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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해방 전야(1)-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새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3)
2020년 05월 18일 (월) 09:40:34 임영태 ytlim20@hanmail.net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상갓집 개’ 신세의 식민지 민중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도 못한 신세”라는 말이 있다. ‘상갓집의 개’는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다. 사람이 죽은 상갓집에 얼씬 거리는 개는 이 사람 저 사람 발길에 채이기 일쑤다. 재수 없다는 말과 함께. 상갓집 개는 ‘불쌍하고 초라한 신세’의 대명사인 셈이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 민중의 처지가 그 보다 나을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에서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보니 자연의 봄조차 빼앗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 정도로 식민지 현실이 암울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화창한 봄 날씨조차도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것이 식민지 조선 민중의 삶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수탈해간 적이 없다.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거래가 있었을 뿐이다.’라거나 ‘일제 시기 조선에서 산업화, 근대화가 이뤄졌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다. 또 식민지 시대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생겨났고, 이는 해방 후 한국 사회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라고 하거나, 더 나아가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 근대화, 고도성장은 일제시기 근대화, 산업화, 교육인재 육성 등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의식구조는 아베식의 식민지 우월의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 2015년 3월 과거사 문제를 외면한 채 전후 아시아 경제성장에 일본이 공헌했다고 주장하는 아베를 비판하는 YTN 뉴스 장면.

일본제국주의의 끊임없는 팽창 정책

세계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강압적인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도 조선민중은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며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1919년 조선 민중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거대한 투쟁을 전개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크게 흔들어 놓았고, 지배 방식을 바꾸게 만들었다. 전 세계에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렸다.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우리 독립운동 내부에는 임시정부 수립과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수많은 독립군의 무장 투쟁에 기폭제가 되었다. 1920년대 조선 국내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운동과 청년·노동자·농민·여성운동이 크게 발전했고, 국외에서는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기점으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패권 경쟁과 식민지 시장 쟁탈전이 강화되면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더욱 악랄해졌고, 그에 따라 한국 민족해방운동에도 어려움이 닥쳐왔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만주를 침략하면서부터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만주 침략은 정치·군사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야욕이 발현된 것이었다. 동시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배타적인 블록 경제가 강화되었는데, 일제는 만주를 이른바 ‘엔화권’에 폭력적으로 편입한 것이었다. 

1929년 미국의 월가 주가 폭락을 신호로 흥청망청 호황을 누리던 1920년대의 세계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경쟁이 격화되면서 자기나라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외국 상품의 수입을 규제하고 자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폐쇄적인 경제정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폐쇄경제, 블록경제로 인해 선진국 중에서도 후진측에 속했던 일본의 타격이 가장 심했다. 세계 시장에서 주요 수출품이었던 일본의 생사(生絲)·견사(絹絲) 수출길이 막히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결국 만주침략은 대공황으로 인한 일본의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엔 경제권의 확대를 위한 군사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만주 침략 이후 한반도는 일제의 침략을 위한 후방 군수기지가 되었다. 일제는 만주 침략에서 끝나지 않고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중국 본토를 침략했다. 중일전쟁은 일제의 정치·군사적 팽창 정책에서 나온 것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엔화 경제권의 확대를 통해 자본의 초과이윤을 실현함으로써 경제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팽창과 침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1년 12월 7일에는 일제가 말레이시아 연방을 침략하며 전쟁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했다. 같은 날 미국 하와이 섬에 있는 진주만의 미군 해군기지가 일본 연합함대의 공습을 받았다. 함대에서 발진한 일본 공군기의 공습과 어뢰정 공격으로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해군 함정과 비행기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태평양 전쟁 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불리는 이 전쟁 역시 만주 침략과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이유와 동일했다. 

그렇지만 일제는 자신의 침략을 호도하기 위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다. 일제는 아시아인과 영미를 중심으로 한 서양인과의 대립 구도를 선전했다. 일찍이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를 주창하며 서구를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일본이 이제는 ‘귀축영미’(鬼畜英米: ‘귀신과 짐승처럼 잔인하고 무도한 영국과 미국’이라는 뜻)를 쫓아내자고 선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사진=민족문제연구소).
   
▲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점령지 지도. 붉은 색은 일본에 의해 점령된 지역이고, 노란색은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WORLD ATLAS AND GAZETTEER-Rand McNally&Company 발행. 사진=코베이 옥션)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의 민족해방전쟁

일제가 만주를 장악한 상태에서 일본열도와 식민지 조선·대만을 묶는 이른바 ‘엔화권’을 공고히 하면서 중국본토 침략이나 태평양 진출 등 급속한 팽창 정책을 지양했다면 일제의 패망은 더 늦어졌을는지 모른다. 세계 최강의 미국과의 직접 충돌, 초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소련과의 전쟁 등을 상당기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닌이 말한 이른바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본성상 그런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확보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자본의 초과이윤을 완전히 보장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을 요구하며, 그것이 멈추면 공황이라는 파국적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한 파국적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품수출과 자본 투자를 가능케 할 시장을 계속해서 확대해야 한다. 식민지의 무한정한 확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지구는 한정된 공간밖에 없다. 

19세기 중엽 이후 레닌이 말하는 ‘자본주의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하는 싸움에 돌입했고, 20세기 초반에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의 분할을 일차적으로 완료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 뒤진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유럽과 중동,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시아, 태평양 식민지까지 전쟁이 확대된 것이었다. 

유한한 지구의 영토와 무한정한 확대, 증식을 요구하는 자본의 속성이 충돌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분할 전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역시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재분할 요구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1차 대전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말 그대로 세계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2차 대전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으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독일과 소련이 맞붙은 유럽 동부전선, 중국과 일본이 맞붙은 중일전쟁, 미국과 일본이 맞붙은 태평양 전선이 가장 치열한 주 전선이었다. 

이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단지 제국주의 간의 패권전쟁을 넘어서 스탈린의 말처럼 독일·일본 등의 제국주의(자본주의)국가와 소련이라는 사회주의국가의 전쟁, 그리고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측과 일본·독일의 추축국 동맹 사이의 전쟁,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민중 사이의 민족해방전쟁 등 여러 측면이 얽혀 있었다. 우리민족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세력과 식민지 민중의 투쟁, 즉 조선민중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지도.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전쟁,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의 민족해방전쟁 등 여러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과 앞잡이가 된 사람들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위해 폭력적인 헌병 통치를 시행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조선 민중의 거족적인 독립투쟁 의지가 드러나자 일제의 통치방식은 더욱 교묘해졌다. 헌병경찰을 폐지했으나 경찰의 수는 늘어났고, 통치망은 더욱 촘촘하게 짜여졌다. 이와 함께 개량주의, 자치주의를 유포함으로써 독립의지를 약화시키고 친일세력을 조직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회유책을 썼다. 비타협적 독립운동에 대한 가차없는 탄압과 함께 기회주의 세력에 대한 포섭책을 동시에 폈던 것이 192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전략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패권경쟁이 격화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일제가 정치, 경제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 중국 본토, 동남아, 태평양 등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조선은 그 후방기지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만주를 침략하면서 조선 북부는 공업기지, 남부는 소비재 생산기지가 되었다.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전쟁을 확대하고 전황이 나빠지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당연히 조선인민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의 모든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했고, 조선인에게 철저한 일본의 신민이 되라고 요구했다. 소위 일본인과 조선인의 엄연한 차별대우, 조선인을 ‘신민’으로 대우해주지도 않으면서 물자탈취와 인력동원, 전쟁의 총알받이 등 이른바 ‘신민의 의무’만을 요구했다. 일제는 조선의 고유문화와 언어(우리말)를 버리고,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했다. 

   
▲ 일제 강점기의 ‘애국조례’ 모습(사진=민족문제연구소)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시기 한반도 민중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과연 조선의 독립은 가능할 것인가? 일제는 일본이 승승장구하며 ‘귀축영미(鬼畜英米)를 물리치고 있다’고 선전했으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제 말기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조선을 뒤덮었다.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다. 조선에 대한 억압이 심한만큼 일제의 식민지 지배 또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도 가까이 있다. 일제의 패망도 눈앞에 와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순리이자 당연한 역사의 흐름이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는 약동하는 봄을 위한 시련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일제의 패망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돌아보면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한치 앞을 못 보는 것이 사람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캄캄한 어둠만 보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있다. 해방 직전에도 그랬다. 광복의 그날을 위해 단호하게 결단하고 차분하게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다. 반대로 일본 제국주의가 영원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 속에서 민족 앞에 온갖 죄를 지은 사람들도 있었다. 주인으로 살기 위해 오랫동안 자신과 가족의 재산과 목숨을 다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고,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된 친일 반역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을 앞 둔 시점에서 특히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역사 앞에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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