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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들의 글(1) / 강동근, 고광인, 김동기, 김석형
2000년 09월 17일 (일) 18:46:00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사망신고로 무적자 강동근씨
[인터뷰]`북에 가면 통일공부 하고 싶다` - 고광인
비전향장기수 남한 생활 담은 수필집 펴내 - 김동기
[소망99] 비전향장기수 김석형씨 "북 가족 만났으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사망신고로 무적자 강동근씨

`외세 의한 분단 분통`
10대때 야학 다니며 항일투쟁, 빨치산 시절 총상으로 팔 잃어
4.19때 출소... 75년에 재수감, 출소뒤엔 양로원서 10여년

"분단된 상황속에서 남한에선 할 말이 없어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오른쪽 팔을 잃고 체포돼 37년을 감방에서 보낸 강동근(85)씨.이미 남한에서는 사망신고가 돼있어 무적자인 그는 언론과의 접촉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음주면 북으로 가게되지만 감옥을 나온 뒤에도 집요하게 따라붙었던 "기관"의 감시라는 굴레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감호소를 나온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양로원에서 11년을 생활하면서 "조금 더 큰 감옥으로 옮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24일 오전 지인이 마련한 점심식사 자리를 위해 기거하던 양로원에서 외출하면서도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며 남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북송이 결정되던 날에도 "북으로 갈 수 있다고 기뻐할 일 아니요. 오히려 분통 터지는 일이요"라며 분단 현실을 가져온 외세에 강한 비판을 제기할 땐 목소리를 높였다.

191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때 진주야학을 다니면서 항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함께 싸우던 대부분의 동지들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를 피해 지난34년 중국 심양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지난45년부터 49년까지는 중국공산당 인민군으로 활동했고 49년엔 북한 6사단으로 넘어와 이듬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인민군 상위로 후방부대 책임자로 활동했던 강씨는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다 퇴로가 막혀 지리산에 입산했다.52년 동계 공세때 빨치산으로 싸우다 총탄에 오른쪽 팔을 잃고 체포됐다.

미결수로 4년간 광주교도소에 있던 중 지난57년 무기형을 선고받고 공주교도소에 이감됐다.4.19 때 20년으로 감형받아 만기출소했지만 곧바로 75년 사회안전법에 의해 청주감호소에 재수감돼 89년 10월11일 마침내 출소했다. 출소 뒤엔 북구 화명동의 정화양로원으로 옮겨져 11년을 보냈다.

그는 주민등록증도 호적도 없이 이미 사망신고가 돼 있다."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눈총에 견디지 못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사망신고를 내고 호적에서 지웠기 때문이다. 아들은 강씨가 출소하기전 세상을 떠났고 며느리는 중풍으로 몸져누워있는 상태다.

오랜 수감생활로 얻은 위장병과 고혈압으로 인해 매달 한번씩 동아대병원에 들러는 길에 간간이 며느리를 찾아보긴 했다고 한다.
잃어버린 팔, 잃어버린 호적, 잃어버린 가족.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가 치뤄야 했던 대가는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3일 부경총련의 장기수송환축하행사에서 그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단결하라".

통일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와 삶에는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부산일보 2000/08/26)



[인터뷰]`북에 가면 통일공부 하고 싶다` - 고광인

내달 2일 북송될 예정인 비전향장기수 중에서 전북지역에 거주하는 고광인(66세) 선생을 만나봤다. 선생은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서 3남2녀중 맏이로 태어났고 현재 90세의 부친을 비롯 형제들이 모두 남한에 살고 있다. 가족을 두고도 북한에 가려 하는 그의 사연을 들어봤다.

`평화와인권`이 만나본 북송대상 비전향자 고광인 선생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 그게 바로 효도야."

다음달이면 북한으로 가게 될 비전향장기수 고광인 선생은 올해로 90세인 고령의 아버지를 남겨두고 왜 북으로 가려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선생은 지난 50년간 남한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징그럽고도 징그러워`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선생은 고창중학교 3학년 그의 나이 열아홉에 빨치산이 되었다. 그해가 53년.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토벌대와의 전투속에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빨치산으로 지냈던 3년은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이다. 오늘날까지 그를 지탱해준 사상과 신념을 만들어준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동지의 배신으로 발각되어 잡힌 56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34년간의 죽음보다 더한 참혹한 감옥생활이었다. 5·60년대엔 굶주림으로, 70년대엔 전향공작으로 매순간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감옥 안에서 침술을 배운다. 철사 끝을 뾰족하게 갈아 자신의 몸에 직접 시험해보면서 독학으로 배운 침술이 이제는 허준이라 불리게 할만큼 용하다.

"언제나 노동자로 살고 싶었다"

89년 서준식씨의 51일간의 단식으로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자 원래의 형량인 20년에 14년의 곱징역을 살고 나오게 된 선생은 `아파트 수위자리를 주겠다`는 경찰들의 `호의`를 거부하고 노동자로 살고자 서울로 올라온다. 네온사인 공장, 플라스틱 공장 등에서 일하다 부상까지 입게 되지만 월급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선생은 6년간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95년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40여년만에 돌아왔지만 고향사람들은 여전히 `빨갱이`에 대해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 경계어린 시선속에 묵묵히 지은 5년 농사 끝에 선생에게 남은 건 850만원의 농협 빚이다.

선생은 50년 전 빨치산 때와 마찬가지로 소금물에 밥말아먹는 것이 식사의 전부이다. 이런 식단이고 보니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는다.

50년 전 노동당에 가입했던 선생은 이번 북송을 "당에서 부르는데 가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옷가지와 남한 땅의 흙 등 벌써부터 북에 가져갈 짐을 꾸리고 있는 선생은 북에 가면 무얼하고 싶냐는 질문에 "통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수줍게 말한다.

선생은 이제 그 자신의 말 그대로 `징허고도 징헌` 남한에서의 삶을 접고 북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어쩌면 그에게 북송은 고통만 안겨줬던 남한에서의 삶에 대한 보상인 듯 싶기도 하다. 북에서의 삶이 고통으로 일관된 지난날에 대한 위안이 될 수 있길 기원한다.
(동아닷컴 2000/08/01)


비전향장기수 남한 생활 담은 수필집 펴내 - 김동기

6.15 남북 정상회담 선언에 따라 올해 북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한 비전향장기수가 지난 33년간의 감옥생활과 출소후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수필집을 펴냈다.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으로 현재 광주 북구 두암동 `통일의 집`에서 다른 비전향장기수 3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김동기(金東起.68)씨의 수필집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아침이슬)`가 2일 출간됐다.

총 2백40여쪽 분량의 이 책에서 그는 지난 66년 대남공작 요원으로 활동하다 검거돼 지난해 2월 석방될 때까지의 수감생활과 출소후 남한생활 1년 6개월간의 느낌을 4부로 나눠 62편의 글로 엮어 놓았다.

김씨는 책 앞 표지에 광주교도소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모습을, 뒤 표지에는 어릴적 고향집에 있었던 진달래 항아리를 손수 삽회로 그려 넣었다.

책 제목은 지난 98년 비전향 장기수를 모델로 해 극단 `토박이`가 공연한 연극제목이기도 한데 그는 "원제목의 `깃털`을 `깃`으로 바꿔 달았다"며 "책 쓰기는 출감 직후 결심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향에 돌아간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할 뿐"이라며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모든 분들께 이 책을 바친다"고 말했다.

한편 김씨의 부인(64)과 아들(36)은 현재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합뉴스 2000/08/03)


[소망99] 비전향장기수 김석형씨 "북 가족 만났으면"

또 한해를 맞았다. 또 한살이 늘어났다. 북한의 고향 땅은 금방 찍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만남의 집`에 모여 사는 비전향 장기수 출신 9명 가운데 한명인 김석형(85)씨.

“내 고향은 청천강과 대령강이 만나는 삼각주 평야지대인 평안남도 박천인데…. 지금도 그 들판과 초갓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아.” 김씨는“딱 40년 전 마지막으로 본 세살배기 막내의 눈망울이 아직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김씨와 이종(88)씨, 최남규(87)씨는 80살이 넘었다. 최씨는 치매로 거동조차 못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것은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들 세 사람은 지난해 북한주민 접촉승인 신청을 냈다. "평화통일이 되면 함께 고향에 가자"는 약속을 잠시 접은 것이다.

함께 살던 금재성씨가 79살 나이에 죽음을 맞은 것을 보고 하루가 급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이들은 북한주민 접촉승인이 나면 적어도 가족들의 생사확인과 편지교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접촉승인을 받아도 북한에 있는 가족의 주소와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옌벤 등의 `중개업자`한테 1천만원이 넘는 거금을 주어야 한다는 말을 통일원 당국자한테 들었다.

최고령인 이종씨는 “북한주민 접촉을 주선한다기에 남북대화가 잘 돼 소재확인 등 남북교류가 이뤄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김씨 등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혈통과 언어, 문화가 꼭같은 민족은 하나가 되는 게 필연”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야 고향을 보고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꿈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올해는 남과 북 모두 적극적으로 나서 평화롭게 통일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만남의 집` 사람들한테는 또다른 바람이 있다. 예전에 석방기준이었던 70살이 넘었는데도 지난해 8·15 특사 때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오지 못한 최선묵(71)씨를 만나는 것이다.

만남의 집 사람들은 “준법서약서 제도가 없어져 아직도 감옥에 있는 그들과 함께 사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한겨레 200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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