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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십자가를 지고 왕청 골고다 언덕을 걸어가는 이 사람을 보라!
김상일 교수의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⑦
2007년 11월 09일 (금) 15:06:11 김상일 tongil@tongilnews.com
김상일(한신대 전 교수, Korea Project Director, Claremont Center for Process Studies)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민생단 사건을 두고 “상처 받은 민족주의 wounded nationalism”라고 했다. 이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기도 하다. 논문의 부제는 ‘민생단 사건과 동만의 김일성’이다. 아마도 민생단을 주제로 영문으로 나온(1999년 미 워싱턴대학) 최초의 논문인 줄로 안다. 단행본으로는 연변대 김성호교수의 『1930년대 연변 민생단사건 연구』외에 수권이 있다. 김 교수는 1998년 국내에서 이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나는 김성호 교수를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지금 김일성의 항일 유격 활동에 관한 저술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작년에는 한국 학자들과 함께 김일성 항일 유격지 현지답사를 15일간 하였다고 한다. 내가 김 교수를 만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회고록에 쓰인 김일성 주석의 민생단 기록 내용이 얼마나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가짜 김일성론에 하도 세뇌돼(?) 온 궁금증의 발로였을 것이다.

김 교수의 대답은 대부분의 내용이 사실과 같다고 했다. 약간의 다른 점이 있다면 수치상의 차이일 뿐 사건 자체의 기록 내용은 사실 그대로 회고록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곁들여 유격대원들의 어려웠던 참상들을 증언해 주기도 했다. 한 대원은 총상에 창자가 흘러나오자 자기 손으로 움켜쥐면서 끝까지 총을 쏘았다고 한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들을 물리친 북의 선원들의 용기가 과연 우연만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김성호 교수는 “9.18사변은 조선 민족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김성호 47쪽)을 야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작용을 알랭 바디우는 ‘사건적 evental’이라고 했다. 주체가 객체의 한 부분이 되고 객체가 주체의 한 부분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사건적 상황을 두고 이강훈은 “나는 10년 간 삭북의 황야에서 내 나름대로 동분서주하다가 9.18 사변을 계기로 발붙일 곳조차 없게 되고 수많은 혁명 동지들은 사면초가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김성호 47쪽)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견디어 내지 못한 조선족은 9.18이란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시작한다. 김일성 사령은 이에 대하여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 자기희생과 보신을 가르는 착잡한 분해 과정이 9.18의 포성과 함께 민족 내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각자가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양극에도 가 붙고 음극에도 가 붙었다. 만주사변은 민족의 매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하나의 시금석과 같은 작용을 하였다”(2권 224쪽)고 쓰고 있다. 일본의 영악한 위장 기발은 그 효과를 백분 내기에 충분하였다.

9.18 이후 일본 측의 자체 평가에 의하면 “친중파는 공황에 빠져들었고, 민족파는 유야무야 속수무책 낭패하였으며, 친일파는 과연 일본은 위대하다 찬양했으며, 그중 중공당 계열 만이 무장 대오를 창건하였다”와 같다. 이미 일본의 이러한 영악스러움에 김일성 사령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9.18 사변을 조작한 단 8일 만인 9월 26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조병상과 박석윤 이 두 인물이 민생단 건설 작업에 직접 나선다.

이들은 40만 조선족 인구가 살고 있는 간도 땅에 ‘민족 자유 천지’나 ‘간도 독립’이란 명칭을 사용한 단체를 하나 만들려고 일본 총영사관에 신청을 했으나 총영사관은 전자는 일본 정부로부터 ‘민족 독립’이란 오해를, 후자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오해를 받을 이유가 있다고 하여 거부한다. 두 이름 모두가 민족 모순과 관련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과 중국 모두로부터 반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영사관의 판단이었다. 박이나 조는 일말의 민족정신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민족이 아무리 훌륭한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일본의 재가를 받고서야 가능한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다음 차선으로 구상한 것이 중국 관헌의 조선인 차별 대우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중운동 역시 중국 당국은 민족문제로 볼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를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 민중운동에 막상 나서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민족운동도 민중운동도 거부한 일제는 매의 발톱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만 조선 친일파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아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간취한 일제는 “간도에 있는 조선 사람들의 자각을 촉진하고 자위상 서로 단결하며 산업인으로서의 생존권 확보” 즉, 요약하여 ‘민생단 民生團’이란 단체 조직에 박차를 가한다.

친일조직 단체 조선인민회는 일제의 속셈을 빠르게 간파하고 이에 적극 부응하여 민생단 건설에 일사천리. 당장 그 해 9월 20일 밤 10시 용정 국자가에 있는 일본인 보통학교와 민회에 방화 放火를 한다. 다시 한 번 자기들이 피해자라는 위장 깃발을 흔들기 위해서이다. 이는 구국단 민회 회장 이강재와 구국단 단장 김택환이 공모해 일본군의 간도 출병을 유도하기 위해 저지른 조작이다. 이렇게 조선족 친일파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의 이간질에 앞 장 섰으며 일병의 간도 진출이야 말로 자기들이 학수고대하던 바였다고 떠벌린다.

드디어 10월 7일 조병상, 박석윤, 이강재 등 8인이 발기인 대표로 재간도 일본제국 총령사관에 민생단 조직 결성 허가 신청서를 낸다. 신청서의 내용은 재간도 40만 조선인들의 “활로는 오직 인류의 기본권인 자유, 자주, 자율만이 있을 뿐. 여기에 자유 락토를 건설하여야 한다. 오직 생활의 산업화만이 유일한 활로이다”는 것으로, 여기서 민족 독립이나 간도 독립 같은 말은 사라지고 ‘생활 사업화’가 설립 목적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은 이 신청서를 반려한다. 그러자 조와 박은 그해 10월 서울로 돌아가 총독부의 설득 작업에 들어간다. 총독부는 “간도에 있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안전시키고 나날이 향상되게 한다”라는 명분으로 민생단 조직 설립을 허가 한다.

10월 24일 다시 조와 박은 간도로 돌아와 제 단체들의 협조를 구한다. 위 6회에서 소개한 4개 단체들(조선인민회, 중공당, 자진 촉진회,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이 이에 대하여 보이는 태도는 각각이다. 민족파는 합류하나 공산파는 탈퇴한다. 여기서부터 공산파에 의한 반민생단 사건은 싹이 트기 시작한다. 자진촉진회는 친중. 반일. 반공에서 친일. 반중. 반공으로 민족파는 자진 흡수되어 소멸하는 등 실로 걷잡을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

12월 24일 일본 영사관의 최종 허가는 “조선인들의 생활 안전과 산업진흥을 획책”한다는 명분으로 민생단 건설의 최종 인허가 내려진다.(김성호 55쪽) 12월 28일 발기 준비위를 소집하여 참가자 64명 중 11명을 대표로 선출한다. 놀라운 것은 국내의 박영호, 최남선, 윤치호, 송지우 등 90여 명이 이 민생단 건설에 대찬성의 축하를 보냈다는 점이다. 이렇게도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가 알기란 어려운가?

이 민생단은 간휘 4개 성 즉 길림, 왕청, 화룡, 훈춘 성에 거주하는 20세 이상 남자들만 참가가 허락되는 제한된 단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해를 넘겨 1932년 1월 7일 발기 준비위 구성, 2월 9일 오전 10시 용정 공회당에서 발기인 총회를 연다. 전성호의 사회, 이인구의 개회사, 그리고 947명의 발기인 명단이 발표되었다. 일사천리로 같은 날 3시 반 일본 총영사관의 참석하의 창립대회가 열렸으며 박석윤은 “그 동안 지나 측의 불법행위에 억눌려 눈물을 삼키며 살아 왔는데 이제 부터는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되어 감게 무량하다”고 인사말을 한다. 민생단의 단장은 유보하고 부단장에 한상우를 선출한다. 당시 ‘간도신보’의 보도에 의하면 ‘40만 동포의 생활 확보를 기하는 민생단’, ‘산업의 자유자치의 대기를 추켜든 민생단’이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매일신보’는 ‘각개 단체를 총망라한’ 조선 사람의 자위 자립단체라고 평하고 있다(김성호 62쪽)

창립을 하고 같은 날 밤 8시-12시 사이에 제 1차 민생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 첫 회의에서는 소금 문제와 세금 문제가 토론되었다. 이렇게 142일 동안의 진통 끝에 민생단이 탄생하였다. 이 신생아 민생단은 불과 탄생한지 5개월만(1932년 2월 15일에서 1932년 7월 14일까지)에 해체되었지만 우리 조선족 공동체에 끼친 영향은 실로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족 사회는 친일과 반일로 양분되었으며 민생단 창단을 지켜보고 있던 중국 당국 특히 중공당은 당장이라도 민생단을 단칼에 베어 버릴 자세였다. 중공당은 민생단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았고, 국민당 계열(장개석 계열)에서는 조선족의 자주와 간도 영유권과 관계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국의 좌우가 하나가 되어 조선족을 적대시 하게 만든 사건이 민생단 이었으며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일제는 민생단 건설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제부터 중국으로부터 오는 모든 화살을 조선의 좌우가 모두 받아 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런 민생단 건설에 국내의 저명한 인사들마저 찬성을 하고 나왔다니 이렇게도 일본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할 만큼 우리는 어리석었단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민생단 설립 이후 도리어 조선족의 자치와 자율 그리고 생활의 안전은 간 곳이 없이 사라지고, 즉각 공산당 극좌 좌경들은 ‘반 反 민생단’ 활동을 전개하여 민생단에 관계되었다고 혐의가 조금만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학살하는 실로 ‘만주판 홀로코스트’가 자행되었다. 아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대 학살극을 왕청 산하만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의 관심의 적이 된 적도 없었다.

요약하면 민생단은 창단 5개월 만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문제는 민생단이 해단 된 다음 전개된 반민생단 사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민생단이 친일 우익들이 조직한 것이라면 반민생단은 중공당을 중심으로 한 극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사건이다. 반민생단 사건을 일명 ‘숙반운동’이라 하며 김성도, 송일, 김권일 등이 앞장서 같은 조선 공산당원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죽인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조선 사람들 뿐. 주보증의 증언대로 무려 2000여명을 잡아 무차별 학살하였다. 나중에는 김성도 일행도 반민생단으로 몰려 처형 었으며 이들에 대하여 “다 좋은 사람들이었으나 주체를 세우지 못하고 상급에 맹종하다 본의 아닌 과오를 범했다”(2권-22쪽)고 김사령은 회고하고 있다.

우스운 것은 반민생단은 해단 이후 무려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김사령은 “민생단이 없는 반민생단 투쟁”(2-15)이라고 했다. 그것도 당이 있고 인민 정권이 수립된 간도의 유격구 안에서, 아니 같은 공상당이 공산당을 무리 죽임하는 일이 민생단 보다 반민생단이 6배나 긴 기간 동안 지속된, 그 근본적인 원인을 김 사령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모략에 있었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민생단은 사라져도 일제의 음모 자체는 유효하기 때문이다.

민생단은 하나의 ‘상황 situation’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반민생단은 상황이 아닌 ‘사건 event’이다. 사건이 상황과 다른 것은 후자는 주객의 구별이 분명한 경우이고, 전자는 그것의 구별이 불분명한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반민생단은 적의 적도 적이 되는 경우이다. 보통 정상의 경우는 적의 적은 동지이다. 그러나 사건은 주객이 구분 안 되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할 수 없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은 상황이지만, 반대로 개구리(황소)가 뱀을 잡아 먹으면 사건이 된다. 이는 철학자 바디우의 정의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민생단이란 상황을 교활하게 사건화시킨 것이다.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고 공산당이 공산당을 무리 죽임 하도록 모략한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이이제이’ 전술 전략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극좌 좌경들은 이 모략에 그대로 휘말려 든 것이다.

일제는 1934년 9월에는 투항자들을 일괄처리하기 위하여 귀순자의 배후관계, 위장귀순유무 확인, 세뇌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기관으로 ‘간도협조회’를 만들어 내었으며 여기에 민생단을 통합한다. 일제의 모략가들은 중국인 간부들이 조선인당원들을 신용하지 않고 부단히 감시하고 있으니 조선인당원들은 들고 일어나라고 조선 민족주의를 선동하고 조장하였다. 그래서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고 하였다.

만주 간도에서 중국인들 한테 설움 당하며 살고 있던 조선 사람들 가운데 누가 들어도 그럴싸한 감언이설임에 분명하다. “조선사람이 만주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해방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기를 쓰고 싸우는가, 왜 력량상 우세한 조선사람들이 중국사람들에게 메워 무의미한 싸움에서 피를 흘리는가, 빨리 각성하라, 투항귀순의 길은 열려 있다,… 이러한 사상을 열심히 주입시키는 것을 민생단 사상모략공작의 주요한 선전요령으로 삼았다”(2-16).

일제는 민생단을 10명씩 조직하여 유격대 안에 들여보냈으나 다 붙잡혀 죽게 되니 더 이상 침투시킬 수 없게 되자 조선사람과 중국사람, 로동자와 농민, 상부와 하부간에 호상 믿지 못하게 하고 서로 이간시키는 전술을 써서 공산주의자들끼리 싸우게 하였다. “혁명 대렬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교란작전에서 일본의 모략가들이 발휘한 솜씨는 실로 놀랄만한것이였다. 그 술책 가운데는 이런 수법도 있었다. 가령 동만특위에서 어떤 간부가 지방에 순시를 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이 오가는 길에다 이전에 지도사업차로 그 지방을 왕래하던 현급간부나 구급간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땅에 떨어뜨리었다. 그러면 특위 순시원이 그 편지의 수신인들을 어떤 인간들로 보겠는가”.(2-17)

이런 비열한 짓까지 한 이유를 두고 형형색색의 일부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 야망 때문이라고 김 사령은 평가하고 있다. 좌경기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대렬 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독차지하고 상승일로의 길로 전진하고 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혁명투쟁을 자기들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는데 종속시키려고 하였다면 파벌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지와 묵인 속에서 종파적 목적달성에 장애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대오로부터 사정없이 제거하고 자파세력을 확대하는데 이 투쟁을 악용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차지하고 있는 방석을 가로타고 앉을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이 바로 민생단 이었다. “너는 민생단이니 자리를 내놓거나 죽어야겠다고 선언하면 다였다” 이런 판결에는 상소가 있을 수 없었으며 또 상소를 해 보았자 통하지 않았다. 일제가 유포시킨 민생단 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있는 자리를 모두 자파일색을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적이며 출세주의적인 욕구에 불을 붙여주는 인화물질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천정부지의 숙반(숙청) 실적은 유격구의 혁명 역량을 모조리 교살해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이득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결국은 적아가 합세하여 유격구를 마구 짓뭉개 놓은 셈이다. 이런 기괴한 결탁은 세계의 어느 혁명전쟁사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남한의 보수 우익들은 이런 극좌 좌경들을 김일성과 동일시하고 공산주의를 혐오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김일성 사령은 앰 엘파나 화요파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혐오했으며 그들과 싸운 것이 항일 유격활동 보다 더 어려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들 극단주의 공산당은 만주일대에서 5.30 폭동을 통해 신망을 잃어 가고 있던 상태였다. 5.30 폭동이란 극단 좌경들이 조금 만 땅이 있고 재산이 있어도 모조리 잡아 죽인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김 사령은 돈이 있고 없고의 여부를 가지고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한 번 사람 중심으로 보라는 것이다. 애국 애족 애민이 있으면 지주라도 한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돈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라는 구호를 제창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장울화, 김정부 같은 갑부들도 그를 도왔던 것이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화근이 되어 김 사령이 반민생단 사건에 걸리게 된다. 나는 주체 사상의 ‘사람 중심’ 사상이 여기서 유래한다고 본다. 바리세인들이 율법이란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거기에 올가미를 씌울 때에 예수는 사람 중심적으로 생각하여 안식을 어겨서라도 사람의 병부터 고쳐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는 이런 사람 중심 사상 때문에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된다. 반민생단을 주도한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자기가 처한 민족적 그리고 개인적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산주의 교리를 교조적으로 적용하여 같은 동족을 그렇게도 무참히 학살했던 것이다.

2004년 나는 만주 연길에서 문익환 목사님 방북 15주년 기념 대회를 북측 대표들과 치른 적이 있다. 우리 일행은 용정 일송정에 올랐다. 그런데 ‘선구자’ 비석의 비문은 모두 회로 덫칠되어 있었으며 ‘고향의 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연을 물어 보니 남한 친일청산 단체의 소행이라고 한다. 선구자 작사 작곡가 윤해영과 조두남이 친일행위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장 궁금한 것은 같이 간 북의 안경호, 김경남, 강결율 그리고 봉수교회 손 목사님들이 이런 행위에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그 분들의 의외의 대답은 북에서는 이미 인민대중에게 익숙해진 노래에 대해서는 이념과 사상의 여부를 떠나 그대로 부르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회고록을 읽으면서 이런 북의 태도가 김일성 사령이 민생단 사건에서 보여준 태도와 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쪽의 진보진영의 친일청산도 보수우익들의 반공도 모두 교조주의라는 점에선 같다고 본다. ‘친일 청산’ 모두 옳은 소리이지만 그것이 교조적이 될 때에는 반민생단 사건과 같은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70여 년 전 동만 땅에 있던 4개 단체가 모두 그 이름을 달리 하여 지금도 활약을, 그것도 맹활약을 하고 있지 않는가? 조선인민회 같은 친일 친미 하는 단체, ‘만주는 우리 땅’하는 민족주의 운동 단체, 극좌 마르크스 운동하는 중공당 같은 단체 등등.

서로 남의 방석 빼앗아 차지하기에 급급한 인사들. 그래서 통일운동 한다는 단체가 갈갈이 갈라지는 이 반복되는 역사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미일은 전 보다 더 교활한 수법으로 우리 남북 민족을 이간질하고 이에 자기 하나 안일에 눈이 어두운 무리들이 놀아나고 있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민생단 사건은 ‘먼 훗날의 어제 된 일’이다.

여기, 적의 적마저 적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자르고 자기마저 이 악순환의 고리 속에 몸을 던지며, ‘민생단’이란 십자가를 지고 훈춘 연길의 골고다 길을 걸어 왕청 법정에 우뚝 서 민족과 민생의 상처난 양 날개를 감싼 한 인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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