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덫에 빠져 대화 문턱 못 넘어
<2011 송년특집 ②> 남북관계
2011-12-14 김치관 기자
|
천안함 덫에 빠져 대화 문턱 못 넘어
지난해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긴장이 극에 달했던 남북관계는 올해 들어 북측의 ‘대화공세’로 돌파구가 열릴 듯 했지만 ‘천안함’의 덫에 빠져 끝내 본격 대화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특히 지난 9월 통일부 장관에 류우익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취임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되살아났지만 역시 한계가 드러나면서 현 정부 하에서 의미있는 남북관계 진전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지난해 3.26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관계의 전면 중단을 선언한 이른바 ‘5.24조치’가 취해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고, 점차 남북관계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질 즈음에 11.23 연평도 포격전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한번 파국을 맞았다.
따라서 2011년은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5.24조치의 연장선상에서 남북관계가 단절된 채 긴장이 고조된 상태로 흘러갔다. 어떻게 보면 또 다른 군사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북 당국간에 올 1년간 아무런 대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남북 정상회담까지 추진된 사실도 확인됐다. 북측이 폭로한 5월 9일부터의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비밀접촉을 비롯해 물밑접촉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북측의 신년 대화공세와 고위급군사회담 무산
올해 남북간 접촉과 대화는 북측의 ‘신년 대화공세’로부터 시작됐다. 북측은 신년공동사설에서 “북남사이의 대결상태를 하루빨리 해소하여야 한다”면서 “대화와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시켜나가야 한다”고 올해 대남사업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에 입각해 북측은 예년보다 훨씬 빠른 1월 5일 정부.정당.단체의 연합회의를 열고 ‘연합성명’을 통해 “우리는 최악의 상태에 이른 북남관계를 풀기 위해 당국이든 민간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진보이든 보수이든 남조선당국을 포함한 정당, 단체들과 적극 대화하고 협상할 것”이라고 밝혔고, 이에 호응해 조평통을 비롯한 각종 대남기구와 단체들이 일제히 대화공세를 폈다.
그러나 남측 당국은 “북한의 연합성명은 2007년까지 연례적으로 나오던 것으로 통일전선전술 차원의 대남공세의 일환으로 보인다”며 “진정성 있는 남북대화 제의로 보지 않는다”고 일축했고, 남북간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 및 추가 도발 방지에 대한 확약’과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확인’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한 남북 당국간 만남을 역제의했다.
결국 2월 8,9일 남북 고위급군사회담 개최를 위한 군사 실무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지만 예상과 달리 천안함 사건에 대한 시각차만 확인하고 사실상 결렬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두 차례의 백두산 화산 관련 남북전문가 회의(3.29, 4.12)가 열리고, 동해 표기 관련 남북역사학자간 협의에 합의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대화의 불씨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이같은 대화 노력과 실패 와중에도 서해로 넘어온 북한 주민 31명 송환을 둘러싼 논란이나 농협 해킹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는 남측의 발표 등 남북간 악재는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김일성-김정일 부자 표적지 사건이 불거지면서 남북관계는 사실상 물건너 갔다.
북 국방위, 정상회담 위한 비밀접촉 원색적 폭로
북측 국방위 대변인은 5월 30일 “우리 군대와 인민은 리명박 역적패당과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6월 1일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 사실을 ‘돈봉투’까지 거론하며 이례적으로 낱낱이 까밝혔다.
특히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해 남측이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을 애걸했다고 폭로했으며, 6월 9일에는 국방위 정책국 대표가 녹음기록 공개를 위협하면서 ‘돈봉투’ 사건의 자세한 정황까지 묘사했다.
틀어진 남북관계는 금강산지구 내의 남측 재산 처분 협의와 대북 수해지원 제안 과정에서도 엇박자를 냈으며, 북측은 8월 22일 금강산 지구 내의 남측 재산들을 몰수하고 남측 인원들의 추방을 선언했다. 또한 수해지원 역시 북측의 호응을 끌어내지 못해 정부가 주문제작한 영양식을 공매 처분하는 절차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류우익 장관의 ‘유연성’과 ‘원칙’
남북관계가 사실상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9월 19일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대북정책의 ‘유연성’이 강조되고 자잘한 유연화 조치가 취해졌다.
류우익 장관은 10월 11일 개성공단 활성화 조치로 △중단된 공장건축 공사 재개 허용 △소방서와 응급의료시설 건립 △출퇴근 도로 보수공사 개시와 출퇴근 버스 확대 운영 등을 발표했고, 이어 10월 22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화채널 구축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이산상봉 적극 추진 △조건부 금강산관광 재개 회담 용의 표명 △만월대 발굴사업과 겨레말큰사전 사업 방북 승인 등을 발표했다.
이후 실제로 개성공단 도로 보수공사가 시작되고 소방서와 응급의료시설 건립을 위한 남북협력기금 집행이 의결됐는가 하면, 만월대 발굴사업과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위한 방북이 이루어졌고, 종교인들의 방북과 개성과 금강산 지역 경협업자들의 방북 등도 일부 허용됐다.
류 장관은 특히 통일부 장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미국(11.2~7)과 중국(11.21~23)을 방문해 ‘주변국 정지작업’을 하는가 하면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 현 정부와 성향이 다른 인사들과의 만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천안함.연평도 문제에 대한 북측의 책임있는 행동이 있기 전에는 ‘5.24조치’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어 류 장관의 ‘유연성’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6.15남측위는 물론 한국예총 등의 실무접촉을 위한 방북을 불허했고, 먼저 제안할 수 있다던 이산가족 상봉 제안에도 “북측이 수용할 분위기가 되느냐”며 머뭇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 부족이 근본 원인
결국 올해 남북관계는 남측 당국이 ‘5.24조치’의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천안함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연초부터 대화공세에 나섰던 북측은 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북미관계와 미중관계 역시 대화와 협력보다는 긴장과 지지부진을 면치 못해 외부 여건마저 남북대화를 강력히 촉진하는 요소가 되지는 못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ARF를 계기로 남북 외교당국자 간의 첫 비핵화 회담(7.22)이 열린데 이어 북미 양자회담이 가동됐고, 베이징에서 2차 남북 비핵화 회담(9.21)이 열렸지만 북핵문제 해결이나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북미회담 재개를 위한 징검다리에 머물고 말았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대북정책 주요 결정자들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출구 없는 5.24조치에 스스로 빠져든 것으로 보고 있다.
카터 대통령과 ‘디 엘더스’ 관계자들이 방북해(4.26~28) 북측의 남북 정상회담 메시지를 가져왔고, 김양건 북 아태위원장이 고 박용길 장로의 조문을 위해 개성에서 만나자는 제의(9.26)를 해오기도 했지만 현 정부는 철저히 외면했다.
남북관계 단절의 피해는 고스란히 남북경협업체들에게 돌아가 개성공단 일부 입주기업 외에는 대부분이 도산했거나 도산 위기에 몰리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고, 민간 교류단체들은 개점휴업 신세를 면치 못했다.
기대를 걸었던 류우익 장관의 ‘유연성’은 이미 한계에 부딪친 것으로 보이며, 천안함 문제를 우회할 수 있는 유연성은 현실적으로 해법을 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띠라서 남측에는 주요 양대선거가 예정돼 있고, 북측에는 강성대국 진입 원년의 거창한 일정이 서 있는 내년에, 설(구정) 계기 이산가족 상봉 성사 가능성 정도가 남북관계의 최대치가 아니겠느냐는 비관적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그나마 현 정부의 운신의 폭을 볼 때 대북 쌀 지원은 불가하므로 비료 지원을 남측이 ‘결단’하고 북측이 ‘수용’할 때라야 이산가족 상봉도 성사될 수 있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와 4월, 12월 양대선거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올해의 남북관계 단절이 어떤 위협요소로 다가올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것이 남북관계의 현실이다.
(추가, 0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