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안내, '대동강 건너, 요단강 건너 - 서용운 목사 순교 60주년 추모문집'
2010-10-29 통일뉴스
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 - 서용문 목사 순교 60주년 추모문집
지은이 : 서광선 서인선 서철선 서만선 홍경만
펴낸날 : 2010년 10월 23일
분 야 : 에세이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248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ISBN : 978-89-6447-127-2 03200
주요검색어 : 순교자/아버지/박해와 순교/추모 에세이/한국전쟁
요단강을 넘어 가나안 복지, 통일한국을 염원하며
올해는 6・25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순교 당한 기독교인들의 순교 60주년이기도 하다. 고 서용문 목사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탄압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건너갔고, 그후 해방을 맞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북한공산당에 맞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다가 남한과 UN군의 평양 수복 때 후퇴하는 북한군에 의해 총살로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아버님의 순교 60주년을 맞아 슬하의 5남매 중 남한에 피난 온 4남매가 추모문집을 엮었다. 유족을 대표한 맏아들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아버지의 순교 60주년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 되고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는 날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전쟁을 치룬 세대는 평화통일의 날을 맞이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대동강을 넘어 한강에 와서 60년의 세월을 살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평화통일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세가 건너지 못한 요단강 강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 책 제목을 [대동강 건너, 요단강을 바라보며]라고 붙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은 반공 목사인 아버지의 죽음을 다음세대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펴 낸 것이다. 그래서 서광선 박사는 머리말에 “이 책을 요단강 넘어 가나안 복지, 통일 한국을 바라보며 이를 위해서 노심초사 통일 운동과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라는 헌사를 붙였다.
순교자 서용문 목사는
1930년에 김경숙(1907-1943)과 결혼, 슬하에 서광선, 웅선(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인민군으로 강제징집 당해 행방불명됨), 인선, 철선, 만선의 4남 1녀를 두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하다가 불가피하게 교회를 사임하고 1938년 평북 만포진에서 식료품 잡화상 경영하였다. 그렇지만 목회에 대한 뜻을 버리지 못해 1939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성 쾌대모자 교회의 전도사로 조선족 선교의 길을 가게 되었다. 1941년 만주의 본계호시 전도사에 취임하고, 심양시에 소재한 봉천신학교에 편입학하였다. 그 와중에 1943년, 가난한 살림과 힘든 일에 지쳐 영양실조에 걸린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1944년 한진모(1910-1995) 전도사와 재혼하고 봉천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45년에 평북 강계로 귀국하여 예수교장로회 강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해부터 평북 후창교회, 평양 보령교회, 장포동교회 등지에서 시무하였는데 북한공산당의 무신론에 맞서 담대히 기독교 복음을 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서용문 목사는 초지일관 강경하게 북한공산당을 비판하여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나 피난을 종용하는 주변의 권고를 뿌리치고 평양에 남아 기독교 복음을 전하다가 같은 해 10월 평양 대동강 하류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살형으로 순교 당하였다.
지은이
장남 서광선(徐洸善) : 1931년 평북 강계 출생. 1956년 미국 유학.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밴더빌트 대학교대학원 철학박사. 1964년부터 1996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문리대학장, 교목실장, 대학원장 역임. 1980~1984년 정치교수로 해직. 예수교 장로회 목사 안수, 압구정동 현대교회 시무, 세계 YMCA 연맹 총재 역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콩 중문대학교 명예교수.
장녀 서인선(徐仁善) : 1936년 평북 초산 출생. 서울대학교 음대 성악과,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관악고, 경기여고 교사. 서울 여학생교육원 연구사, 서울 교원연수원 연구사. 서연 중, 연서 중 교감. 예수교 장로회 봉원교회 권사.
삼남 서철선(徐鐵善) : 1938년 평북 만포진에서 출생. 숭실대학교 중퇴. 한국장로교복지재단 애란원 직원. 예수교장로회 봉원교회 집사.
사남 서만선(徐滿善) : 1940년 만주 통화성 쾌대모자 출생. 숭실대학교 경영학과 졸. 조선호텔, 롯데호텔 이사 역임. 숭실대학교 총동창회장 역임. 현 북한전통음식연구소 상임고문. 예수교장로회 봉원교회 시무장로.
사위 홍경만(洪景萬) : 1934년 평북 구성군 서산면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교육학 석사), 숭실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신구대학 교수(1979-2002), 예수교 장로회 봉원교회 원로장로.
책 구성
이 책은 모두 네 개의 에세이와 논문 한편,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개의 에세이는 고 서용문 목사의 맏아들부터 막내아들까지 각자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회고와 피난 내려오면서 겪은 고초,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갔다. 마지막으로 유일한 사위인 홍경만 박사의 “박해와 순교”에 관한 추모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부록으로 소위 “88선언”으로 불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년)”을 담았다. 이 선언은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 총회에서 기립박수로 채택한 것으로 오재식, 강문규, 이삼열, 김용복, 박종화, 노정선, 민영진, 홍근수, 서광선 등이 공동 집필한 것이다. 서광선이 대표집필을 맡아 9인 위원들의 제안과 초안들을 종합한 이 선언은 “6·25 한국전쟁을 평양에서 겪고 아버지의 순교를 목도하면서 전쟁이 아니라 원수에 대한 용서, 화해와 평화 구축을 통하여 통일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순교자 아버지의 유지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독교 정신으로 문서 작성에 임하였음을 밝히고 싶다.”는 취지문대로 그 의미가 이 책의 출간과 맞닿아 게재하게 되었다.
차례
머리말 : 순교 60주년 회고록을 내면서 _서광선
순교자 서용문 목사 - “오직예수”의 신앙과 열정의 삶 _서광선
순교자의 딸 -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_서인선
아버지 없이 신앙으로 살아온 아들의 편지 _서철선
순교자의 아내, 어머니를 기리며 _서만선
박해와 순교 - 교회사학자 사위의 특별기고 _홍경만
부록 :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년)_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책 속으로
1950년 10월 평양 대동강 가에서 아버지 얼굴에 수 없이 박힌 총알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 다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아버지의 순교는 6·25한국전쟁의 비극입니다. 아버지의 순교 앞에서 “원수를 갚겠다.”는 분노와 함께, “전쟁은 안 된다.”는 전쟁에 대한 분노로 온 몸을 떨게 했습니다. 아버지의 순교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위기의식과 회심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원수에 대한 복수로 되풀이 할 수 없고, 용서와 화해의 생명의 길, 평화의 길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결단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의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로 다시 살아나는 신앙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6·25한국전쟁에서 죽어 간 남과 북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피난민들의 희생의 뜻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는데서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순교의 뜻은,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화해와 평화 만들기와 통일로 연결되어야 살아남습니다. 증오에서 동정으로, 복수에서 용서로, 적대감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싸움에서 화해로, 전쟁에서 평화로, 분단에서 통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혁명적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말한다면, 순교의 십자가, 민족의 분단의 십자가를 뛰어 넘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민족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 눈물을 거두고 순교자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서광선 글 중에서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1학년 입학하자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은 방과 후에 남아서 미술선생님이 특별지도를 하셨다. 나는 포스터를 잘 그린다고 남한의 김구, 이승만이를 북한 노동자 농민이 망치와 낫으로 머리나 목을 치면, 부산 앞 바다에 빠져 넘어지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님은 훌륭하신 분이신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릴 수가 없었다. 내가 만일 안 그리면 아버지를 호출 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구도를 잡고 대강 스케치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집에 가서 그림을 완성하여 내일 갖고 오라는 것이다. 나는 밤새 색칠하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림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찢어버렸다고 하시며 그냥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종일 벌을 서고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를 내무서에서 호출했다고 하신다. 아니 자녀 그림 하나 가지고 잡아가다니!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완성하지 못해서 내일 가지고 온다고 선생님께 틀림없이 말씀드렸는데... 북조선은 너무 싫었다. 나는 학교에서의 교육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교회에 항상 형사가 와서 설교 중 북한정치를 비난했다고 끌려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식의 사소한 일가지고... 선생님께 직접 그런 그림은 안 그리겠다고 거부했으면 차라리 내가 벌을 받든지 고문을 당하든지 할 것 아닌가하고 후회했다.
아버지는 안 돌아오셨다. 다음날 새벽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그냥 자리에 누워버린다.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서인선 글 중에서
어머니와 김봉화 집사님이 사선을 넘기 위해 인민군이 주둔한 곳을 답사하면서 인민군에게 “우린 남쪽에서 살다가 폭격이 심해서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내일 다시 이곳을 지나 다시 남쪽 고향으로 내려 갈 테니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어제 어머니와 김봉화 집사님이 인민군 주둔한 곳에 도착하여 어제 보내 준다고 해서 왔노라고 하자, 갑자기 인민군이 땅속에서 튀어 오르며 제가 들고 있던 놋그릇을 열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던지 그 기억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때 그 인민군이 놋그릇을 뒤집었다면 성경도 쏟아져 나왔을 테고 우리는 모두 총살감이었지요. 그 인민군은 놋그릇을 덮어 놓았던 삼천리표 연필들만 보고는 “다시 덮어,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우리 가족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떨리는 손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두 말 없이 앞을 향해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던 곳과 남쪽 치안대가 있는 곳 중간 정도를 지나칠 때 인민군의 총소리가 들려 왔고 남쪽 치안대에서도 총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서철선 글 중에서
장포동교회 교인 중 보안서원(경찰)이 있었는데 아버지께 급히 와 “목사님!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라고 언질을 주었고 교인들도 목사님 몸을 잠시만 피신하시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목사님은 인자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를 염려해줘서 고맙소. 그러나 나 혼자 살겠다고 피할 순 없소. 양들을 버리고 내 어찌 몸을 피해 숨거나 도망갈 수 있겠소. 모여 있는 사랑하는 교인 여러분! 참혹한 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날을 위해 기도하시오” 이런 말씀을 남기고 7월 어느 날 보안서원들에게 붙잡혀갔고 그 후 우리 식구들, 어머니와 누나, 철선 형과 함께 우리교회 교인이 살고 있는 평양 근교로 피난을 갔다 얼마 안 있어 평양 탈환을 한 직후에 우리는 장포동교회에 다시 돌아왔다.
보안서에 붙들려간 아버님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고 어디로 잡혀 갔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교인들은 서 목사님은 북으로 끌려갔거나 총살 당하셨을 것 이라고 하였다. 앉아서 아버지가 오시기를 기다릴 수만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체를 찾으려 큰형과 교인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했다. 길게 방공호를 파 놓은 곳에 많은 사람들을 쳐 넣고 그대로 사격을 해 죽임당한 이들도 있었고, 남산에 있는 탄광에 가보니 머리(얼굴)만 내 놓고 몸 전체를 땅에 파묻고 얼굴에 기름 부어 태워서 죽인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으나 자기 앞에 옷을 가지런히 개놓아 그 옷을 보고 누구인지 알고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곳에도 아버지는 안계셨다고 한다. 그렇게 찾기를 1주일이 넘었는데 어머니 꿈에 나타난 아버지가 대동강에 계셨다고 한다.
아침 일찍이 어머니와 큰형과 그리고 교인 한 두 명이 같이 대동강 하류 모래사장으로 달려가 뱃사공들이 건져낸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팔을 칭칭 묶은 시체들을 모래사장위에 즐비하게 늘어놓았는데 거기서 굵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12방의 총상을 입고 물속에서 뚱뚱불어 잘 알아 볼 수 없는 싸늘한 아버지의 시신을 마침내 찾아 내셨다. 곧바로 아버지 시신을 교회로 옮겨 교회 앞마당에서 교회 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남산 밑자락 양지바른 언덕에 조그마한 묘를 만들고 판때기로 비석을 세웠다. /서만선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