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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세속도시의 즐거움 - 최승호 일류배우가 하기엔 민망한 섹스신을 그 단역배우가 대신한다 은막에 통닭처럼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 얼굴없는 몸뚱이로 팔려다니며 관능을 퍼덕거리는 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 나, 관객이 있다 幻으로 배불러오는 욕정과 幻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 눈 앞의 시간이 토막난 채 흘러가는 필름이고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8.1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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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북어(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8.1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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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먼 길- 윤석중아기가 잠드는 걸보고 가려고아빠는 머리맡에앉아 계시고,아빠가 가시는 걸보고 자려고아기는 말똥말똥잠을 안 자고. 말을 잘 안 듣는 아이 둘을 발가벗겨서(교육을 위해) 산 속에 내버렸다는 비정한 어머니의 기사를 읽었다.그 아이들은 산 속에서 내려오며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간신히 등산객에게 발견되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8.0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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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골방에서- 박운식내가 자는 골방에는 볍씨도 있고고구마 들깨 고추 팥 콩 녹두 등이방구석에 어지러이 쌓여 있다어떤 것은 가마니에 독에 있는 것도 있고조롱박에 넣어서 매달아 놓은 것도 있다저녁에 눈을 감고 누우면그들의 숨소리가 들리고그들의 꿈꾸는 꿈의 빛깔들도 어른거리고 있다나는 그런 씨앗들의 거짓 없는 속삭임들이 좋아서꿈의 빛깔들이 너무 좋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7.29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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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존재의 이유 - 릴케 아! 우리는 세월을 헤아려 여기저기에 단락을 만들고, 중지하고, 또 시작하고 그리고 두 사이에서 어물거리고 있소. 그러나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친한 관계에 있고, 태어나고, 자라고 자기 자신으로 교육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결국 그저 존재하면 되는 겁니다. 다만, 단순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말이요.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7.2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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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봄눈 - 유희윤 “금방 가야 할 걸뭐하러 내려왔니?” 엄마는 시골에 홀로 계신외할머니의 봄눈입니다. 눈물 글썽한 봄눈입니다. 내가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읍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저녁 무렵에 외할머니가 오셨다. 백발의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으신 외할머니. 옛 사진처럼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무슨 얘기를 밤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7.1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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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전화를 받는 나무 - 이상희 여보세요 전화를 걸었으면 말씀을 하셔야지요 계절이 다 가도록 수화기를 들고 있잖아요 이것 보세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요 팔도 굳었네요 나무가 되고 말았네요 새들이 날아오네요 졸졸 흐르는 물소리 당신의 붉은 피 흐르는 소리만 들으면서 내 팔엔 초록잎이 돋겠네요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에서 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7.0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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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 - 최영미 돈과 권력과 약물로 오염된, 아무리 더러운 그라운드에도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 축구이다. 중학교 남자 아이들이 학원 수업을 마치고 축구를 하다 아파트 주민들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고 한다. 학원 끝나는 시간이 밤 10시쯤이니 아이들의 괴성에 주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7.01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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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가시 울타리- 왕유빈 산 사람은 보이지 않고,다만 두런대는 말소리만 들린다.지는 햇빛 깊은 숲에 들어와,다시 푸른 이끼 위를 비춘다. 요즘은 시간이 많아 거의 매일 산에 오른다.가끔 ‘가시 울타리’를 본다. 안심이다. 사람의 흔적.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면,‘빈 산 사람은 보이지 않고,/다만 두런대는 말소리만 들린다.’ 포근하다. 잠이 슬핏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6.2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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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꿀벌과 하느님 - 가네꼬 미수주 꿀벌은 꽃잎 속에 꽃잎은 흙 안에 뜨락은 흙 안에 흙은 동네 안에 동네는 나라 안에 나라는 세계 안에 세계는 하느님 안에 그리고 그리고 하느님은 조그만 꿀벌 속에 개신교 목사들이 인천의 한 개척 교회에 모여 부흥회를 열다가 코로나 19에 집단 감염되었단다. 마음이 착잡하다. 이 비상시국에 부흥회를 열다니! 원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6.1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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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자유 - 엘뤼아르 나의 대학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그리고 눈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읽은 책장 페이지마다 하얀 책장 공백마다 돌과 피와 종이와 잿가루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정글에도 사막에도 새둥지 위에 개나리 위에 내 어린 때의 메아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밤의 신비스러움 위에 낮의 하얀 빵조각 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6.1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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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라디오 뉴스 - 최영미 무언가 버틸 것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게 아이든 집이든 서푼 같은 직장이든어딘가 비빌 데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아프가니스탄의 총소리도 잊을 수 있고 사막의 먼지 위에 내리는 눈* 녹듯 잊을 수 있고 종군위안부의 생생한 묘사, 아나운서의 침착한 목소리 아이 떼놓고 울부짖는 엄마의 넋나간 얼굴도, 창밖으로 훌훌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6.0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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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소주병 -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인간은 ‘나’ 하나일 때 얼마나 약한가! 코로나19 사태로, 일상이 무너지고 비상사태가 몇 달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5.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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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아무것도 모를 때 - 심호택 다랑논가에서 콩잎에 붙은 땅개비를 잡아 유리병에 담았느니라 도랑물가에서 송사리떼 들여다보며 갈잎배 만들어 띄웠느니라 달아난 참게를 기다려 저물도록 지켜앉아 있었느니라 우리들 아무것도 모를 때 그 조그만 것들 모두 어디로 갔나 쓸데도 없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느니라 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항상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5.2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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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한(恨) - 박재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뻗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위로 뻗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5.1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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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숲으로 된 성벽 - 기형도 저녁노을이 지면 신들의 상점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 어느 골동품 상인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5.0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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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고정희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 버스 속에서도 추운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 잔 끓이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에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4.2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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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풀베기 - 하청호 풀을 벤다 머리채 잡듯 거머쥐고 낫질을 한다 얘야, 아무리 잡풀이지만 그렇게 잡으면 못쓴다. 풀을 잡은 아버지 손을 가만히 보니 풀을 쓰다듬듯 감싸고 있다. 아버지 눈빛이 하늘색 풀꽃처럼 맑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창 유행할 때, TV에서 그의 열강하는 모습을 수시로 보게 되었을 때, 내 귀에도 그의 강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4.22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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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천국의 예감- 전윤호아이가 장난감 상자를 뒤집어 버린 듯계절이 흐트러지고폭우가 쏟아졌다축대가 무너지고길이 끊겼다고립된 채 물바다가 된 마을들 이제 천둥과 번개가 가득한 하늘아래빌딩들은 폐쇄되고신전은 무너질 것이다폐허마다 운명처럼덩굴이 올라갈 것이다은행들은 바오밥 나무를 껴안은 채 사라지고관공서엔 보아뱀이 알을 품을 것이다즐거운 열대우림바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4.1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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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빅 브라더 - 서정춘 어쩔 수 없네 바쁜 길 걷다가 고샅길로 드네 다급한 소피 시언코롬 보네 어디서 하르른지 파르른지 인기척 있네 찔금하고 이마 들고 우러를 보네 모자 쓴 낮달이 아까 본 얼굴이네 아까 보고 또 보네 평소에 하던 강의들이 다 휴강에 들어가 거의 매일 뒷산에 오른다. 봄, 꽃향기가 은은하다. 쉬엄쉬엄 산길을 간다. 살아있음!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20.04.08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