순리”이며 “정부가 반대할지라도 민간운동 쪽에서는 어떻게라도 물꼬를 터서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그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 특히 안보문제에 있어서 더 그렇다”고 평하고 “북핵문제를 비핵이 아니라 이제 만든 건 할 수 없이 인정하고 앞으로 더 확산하지 않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되는 것 아니냐”며 북핵 협상전략을 ‘비핵화’를 전제로 하되 ‘비핵화’에서 ‘비확산’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주변국 관계도 정상화하겠다는 문구가 있던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북 당사자 간 합의를 존중하고 주도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며 “한미동맹도 중요하지만 민족문제는, 한반도 평화문제는 남북이 주도적으로 끌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다음은 8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 소재 통일맞이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문익환 목사로부터 통일운동을 배웠다

▲ 이창복 의장은 지난 재야운동을 회고하면서 차분한 어조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사진 - 통일뉴스]
□ 통일뉴스 : 최근에 통일맞이 이사장과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을 맡았다. 중요한 민간통일운동단체들의 대표를 함께 맡게 됐는데, 배경이나 심경을 전해달라.

■ 이창복 상임대표의장 :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성격으로서의 통일맞이는 이사로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해왔다. 내가 제일 오래된 이사여서 전임 이사장인 김상근 목사가 후임자를 선정할 때 나를 지명한 것으로 안다.

6.15남측위원회에서는 공동대표이자 운영위원을 맡아 왔는데 통일맞이 이사장이 되니까 또 자연스럽게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을 맡게 됐다. 하던 일에서 더 중책을 맡은 셈이다.

내가 재야에서 민통련, 전민련, 전국연합을 거치면서 일관되게 통일문제에 대해 집중해왔고, 국회에 있을 때도 그쪽에 힘을 많이 실었다. 다시 재야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맡고 보니까, ‘상당히 활동하기 어려운 시기구나’ 생각된다. 그리고 통일문제, 민족문제를 주로 다루는 조직인데 지금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 있어서 답답한 기분이다.

앞으로 통일맞이나 6.15남측위원회나 다 같이 민족문제에 대해서 정말 집요하고 집중적으로,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포괄적으로, 대중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조직정비와 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오랫동안 재야에서 활동해 늦봄 문익환 목사와 친분이 있었을 것 같다. 문 목사와의 인연을 소개해달라.

■ 문익환 목사와의 관계는 1976년 명동 3.1민주구국선언을 준비할 때 뵙게 된다. 문 목사가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집회에서 여러 번 뵐 수 있었다. 한빛교회에서의 모임이라든지,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던 금요 기도회 또는 목요 기도회에서도 자주 뵐 수 있는 상태였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1984년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만들 때 나는 교회운동에서 재야운동으로 바꾸는 시기였다.

그때 재야 운동권의 여러 조직이 성장해오고 있는 터였는데, 그해 6월 이부영 씨를 중심으로 해서 민주운동협의회가 뜬다. 이것은 문인조직, 농민조직, 노동자조직, 부문조직들이 모여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를 조직한다.

또 개별적인 인사들이 참 많았는데, 예를 들면 문익환 목사라든지, 백기완 선생, 계훈제 선생, 장기표 씨, 이런 운동권에 알려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1984년 9월 민주통일국민연합(민통국)을 만든다.

그래서 민민협, 민통국이 생기고, 두 조직이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민민협 하는 사람들이나 민통국 하는 사람들이나 다 같이 한 뜻으로 움직였던 사람들인데 조직을 따로 해야 할 이유가 뭐냐? 그래서 1985년 4월에 민민협과 민통국이 통합해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약칭해서 민통련을 조직하게 된다.

민통련의 조직이 어떤 의미가 있냐면, 소위 전선조직으로서의 처음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문 조직과 지역조직의 양날개론이 제기되면서 지역과 부문이 통합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선조직으로서의 민통련이 출범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문익환 목사를 모시고 일하게 되면서 가까워지게 됐다.

□ 문 목사와 같이 오랫동안 일하면서 지켜본 문 목사는 어떤 분이었고,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 문익환 목사는 정말 탁월한 선동가다. 그런데 그 선동이라는 게 많은 대중을 움직이는 팍 찌르는 언어의 구사가 필요하지 않나? 그것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깊은 사색과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또 하나는 젊은 청년 운동가였다. 그때 당시 70이 넘었지만 젊은이들처럼 여기 저기 뛰어다니면서,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하던 그런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문익환 목사로부터 통일운동을 배웠다. 통일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통일운동이 어떤 내용인지, 그걸 배우게 됐다. 그때 우리 안에 ‘선민주 후통일론’, ‘선통일 후민주론’ 논쟁이 한창 벌어졌을 때인데, 문 목사가 정리해 주길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동시에 추진해야 할 것이지, 따로 떨어져서 갈 일이 아니다”라고 정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현장에 정말 직접 뛰어다니면서 격려해주고, 병상을 찾아 위로해줬다. 그것은 정말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하고, 정말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남남갈등도 해소하지만, 조직 내부의 잡음도 해소해 나가야”

▲ 이창복 의장은 지난 3월 15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된 6.15남측위원회 정기공동대표회의에서 임기 2년의 상임대표의장으로 선출됐다. [사진제공 - 6.15남측위]
□ 통일맞이를 어떤 방향으로 끌어가고 싶나?

■ 통일맞이는 처음 출범할 때는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로 출발했고, 지금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선각자인 문익환 목사의 생각과 행동들을 배워가면서 실천해 나가는 계승사업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는 계승만 할 것이 아니다. 문익환 목사의 뜻을 펼쳐나가기 위한 대중운동 조직체로서 발돋움해야 한다. 통일운동 조직으로서 확대발전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간부회의나 이럴 때 내가 역설한다. “이제 문익환 목사를 개별적으로 좋아서 쫓아다니는 사람 중심의 통일맞이가 아니라, 서울과 지역 골고루 그 뜻에 찬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직을 만들어서 조직과 함께 그 뜻을 실천해 나가고, 또 그 조직이 힘이 있는 만큼 통일운동의 선봉에 서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런 방향으로 앞으로 2,3년 동안 노력해 보겠다.

□ 통일맞이가 현재 지역조직이 있나?

■ 지금 지역마다 골고루 퍼져있지 않지만 대구, 부산, 강진, 대전, 이렇게 통일맞이에 참여하고 있는 멤버들이 분산돼 있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또 없는 데는 더 사람들을 확보해서 지역조직을 만들 예정이다. 이 지역조직을 통해 문익환 목사의 뜻을 전파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해서, 그런 방향으로 가 보려고 한다.

우리의 활동이라는 것이 통일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직을 확대하고 강고하게 만들어서 생성되는 힘으로 통일운동에 기여해야 되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사람과 조직을 운영하는데 재정문제가 걸리는데, 이것을 우리가 극복해 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 늦봄문익환학교가 지난해 <동아일보>의 색깔공세를 받은 것으로 안다.

■ 교육공무원들의 좁은 안목에서 나온 행정조치였고, 그것이 일반화 됐다든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파악되기는 하지만 전국적인 관심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위 말하는 좌파세력에 대한 음해라고까지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보수세력을 강화하려고 하는 측면에서 나온 발상이고 행위들이다.

□ 지난 5년간 이명박 정부 하에서 실질적으로 남북 민간교류의 문이 닫히면서, 6.15남측위원회가 사실상 무력화된 것 아니냐는 평가가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 박근혜 정부도 보수정권인데 어떻게 이런 문제를 풀어가야 된다고 보는지?

■ 김상근 목사가 상당히 고충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봤다. 이명박 정권과 함께 김상근 목사의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임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임기 내내 북쪽하고 왕래도 없었고 회담도 할 수 없었고, 정말 답답한 심정으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 와서 크게 변화가 있을 것 같으냐? 지금 현재로서 보면 큰 변화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인데, 이럴 때 저는 6.15남측위원회가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은 남남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조직 내부의 갈등도 우선적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15남측위원회가 상당히 광범위한 조직이지 않나. 따라서 스펙트럼도 다양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의견수렴도 쉽지 않다. 이런 것은 소통의 부족에서 오는 것도 있고 정파적 측면도 없잖아 있다. 이런 몇 가지 요소 때문에 상당히 결집되기 힘든 조직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 내부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의식의 전반화, 일상화를 기할 수 있는 내적 프로그램을 많이 가져야 되지 않겠나. 워크숍이라든지 세미나라든지, 지역간담회라든지 소통이 원활하게 되도록 해 남남갈등도 해소하지만, 우선적으로 조직 내부의 잡음도 해소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전 분야에, 전국적으로 조직을 해서, 조직의 힘을 좀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6.15남측위원회는 지역조직이 많이 구성돼 있다. 그러나 현재 구성돼 있는 조직에 만족하지 않고 그걸 확대해 나가는, 그래서 질을 끌어올리는 그런 일을 병행하고 아직 미조직인 곳은 조직을 완성해야 한다.

그 힘을 뒷받침으로 해서 남.북.해외 3자가 공동으로 6.15선언을 실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3자가 공동으로 하는 대회라든지 학술 심포지엄이라든지 여러 행사를 기획할 수 있겠는데, 이렇게 해서 남북 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이 일을 법적으로 책임지고 있지만 항상 남북문제는 민간 활동부터 시작이 돼서 정부가 받아들임으로써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 순리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부가 반대할지라도 민간운동 쪽에서는 어떻게라도 물꼬를 터서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진심으로 민족을 위하고 결국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부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로 바뀐 정부가 정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기에는 조금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좀더 부딪쳐가면서, 또 그들도 정리해가면서 남북문제를 전환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북문제가 상당히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어서, 정부는 전환들을 검토해야 한다. 다시 지난 5년 동안의 정책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변화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5년 동안 강경하게 대처한 결과 지금 남은 것이 뭐가 있나? 남과 북에 손해만 끼치고 평화를 멀리하게 되는 위기의식만 고조돼 있는 그런 상황으로 되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지난 5년 동안의 정책을 지양하고 새로운 정책을 구상하지 않으면 이 정권도 상당한 혼미를 거듭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책 전환이 꼭 필요하고 그렇게 할 것을 기대한다.

남북.해외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회 소집

▲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2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6.15남측위가 주최한 '종교, 정당, 시민사회 인사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창복 의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을 맡은 첫 해이기도 하고 박근혜 정부의 첫 해이기도 한데, 올해 6.15남측위의 사업방향이나 주요 사업계획이 있다면?

■ 올해 3자가 공동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대회를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남과 북, 해외 3자의 공동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지만 안 되면 국제 학술대회라도 외국에서 소집할 계획이다.

거기에는 북도 부르고 남도 부르고, 또 관계된 나라들을 불러서 국제 학술세미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3자가 모일 수 있는 기회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방법을 탐색 중에 있다. 본행사가 안되면 학술대회라도 준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조직을 더 정비할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남남갈등 해소와 조직 내부의 원활한 소통을 주요한 사업으로 상정하고 추진해볼까 생각한다.

□ 의사소통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어 6.15언론본부의 경우 한국기자협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 한국PD협회, 전국언론노조 등 거의 모든 현업 언론조직들이 망라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6.15남측위원회 산하의 각 부문본부와 지역본부들을 활성화 할 수 있는 구상이나 방안이 있는지?

■ 이전에 6.15언론본부에서 세미나를 하지 않았나? 그러한 세미나를 각 부문조직이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부문조직 단위를 움직여가면서, 때로는 전체가 모여서 같이 의논하고, 이러는 속에서 소통이 원만하게 되고 공통점이 설정이 돼서, 조직된 힘이 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해볼까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할 때 평생 동안 조직활동가라고 생각한다. 힘은 조직에서 나온다. 그런데 조직은 그냥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있어야 하고, 정확한 판단이 있어야 하고, 뜨거운 애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조직운동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근간에 시민사회운동이라든지 재야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많이 흡입돼 갔다. 인력의 이동이 생긴 거다. 그래서 통일운동권이나 일반 시민운동권의 저력이 조금 약화됐다고 볼 수 있는 상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문제를 다루는 이 조직은 꺾이지 않고 쉼없이 발전해가고 성장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예전에 비해 인터넷 시대도 되고, 촛불집회 이후의 흐름을 보면 전통 재야운동도 있지만 일반 젊은층의 대중의식도 역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변화해가는 시대의 추세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고, 기존 재야운동이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는지?

■ 옛날 고전적 의미에서의 재야운동은 지금 별로 보기 어렵다. 운동권에서 평하기를 문익환 목사 시대를 1세대, 우리들 세대를 2세대로 보는 모양인데, 하여튼 일반 시민운동, 또 선량한 젊은이들의 운동이 조직적이고 활발하게 전개되기 전까지는 재야운동이 그 나름대로 상당히 역할이 있었고 활발했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시간이 경과한 지금에 와서는, 우선 생각의 방향도 달라질뿐더러 생활의 패턴도 달라지고 또 젊은이들의 대거 등장으로 인해서 운동의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재야운동이니 시민운동이니 청년운동이니 이러한 구분을 하기 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떻게 고민해야 하고 고민을 관철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다. 이런 건 다 똑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금 더 관심과 집중력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재야운동이 시민운동의 개념으로 변화되었고 또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의원시절, “국보법 손도 못 댄 것 부끄럽게 생각”

▲ 16대 국회의원 경험을 갖고 있는 이창복 의장.
[사진 - 통일뉴스]

□ 재야인사로서는 드물게 16대 의원으로서 국회의원직을 경험하고, 또다시 재야단체 대표를 맡게 됐다. 작년 총선과 대선을 보면서 야권이 상당히 무력화됐고, 진보정당은 아예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정치권에 대해 바라는 바, 촉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 내가 국회의원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제일 먼저 부끄럽게 생각한 것은, 내가 재야운동 하면서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많이 했는데, 국회의원 하면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개정이라도 해야 하는데 개정도 안 됐다.

내가 소속돼 있던 새천년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개혁적인 의원들이 많지 않았다. 그 당시 법을 발의해서 서명을 받으러 다니니까, 20명 이상 받아야 발의하는데 20명도 못 받았다. 그런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그 당시 당 대표도 “왜 내부 풍파를 일으키려 하느냐”는 그런 류의 반응이었다. 재야에 있을 때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손도 못 댄 것을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한다.

정치권에 대한 불평이라고 한다면, 지난번 총선 때 그리고 대선 거치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당이 공평하고 새로운 환경과 정세에 적응해 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여전히 친소관계에 의해서 당이 움직여지는 것 같다.

어느 집단이든 주도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계파는 있을 수 있고 필요한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주도세력 중심의 정당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당이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들은 한다. 그러나 결정되어 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는 아닌 것 같다.

□ 이왕에 재야에서 정치권에 뛰어들었으니까 정치지도자가 돼서 정치판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는지?

■ 그런데 나는 정치권에 들어간 계기가 내 생각과 관계없이 진입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이것을 목표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오래 머물 생각은 못 했다. 그러나 또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경험이 됐고 안목을 좀더 넓힐 수 있는 기회는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의원활동이나 선거에 돈이 많이 들었다. 내 선거를 통해서도 지연이라든지 학연, 혈연 이런 것을 탈피해 보려고 노력했다. 돈 들지 않는 선거, 법정비용 외에는 쓰지 않는 선거, 그래서 항상 유권자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좋은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는 당신들도 투자하라”고 했다.

당에 관여해서는 당쇄신발전위원회에도 참여해서 총재제도를 없애고 경선제도를 도입하고, 진성당원제를 만들고 이런 것은 당을 개혁하는 데는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여튼 정치권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내 적성에 맞지도 않고.

□ 지금 한반도 정세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일각에서는 지금 북한이 핵무장을 추구하는 전략적 노선을 선택했고, 한국이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대응 구조가 형성돼 있다. 더구나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전략적 충돌이기 때문에 장기화, 상시화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 것 같다. 한반도의 긴장구도, 본질적인 모순을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 된다고 보는지?

■ 핵문제는 2003년 북한이 NPT를 탈퇴했고, 그때부터 중요한 과제로 부상됐는데, 왜 북한이 NTP로부터 탈퇴했느냐? 클린턴 정부에서 북미 제네바합의를 통해 북을 달래가면서 평화적으로 핵을 개발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해서 북한에 원자력 발전소도 지어주기로 하고 중유도 공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부시 정부가 들어서자 확 달라졌다.

그래서 북으로서는 NPT를 탈퇴하고 자신들이 핵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미국 입장에서야 북한이 핵을 갖지 않길 바라겠지만 북한도 주권이 있는 한, 자기들 영토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핵을 만드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고, 그들의 선택이다. 이것을 강대국이 막는 것이 과연 옳은 건가? 또 현실적으로 파키스탄이나 인도라든지 많은 나라들에서 핵을 갖고 있지 않나?

북핵 문제는 2000년대 초반에 국회에서도 많이 거론돼 많은 생각을 해봤다. 그때 느꼈던 것은 북이 핵을 들고 있다는 것은 생존적 차원에서의, 생존수단으로서의 핵을 선택했다고 판단했다.

그 이후부터 계속 핵문제는 개발하고 또 시험도 하고 이렇게 됐는데, 이번에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지원하겠다는 이런 정책을 합의했는데, 그것이 옳은 건가? 나는 이제 우리가 정책을 좀 전환해야 한다면 비핵이 아니라 핵확산을 방지하는데 더 초첨을 맞춰야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래서 우리 정부도 미국도 ‘비핵.3000’이 아니라 ‘3000’이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핵확산 방지를 위한 3000’을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북핵, “확산하지 않도록 하는데 초첨 맞춰야”

▲ 남북관계와 한미관계, 북핵문제 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이창복 의장. [사진 - 통일뉴스]
□ 오늘 새벽 한미 정상이 한미동맹 60주년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공동기자회견도 가졌다. 평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북한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인 것 같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이후 바람직한 한미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된다고 보는지?

■ “이번에 한미동맹을 더 강화시켰다”, 그런 이야기 아니냐? “가치동맹에서 신뢰동맹으로”, 이런 표현은 새로운 시도라고 평가하던데, 나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유희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이 든다.

이번에 두 정상이 만난 김에 획기적으로 “정전협정 60년이 됐는데, 없애야 되는 것 아니냐?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고 합의했어야 한다고 본다.

또 북핵문제를 비핵이 아니라 이제 만든 건 할 수 없이 인정하고 앞으로 더 확산하지 않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되는 것 아니냐. 여기에 합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정상회담의 새로운 합의이지 구태의연한 합의만을 자꾸 연출한 것은 답답한 회담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 특히 안보문제에 있어서 더 그렇다.

물론, “비확산 합의를 해야 한다”라는 것은 근본적인 비핵화를 전제로 해서 단계적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 6.15공동선언이나 10.4선언이 역사 속으로 묻혀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 남북기본합의서는 정상 간의 합의는 아니었고 정상이 인정해 국무총리들이 사인한 것인데, 서명을 정상들이 안 했기 때문에 조금 구속력이 덜할 수 있다. 6.15선언이나 10.4합의는 양쪽 정상들이 서명을 한 것이다.

이건 지켜내야 한다. 지켜낼 수 있는 힘을 우리 스스로가 가져야 한다. 이건 북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다. 북이 이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면 북도 남도 다 같이 안심하고 평화적으로 살 수 있는 우리들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데 참 걱정이다.

한미동맹도 중요하지만 민족문제는, 한반도 평화문제는 남북이 주도적으로 끌어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우리민족의 운명은 우리민족이 끌어가야지 왜 남에게 의존하나?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주변국 관계도 정상화하겠다는 문구가 있던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북 당사자 간 합의를 존중하고 주도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사는 곳과 건강관리나 특별한 취미활동이 있는지?

■ 게을러서 운동을 잘 못한다. 서울과 원주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운동인 셈이다. 나는 오래 살기 위한 생각은 별로 안 한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일하다가 길거리에서든 집에서든 하느님이 부르면 “예. 가겠습니다”하고 가는, 그런 생각이다. 운동을 위해서 시간을 낸다든지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 것 같다.

원주에서 14대째 살고 있고, 사는 집은 원주 시내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아주 공기가 좋다. 다만, 교통이 불편하지만 적응해 가면서 사는 거다. 운전은 못하니까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고 집까지는 시내버스를 탄다.

□ 원주에는 고 장일순 선생이 서화를 하고, 김지하 시인은 시 쓰고 난을 치고 주변에 문화적 소양이 높은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취미삼아 하는 것이 있는지?

■ 장 선생 난치는 것도 많이 봤고, 김지하 씨도 많이 봤는데, 그들의 재능이다. 예술적 감각이 없으면 그거 못한다.

김지하 씨는 중학교 한해 아랫반인데 학예부 미술반장을 했다. 그러니까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렇게 미적 감각이 있는데다가 장 선생한테 배우니까 더 잘 그릴 수 있었다.

눈이 아파서 독서도 잘 못하지만 시간이 있는 대로 책을 좀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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