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벽에서 문을 보지 못할 때 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간절한 사람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역사에 제 몸을 던진 사람만이 작고 여리고 숨죽여 흐르는 숨어 있는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시우 사진가의 법정 최후진술은 한 편의 미학 강의이자 국가보안법 강의로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 최진섭이 지은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 - 법정 콘서트 무죄』가 창해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사진제공 - 창해]
2007년 <통일뉴스>에 기고한 글들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은 물론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 수많은 죄목으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년형을 구형받았지만 지난해 10월 마침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역사적 재판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나왔다.

최진섭 전 『월간 말』 기자가 대담을 이끌고 이시우 작가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가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쓰여진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 - 법정 콘서트 무죄』가 창해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

28개 공소조항 전부에 대해 무죄선고를 이끌어낸 이시우 작가의 국가보안법 재판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판례로, 피고인과 변호인, 협조자들의 남다른 신념과 노력이 결실을 거둔 국가보안법 재판의 교과서로 불릴만 한다.

“걷기 명상은 자신을 세계보다 낮은 자리에 내려놓는 것이며, 고통과의 친화이며, 낯선 것과의 대화라고 봐요.”(이시우)
“그때 이 작가님 삼보일배하다 재판정에 들어서면 몸에서 바람냄새가 났어요.”(이정희)

옥중 묵비권 행사와 48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보석으로 석방된 뒤 국회 앞에서 출발해 삼보일배로 임진각으로 향했고, 거기서 강원도까지 걷기명상을 이어간 99일간의 ‘국가보안법 명상’은 이시우 작가가 어떤 자세로 국가보안법에 맞섰는지 절절히 웅변하고 있다.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준 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봐요. 슬라이드 사진 재판을 기획하지 않았다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반도 보여주지 못했을 것 같아요.”(이시우)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어떻게 사진을 안 보여주고 사진작가의 재판을 해요... 재판정의 반응이 감동적이었어요. 제가 경험한 최고의 법정이었죠.”(이정희)

이정희 변호사가 시도한 ‘슬라이드 재판’은 ‘콜럼버스 달걀’처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재판형식을 만들어냈고, 잘 준비돼 있던 이시우 사진가는 문답식으로 두 시간짜리 미학강의를 감동적으로 펼칠 수 있었다.

문정현 신부님이 재판 방청에 개근하는 등 이시우 사진가의 국가보안법 재판은 숱한 이야기거리가 넘쳐나지만 정작 법정에서 다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들에 대한 반론이 어떤 관점과 구도 아래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진행됐는지는 당사자들의 이번 대담을 통해 처음으로 자세히 알려졌다.

특히 이시우 작가의 사진작품 ‘지뢰꽃’과 ‘동백꽃눈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전문기자로서 판문점 유엔사 경비대 ‘캠프 보니파스’의 화학무기 보관 표식을 어떻게 발견하고 해석해냈는지, 열화우라늄탄 특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평화운동가로서 어떻게 대인지뢰와 미군기지를 조사하고 대인지뢰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는지...

이적표현물 소지죄의 무죄입증을 위해 재판 진행 중에 이 작가 스스로 검찰 공소장에 오른 북한 원전을 국립도서관 북한자료실과 국가정보원에서 대출받아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한 에피소드는 국가보안법의 허구성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람을 통째로 보고 신뢰에 기반한 인간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의뢰인과 호흡을 맞췄던 이정희 변호사는 이시우 작가의 일련의 활동을 예술가로서의 창작활동 과정으로 ‘통역’해냈고, ‘평화적 감시권’을 개념화해 결국 완전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다.

평택 대추리 변호인으로서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단어를 판결문에 등장시킨 뒤 ‘평화적 감시권’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든 이정희 후보는 이시우 작가의 재판을 계기로 정치권에 입문하게 됐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이자 이제는 국가보안법 전문가가 된 이시우 작가와 국가보안법 사건 전문 변호사인 이정희 후보의 대담을 통해 국가보안법이 우리사회는 물론 우리 개인 내면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주고 있는지, 나아가 미국의 세계전략과는 어떻게 맥락이 닿아있는지 그 본질을 밑바닥까지 파헤친 역작이다.

나아가 우리시대에 보기 드문 진정한 한 명의 예술가와 변호사를 만나는 감동을 선사하는 특별한 책이다.

다만,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북공세와 국가보안법의 연관성을 드러내다 보니 이와는 별개 문제일 수 있는 통합진보당 내부의 패권문제나 비례경선 부실.부정 문제까지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는 대목은 시각차에 따라 논란이 예상된다.

이 책의 발간 시점과 대담을 이끈 저자의 선정에 좀 더 신중을 기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마음 한켠에 남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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