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학생들의 통일의욕을 무정견으로 억압치말라=민족적 요구를 집권층의 이해로 억누를 수는 없다= 지난 삼일 서울대학 민족통일연맹 대의원대회는 다시금 남북학생간의 교류를 제창하였었고 또 5일에 개최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에서도 역시 전기한 제의가 재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들의 획기적인 제의는 당연한 일이지만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공산정권은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춰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그런데 이와 정반대로 이남의 정계는 각색각양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
지난 7월 26-28일 정전협정 70주년을 기해 미 전국에서 수도 한복판 워싱턴DC로 평화활동가들, 평화단체들이 대규모로 결집했다. “한국전쟁을 끝내라”는 드높은 함성과 행진이 3일간 이어진 ‘코리아피스액션’ 행사에 AOK (액션 원 코리아)는 참가단을 조직하고 총 7명의 워싱턴원정단을 구성해 미국을 다녀왔다.(참조 코리아피스액션 홈페이지)윤석열 정부가 한미일 동맹을 속수무책으로 강화하며 고강도 군사연습을 계속하며 이제는 종전만 주장해도 ‘반국가세력’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는 요즘,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존재가 버겁기만 하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연재 순서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② 기록으로 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③ 자료와 증언-일제는 조선인을 어떻게 학살했나④ 北은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⑤ 강요된 망각과 시무(時務)의 역사연구⑥ 특별기고-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조선인 학살의 증언△나는 1923년 7월 7일, 8일경, 오사카(大阪)에서 왔는데 9월 1일 진재를 만났습니다. 그 때 당한 일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폭동이란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1일부터 2일까지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마음속으로 잡힐지 모른다는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가 연구하거나 자료를 수집한 전문 분야는 연구한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같은 학문을 연구한 분이 있기는 하지만 삼천포로 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식민지 사관을 극복한답시고 황당 사관으로 흐른 이유립과 황상기 류의 일부 자칭 민족사학자들이 그렇다. 그런 현상을 나는 여기 통일뉴스에 『국혼의 재발견』을 33회 + 호외 1회 등, 모두 34회를 연재하며 다루었다.이러한 나의 연구는 서지학적 검토를 거친 자료수집에서 시작되었다. 서지학은 국학(國學, 韓國學)의 기본학이자 기반학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와중에 수천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대참극이 벌어졌다.10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학살의 진상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 당시 계엄령을 발표해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일본 정부는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요구를 거부하고 있다.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고 다지는 일. 간토 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필요한 일이다.[통일뉴스]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아 특집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1) 단선단정 수립반대는 당연같은 민족의 운명 앞에 두고 이야기 1947년 4월 21일 새벽 11로 편성된 승용 자동차의 일군이 북한 삼팔도 선상에 놓여 있는 현역을 향하여 짙은 안개를 뚫고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이제 조국은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의 최후순간에 서서 민족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에 즈음하여 부흥된 자기들의 임무의 벅참과 감격 속에 차중의 사람들은 누구하나 말없이 묵묵히 앉아 외계에 벌어지는 조국풍토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고요한 연도의 정숙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8월의 근현대사적지는 (서울 중구 퇴계로 26가길 6)입니다. 는 경술국치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왕이 주인인 나라가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바뀌는 극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 필자주“남산에 갔다 왔어!”지난 2020년 개봉한 영화 은 ‘남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새삼 환기시키는 구실을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이래 이어져 온 남산의 중정(중앙정보부)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는 “나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8월 8일 오후 2시에 강북구 수유동 소재의 ‘근현대사기념관’에서 개막한 이준 열사 유해봉환 60주기 추모 특별전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특사”에 유족대표 조근송 씨는 참석하지 못했다. 필자는 수차 그에게 연락하였지만, 그는 지금 가짜 유족 이 모씨에게 받는 스트레스로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조 혜택도 없이 생활고를 겪고 있다.1. 이상설 주변의 친일 세력탁월한 독립운동가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의 주변에는 항시 친일 세력이나 밀정, 심지어 악랄한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오는 8월 8일 개막하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소재의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과 이준 열사 추모 사업의 정상화를 위하여 이 글을 쓴다. /필자 주 유독 이준 열사는 가짜 자손이 많이 출현한다. 직계 자손 모두가 함경남도 북청에 있어 그런 것 같다. 이준 열사의 자녀로는 외아들 이용(李鏞, 李勇) 장군과 장녀 이송선과 차녀 이종숙이 있다.장녀 이송선는 조건학과 결혼하였고, 차녀 이종숙은 역사학자 유자후와 결혼하였다. 외아들 이용 장군은 부인 청해이씨(李周年의 딸)와의 사이에서 장손자 이
거울우렁찬 「통일에의 고동」 ○.... 혜지와 청명에 빛나는 젊은 학생들의 불타는 조국애는 통일촉진의 전위로서 새로운 광명을 겨레들 앞에 비치고 있다. 억누를 길 없는 정열과 힘이 솟구치는 학생들의 통일에의 외침은 십육년동안 무쇠같이 가로막아온 북한의 하늘 멀리 울려 퍼져나갔다. ○.... 내나라 내 겨레가 통일없이 살 수 없으며 민족의 사활문제를 남의 나라에 맡겨만 둘 수 없다는 학생들의 주장... 언제까지나 사대와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어날 수 없는 절망으로 몰아넣기 만하는 기성세대를 믿을 수 없다는 젊은 감성들... 여기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인물사 연구를 위하여 1975년부터 현재까지 48년간 역사서와 함께 여러 성씨의 초간보 및 재간보, 보학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필자는 자료 수집 초기에 봉건시대의 재래식 보학(譜學)을 배운 바 있다.우리나라에서 보학은 조선초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학의 확산은 조선 영조조 이후 각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하는 시기에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과거에 보학이라면 흔히 문중보학(門中譜學)이라 불러왔다. 문중에서 주장하는 것을 되풀이하여 소개하는 수준이었기 때
독자논단제2공화국에의 항의 = 4.19부상자의 한사람으로서=도대체 잘된 것이 무엇하나 있느냐 한동학 4.19혁명의 성과는 도시 무엇인가? 도처에서 들려오는 민생고의 하소연은 고사하고 혁명이 그렇게도 그 제거를 다짐한 부패나 비원부정은 좀채로 제거되지 않은 채, 오히려 역행현상까지도 산견한다. 이것은 혁명의 주체가 권력의 담당자가 되지 아니하고 기성정당에게 양보하여 소위 고요한 혁명을 바랐던 때문인 것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지금의 현상은 한마디로 말하여 너무나 심하다. 실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개혁되었느냐는 것을 반문하고 싶어진다.
톺아보기 18에서 과학기술인재관리법을 살펴본 김에 과학기술 중시와 관련하여 김정은 집권기에 제·개정했거나 강조하는 법·제도의 사례 몇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한다. 2019년 4월 개정헌법에 과학기술 중시 반영먼저 이번 글에서는 북 헌법에 반영된 과학기술 중시 노선의 내용을 확인해본다. ‘헌법’은 국가의 형태, 국가기관의 운영 원리,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 등을 규정한 국가의 기본 법칙, 최고 법규이다. 북에서도 헌법은 국가의 기본법, 국가발전의 원칙을 규정한 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 헌법 속의 과학기술 관련 내용을 보면 과학기술에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제대로 보자논문이 밝히고 있는 인용문이나 주(註)는 검토하거나 확인하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나 연구가들은 인용문이나 주를 교차 검토하지 않는다. 그러한 현상을 염두에 두고 일부의 논문에서 인용문을 조작하거나 주로 왜곡하는 현상을 보여 준다. 완전히 “눈을 가리고 야옹”하는 현상이다.그 한 예로 지난 수년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1906년 특사증을 제시하며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 특사증으로 주장하였으나, 필자가 금년 6월 5일 자로 ‘신 잡동산이’ 제13회 연
시론 (하)통한을 위한 유엔의 노력에 대한 재검토 「UN군」이라 할 수 없다.남북한의 정치는 미⋅소의 출장정치 (앞의 것을 이음) 3, 6.25이후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취급의 실제적 의미미⋅소공위서 합의보지 못한 문제가 유엔에서 냉전거리로만 더럽혀져오다가 드디어 열전의 폭발로 화하고 만 것이 6.25동란이었다. 그동안 남북한의 정치는 미소의 출장소 정치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우리의 민족은 출장소 정치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6.25는 민족의 피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문제해결을 가로 맡은 유엔은 중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주초에 기고한 제19회 연재 ‘허준 묘소를 찾기까지를 소회(所懷)하다’에 이어, 이제는 이후 이야기의 일부를 간략하게 글로 남긴다.6. 허준 묘 취재에 얽힌 이야기1975년부터 나는 우리 민족의 인물사 연구와 자료 수집에 집중하였다. 과학 입국으로서 미래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찾아 나섰다. 이런 시기에 허준의 간찰을 입수하였고 여러 문헌과 자료를 검토한 결과 나는 허준이란 인물에 매료되었다.1983년경에 나는 당시 KBS 보도본부 문화부의 이동식 기자에게 “내가 허준 선생의 묘소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구암 허준(許浚, 1539~1615)의 편지 한 장이 필자로 하여금 운명과도 같이 사십여 년의 세월을 매진하게 하였다. 이제 이 운명과도 같은 업무를 내려놓고자 하여, 그 업무에 얽힌 이야기의 일부를 간략하게 글로 남긴다.1. 허준과의 만남1981년에 골동 거간 강 모 씨는 ‘허준(許浚)’이라 기명 된 간찰(簡札) 1점을 내게 가져왔다. 그가 고려대의 김상엽 총장의 소장품이라고 하여 거액에 매입하였다.입수 후에 나는 허준이란 이름을 쓴 동명이인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허씨대종회’를
거울자유를 도살한 자는 이렇게 됐다. ○.... 여기 왕시에 영화를 자랑하고 민중의 머리 위에 군림하였던 민주주의 반역도배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 권세에 아부하고 권력을 마구 휘둘러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질식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던 원흉들... 서슬이 시퍼렇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도살하는데 남다른 위훈을 남긴 자들이 「혁명법정」에서 심판받기 위해 끌려나오고 있는 것이다.○.... 자유당 천하에서 이독재 정권의 중추를 이루었던 당시의 「브레인⋅트러스트」들... 오늘은 한낱 죄인의 몸으로 쓰디쓴 반역도배의 「오랏줄」에 묶인 이들을 우리는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7월의 근현대사적지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입니다. 7월의 근현대사적지 캠페인은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도 함께 합니다. / 필자주혜화동 로터리,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혜화동 로터리' 버스정류장은 '여운형 활동 터'라는 이름이 병기되어 있는 정류장이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서울시가 유명 독립운동가의 활동 터 근처 버스정류장을 정비할 때 14곳 중 한 곳으로 포함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