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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월하독작(月下獨酌) - 이백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앉아, 친구할 사람도 없이 혼자 마시네, 잔을 들어 밝은 달에게 권했더니, 그림자까지 이제 셋이 되었다네. 저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도 내 뒤만 따라다니나, 잠시 그대들을 벗 삼아, 봄밤을 즐기지 않을 수 없으리. 내가 노래를 하면, 달은 서성거리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0.1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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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서풍(西風)앞에서 - 황지우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 나도 한 때 소위 ‘운동권’에 있었다. 흰 머리 성성한 재야인사들을 볼 때면 가슴이 불타올랐다. 부도덕한 정치 세력에 맞서 우리는 ‘도덕군자’를 내세워 싸웠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0.0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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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대추 따는 노래 - 이달 이웃 집 꼬마가 대추 따러 왔는데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를 쫓는구나. 꼬마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에는 살지도 못할 걸요.” 설총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좌우명을 아버지 원효대사에게 부탁드리자 원효대사는 아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 설총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9.2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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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 황인숙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나이가 드니 가끔 옛 친구들이 소식을 전한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어떤 친구들이 무슨 종교에 빠졌다는 말을 들으면 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9.2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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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신수 대사의 게송 몸은 깨달음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 늘 깨끗하게 털고 닦아서 먼지에 더럽히지 않도록 하리 여고 3학년 아이가 ‘내면 아이’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자신 안의 ‘내면 아이’가 매일 운다고 한다. 그래서 조용한 곳을 찾아가 요양도 하고 명상 센터도 다닌다고 한다. 중국의 선종 5대 홍인 대사는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9.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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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한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세상을 멀찍이서 바라본다. 세상 속으로 뛰어 들지 않는다(못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9.0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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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박물관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 홍조 띤 뺨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진열장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8.3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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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그러나 나는 - 김남주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쿠질한다는 금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곳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과 함께 있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8.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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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우울氏의 一日 8 - 함민복 저 잘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아, 반성하는 자 고통으로 가득 찬 날들 차라리 지옥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주 오래 전에 초등학교 3학년이던 막내 아이가 일기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뭐라고 한참을 쓰는 듯 하더니 골똘히 명상에 잠겨 있다. ‘무슨 생각을 저리도 깊이 하나?’ 하고 일기장을 들여다봤더니 ‘반성란’에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8.1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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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말들이 마음에 길을 낸다 - 정영선 징그럽다, 혹은 간지럽다라는 언어가 없는 나무의 나라, 그 나라의 가지 위를 노래기 한 마리 열심히 기어간다 1,000 개의 발을 첫발이 하면 다음 발이 받아 고물고물 기어간다 1,000 번째의 발이 움직여 그 몸길이만큼 나간다 그 발 밑의 나뭇가지는 간질간질, 근질근질해서 재채기라도 크게 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8.10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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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다. 생명체의 생존 법칙은 ‘약육강식’이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8.03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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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그만큼 행복한 날이 - 심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 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돌아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내 또래들을 보면 수십억의 자산가들이 흔하다. 내가 속하는 세대가 한창 일할 때는 은행 이자가 연 10%를 넘을 때도 있었고 집값 땅값은 하루가 다르게 하늘로 치솟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7.2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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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조국(祖 國)- 신동엽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꿋한 설악(雪岳)처럼 하늘을 보며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7.2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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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감각 - 랭보 검푸른 빛으로 짙어가는 여름의 해질녘, 보리까라기 쿡쿡 찔러대는 오솔길로 걸어가며 잔풀을 내리 밟으면, 꿈꾸던 나도 발밑에 그 신선함 느끼겠지. 바람은 나의 얼굴을 스쳐 가리라. 아, 말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래도 한없는 사랑은 영혼에서 솟아나리니 나는 이제 떠나리라. 방랑객처럼 연인을 데리고 가듯 행복에 겨워,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7.13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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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죽음 - 무라노 시로오 줄곧 쫓기고 쫓겨왔다 발톱도 찢기고 눈물도 마르고 하늘과 숲이 멀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주검이 쓸쓸한 가시덤불 속에 뒹굴고 있다 드디어 누군가가 다가왔다 사랑과 공포의 표정으로 피에 젖은 짐승을 살짝 확인하러 온 사냥꾼처럼 넋이 나를 찾으러 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사형 선고를 묵묵히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7.0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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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매우 가벼운 담론 - 조말선 한 쌍의 질문을 새장 속에 가둔다. 시금치를 먹고 크는 질문 한 쌍. 멸치를 먹고 크는 질문 한 쌍. 모이를 줄 때마다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우리는 언제 날 수 있죠? 언제 대답이 되죠? 새장은 날마다 작아지고 있다. 질문은 구슬프게 노래 부른다. 질문의 깃 속에 질문을 파묻고 잠든다. 질문들은 성숙해진다. 질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6.29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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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고마움 - 임길택 이따금 집 떠나 밥 사먹을 때 밥상 앞에 두곤 주인 다시 쳐다봐요. 날 위해 이처럼 차려 주시나 고마운 마음에 남김없이 먹고서 빈 그릇들 가득 마음 담아 두어요. 가끔 어디 낯선 곳에 가서 혼자 밥을 사 먹을 때가 있다. 그때는 일부러 이 식당 저 식당 기웃거리며 다닌다. 한 상 그득하게 차려나오는 그 기쁨을 만끽하기 가장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6.22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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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산에서 보는 달 - 왕양명산이 가깝고 달이 먼지라 달이 작게 느껴져사람들은 산이 달보다 크다 말하네만일 하늘처럼 큰 눈 가진 이가 있다면산이 작고 달이 더 큰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어느 원시 부족의 부족장은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자신의 집을 불태우고 보석들을 마구 바다에 집어 던져버리며 자신의 위신을 증명한다고 한다. ‘나는 소중한 것들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6.1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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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문구멍 - 신현득 빠꼼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어린 시절엔 시간이 참으로 길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서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아서 그렇다. 아이는 키가 크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그만큼 높아진다. 아이는 그때마다 다른 세상을 본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순간 감탄하면서 산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6.0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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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 - 프로스트 친구가 길에서 나를 부르며 말의 고삐를 늦출 때 못다 간 언덕을 둘러보며 그 자리에 선 채로 ‘웬일인가’하고 소리쳐 묻지는 않는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있으니까 부드러운 땅에 날을 위로 세워 오 척 길이의 괭이를 꽂아 두고 터벅터벅 돌담 쪽으로 올라간다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06.01 0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