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장기수들의 글(6) / 최선묵, 최하종, 한장호, 한종호

2000-09-17     연합뉴스
"평화적 통일을 위해 전향하지 않았다" - 최선묵
북송 앞둔 출소장기수 최하종
북 여동생, 장기수 한장호씨 기다려
북송포기각서 강요받은 한종호


9월 2일 북으로 송환되는 비전향 장기수 최선묵 씨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끝끝내 전향하지 않았지"

1962년 남파됐다가 붙잡혀 38년간 교도소 생활을 해야만 했던 비전향 장기수 최선묵 씨(73·사진)는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남한의 비전향 장기수를 북으로 송환한다는 소식에 만감이 교차한다.

"야, 이제 가는구나"하면서도 불안감은 여전히 있었던 것. 8·15때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광경을 보면서 꽉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감격을 느낀 그는 38년간이나 참아왔던 눈물을 기어코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먼저 간 민중인사들의 명복을 빌었다. 평생을 한결같은 신념으로 비전향장기수라는 꼬리표를 단 그이지만 막상 송환된다는 소식에는 갈등부터 한 최선묵 씨.

대전에서의 1년 반 생활하는 동안 정이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 때문에 선택의 어려움을 많이도 겪었다.

하지만 "조국 통일의 물꼬가 이렇게 트이면 다시 만날 수 있는 희망이 있어 가기로 했어"라고 말하는 그는 "머지않아 곧 만날 수 있을 거야"며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수감시절 자신을 담당했던 대전교도소의 유한이 교도관이 직접 찾아와 축하한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며 고마워한다.

9월 2일 송환을 앞두고 그는 대전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는 다른 4명의 장기수들과 함께 한라산을 찾았다. 지난 8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의 한라산 일정은 남한에서의 마지막 가장 소중한 기억이다.

한라산 정상에 올라 북쪽을 향해 목이 터져라 조국통일 만세를 외쳤다는 그는 북에 가면 또 백두산에 올라 남쪽을 보면서 조국통일만세를 외칠 것이라 한다.

"한반도의 최남단인 한라산과 과거 우리 민족의 땅이었던 만주를 잇는 산인 백두산을 잇는 것이 곧 통일이 아니겠느냐"며 통일을 향한 신념을 내비친다.

그는 또 "끊긴 경의선도 연결되고 전화도 개통되고, 인적교류도 활발히 되니 곧 통일이 되겠지"라며 연신 밝은 표정을 잃지 않는다.

1962년 남파됐다가 꼬박 38년을 영어의 몸으로 보내고 지난해 2월 25일에서야 설날특사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동구 성남동에서 다른 출소자 2명(한장호, 김용수)과 함께 형제건강원을 운영해 왔다.

"감옥에서 나오니 가장 어려운 것이 생활의 안정 아니겠어? 처음 얼
마는 주변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생활했는데 영영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건강원을 차렸지"라며 지금의 집을 마련해준 나눔의 집 유낙준 신부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낀다고, 그 고마움을 조금씩이라도 갚아오듯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로 침을 놓아주고, 저렴하게 약을 다려주는 등 이웃사랑의 삶을 살아 온 그다.

38년간의 힘든 상황에서 왜 전향을 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오직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 전향한다는 것은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거야"라며, "주위의 동지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 믿음만은 놓지 않았다"고 의연히 말했다.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그가 9월 2일 돌아갈 북한에는 부인과 두 딸이 살고 있으며, 이번에 같이 가는 대전의 비전향 장기수들은 한장호(74), 함세환(69), 최수일(62), 김명수(79), 김용수(70) 등이다. (연합 2000/09/01)


북송 앞둔 출소장기수 최하종

40년만의 귀향길,“남쪽 은인들의 고마움 전하겠다”

6월 중순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 평양방문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마침내 남북정상의 공동선언이 발표되던 6월 15일 그 열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로써 반세기의 기나긴 세월 동안 반목과 긴장 속에 보내야만 했던 남북관계에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7천만 겨레의 조국통일에 대한 강렬한 지향을 세계에 과시했다는 점에서 2000년 6월 15일은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날 날이 되었다. 두 정상의 6 15 공동선언은 지난날 남북간의 합의문이 공약(空約)으로 끝난 것과는 달리 곧 실현단계로 들어갔다.

남북간에 서로를 비방하는 방송은 다음날 바로 중단됐다. 8 15 이산가족 방문절차가 착착 진행되고 있으며 경제협력방안 논의 또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남북간에 영원한 평행선상에서만 맴돌던 통일방안은 절묘한 접점을 찾아냄으로써 통일을 위한 위업의 행로에 밝은 전망이 제시됐다. 반세기 동안 끌어온 고질적 갈등관계가 짧은 2박3일 만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것이라고 그 누군들 예상했으랴. 오늘의 감격과 흥분이 이다지도 빨리 올 수 있다는 것을…

잠 못 이룬 정상회담 2박 3일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대국들이 자의로 강요한 분단은 겨레에게 헤아릴 수 없는 비애와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나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분단의 아픔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37세의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 36년을 복역하고 머리털과 수염이 허옇게 바래버린 73세 노인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남쪽에 내려와서 꼭 하루만에 잡히는 바람에 감옥에 들어갔는데 하룻밤 대가로 36년을 복역하다니 기가 찬 노릇이 아닌가. 인생의 꼭 절반씩을 감옥 안과 밖에서 산 셈이다. 출소 당시 나이가 많아 심신의 피폐는 극에 달해 있었다. 생계능력은 완전히 상실된, 말 그대로 폐인 상태에서 치열한 생활전선의 창해속에, 더욱이 IMF의 와중에 던져졌던 것이다.

36년 복역중 약 26년은 독거수(독방생활)로 살았으며, 그 중에서 약 10년간은 엄정 독거수였다. 책을 읽는 것도 엄격히 제한됐다. 책이란 책은 모두 회수되고 독서가 금지된 기간도 있었다.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사상전향을 거부한 데 대한 보복이었던 것이다.

행형법 시행령에 의하면 수형자의 독거수용 기간은 2년까지다.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는 6개월이었다.) 특별한 경우 1회에 한해 6개월을 연장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엄정독거’란 행형법 규정에조차 없는 것으로 그 어느 누구와도 대화나 인사를 나눌 수 없고 물품을 수수할 수도 없다. 모든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장기화하는 것은 잔혹행위로 규정받아야 마땅하다.

자연이 지구상의 생물에게 베풀어준 혜택은 따뜻한 햇볕, 신선한 공기, 맑은 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중 삼중으로 차단되어 직사광선은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어둡고 음습한 0.68평의 좁은 공간에서 추위와 더위, 항구적인 기아상태에 우린 내팽개쳐졌다. 도저히 생활이라 할 수 없는 생존의 한계 아래 놓여진 것이다. 거기에 폭언과 폭행은 자주, 그리고 쉽게 자행되었다. 우리들이 복역하는 전기간 동안 사상전향공작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특히 1973년 전향공작 전담반이 설치된 이후 4~5년간의 폭악은 필설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넘는다. 강력범수형자(깡패출신자)를 중심으로 특별폭행조를 편성해 조직적으로 폭력을 휘둘렀으며, 그 와중에 맞아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전향공작 전담반이 맹위를 떨치던 한때는 환자들에 대한 일체의 치료를 차단해버림으로써 중환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광주교도소의 경우 0.68평의 공간에 10~11명씩 수용한 채(앉을 수도 없는데 눕고 잠자는 것이 가능했겠는가)40여 일을 방치하기도 했다. 또한 교도소측은 엄동에 창문을 모조에 떼어버린 감방 바닥에다 흥건히 물을 뿌리고 팬티만 입힌 벌거숭이 상태에서 뒤로 수갑을 채워 며칠씩 방치해 항복을 받아내는 야수성도 발휘했다.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징역생활

이러한 것이 나의 반생을 점한 기나긴 징역생활 중에 겪은 악몽이다. 또 노구를 이끌고 옥문을 나섰을 때 갈곳도 없이 ‘오늘밤은 어디서 보내야 하나’고민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적막함과 처량함은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지만 남쪽사회에는 내가 감옥 안에서 보아온 포악한 군상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가까운 혈친까지도 신병인수를 꺼리고 주저하는 비전향수인 나를 성공회 송경룡 신부님이 기꺼이 인수해주었고, 수많은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줄지어 서서 온갖 정성을 다해 생활의 안정을 주었다. 그들 덕택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편없이 살게 된 것을 어떻게 다 보답할까. 그 밖에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천주교 장기수가족후원회, 감리교 고난모임 등에서 출소장기수들을 물심으로 보살펴 주었다. 광주, 대전, 대구, 부산 등지에 산재해 있는 장기수들 역시 지방원호 단체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평양정상회담 이후 송환문제가 일정에 오르게 됨으로써 세상의 주목이 더욱 집중되고 있는 비전향자기수는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6 25전쟁 전후 지하활동을 하다 입산한 뒤 유격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경우가 한 부류다. 이들은 장기복역 후 출소했다가 다시 1970년대 유신체제 하 사회안전법에 의한 감호처분으로 청주감호소에 수용되어야만 했고, 결국 1988년 사회안전법 폐지로 풀려날 수 있었다.

또 다른 경우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평화통일 운동일꾼’으로 북에서 내려왔다가 무기징역을 받고 각 교도소에서 복역중 1990년대 들어 하나둘씩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들이다. 아무튼 이들은 역사에 유례가 없는 초장기 복역, 그것도 상식을 초월한 잔혹한 처우 아래서 끝내 사상전향을 거부하며 어둡고 긴 터널을 헤쳐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총복역연수는 2천8백54년, 1인단 평균 복역연수는 31년이다. 출옥 후 이승을 떠난 사람은 모두 13명. 그리고 북송된 이인모 선생을 제외하면 현재 생존해 남쪽지역에 있는 이는 대약 85~86명쯤 될 것이다. 이중 최장기 복역자는 김선명 선생으로 놀랍게도 45년 복역했으며 이는 기네스 북에 오를 정도이다.

또 1960년대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교도소(혹은 감호소)특별사동에서 병사한 이는 약 70명(자살자11명, 피살자6명포함)으로 파악됐는데, 사망건수는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전반에 집중되어 있다. 대다수가 40대 중반에 사망한 것을 보면 자연수명 만료로 사망한 것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이 밖에 교수형, 총살형을 받아 사망한 수는 제대로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북도 남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분단과 동서냉전체제 형성 이후 우리민족에게 강요된 불행과 아픔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장기수들이 받아야했던 참혹한 희생도 분단과 냉전체제가 가져다 준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비참한 역사는 이제 더 이상 계속되어서도, 되풀이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여야만 한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우리 나라의 분단과 이후 사태에 대하여 중대한 책임이 있는 미국은 분단체제의 강화에 몰두해 왔고 이는 민족의 불행을 심화시켰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미국은 우리 나라가 통일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방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통일에 힘을 빌려줄 외세는 없다. 우리의 통일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룩해야만 한다.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만나 통일문제를 비롯한 현안문제를 토의했고 그 첫 번째로, 민족 자주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제 통일위업의 행로는 바른 길에 들어선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형집행정지로 출감한 것은 현 김대중대통령 취임을 기념한 1998년 3월13일이었다. 그때로부터 어언 2년 반이 지났다. 생소한 서울생활에 적응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마운 분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불편없이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목전에 두고 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직면하게 된 어려움은 부지기수였다. 그 중 한두 가지를 들어보면 아직도 우리에 대해 뿔이 달린 ‘빨갱이’,아예 상종대상이 아닌‘간첩’이라는 나쁜 인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허드렛 일을 하는 일터에서도 신분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으며 때로 형사들이 찾아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가장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은 남쪽사회가 북쪽의 제도나 실상에 대하여 너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와 계획경제는 경직되어 있고 위에서 내리 먹이는 관료주의 체제다, 근로자들은 물질적 자극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에 창의력이나 의욕을 보이지 않으며 무책임하며 태만하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지금 남쪽의 기업은 하나같이 말하지 않는가. 남북경제협력의 요체는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값싼 양질의 노동력의 결합이라고. 경직된 체제하에서의 무책임하고 나태한 노동자라고 말하지만 내심 질 높은 노동력을 지녔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북쪽사정을 잘 모르는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반공일변도의 사회적 풍토와 교육, 언론의 부추김을 생각하면 무리가 아닐 듯 하다. 지난달 2박3일간의 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여준 극진한 접대와 유머러스한 대화분위기, 활달분방한 몸가짐 등은 모든 사람들의 왜곡된 인식을 확 뒤집어놓은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남쪽사람들에게 유포시킨 허상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남쪽 은인들의 고마움 전하겠다.”

당국과 언론은 2박3일 동안 평양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놀라울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더러 그런 점이 없지 않겠지만, 그러나 정말 몰랐을까. 사실 고위당국자들은 이미 북의 실상을 알았을 것이다. 이제 오랜세월 동안 의도적으로 허상을 유포시켜 대중을 우롱한 사실을 솔직히 시인해도 되지 않을까.

통일의 첫 과제는 북쪽이든 남쪽이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북쪽의 현실을 그대로 알고 그에 익숙해지며 거기 살고 있는 형제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공연히 오해하고 의심하며 미워하기까지 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반통일 세력의 거짓장단에 춤춘 일이 혹시라도 있었다면 ‘이제그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7 4공동성명과 남북합의서가 발표되었을 때의 감격과 환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또 그 문서들이 단순한 종이조각으로 변해버릴 때의 좌절과 낭패감도 잊지 못한다. 문제는 성명, 합의문서의 채택이 아니라 현실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누누이 체험했다. 하지만 이번 두 분 정상의 공동선언은 신속히 실현단계에 들어갔다. 더불어 합의사항은 계속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두분 정상의 성실성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남북 7천만 겨레)는 공동선언의 위대한 구상이 실현되도록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적극 밀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남쪽 국방부장관은 “북쪽이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주적개념의 변경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그런 논의는 적절하지 않다”고 언명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방문 때 조선인민군 명예의장대를 사열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북쪽의 명확한 변화가 아닌가. 적이 아닌 동반자 관계로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한 달 반 남짓 후면 나는 오매불망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돌아가게 된다. 그 상면의 기쁨에 앞서 구속과 죽음을 각오하며 힘겹게 통일운동을 해왔던 남쪽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남겨둔 채 훌쩍 떠나버리기에는 통일을 위해 반생을 바친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들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북으로 돌아가면 남쪽에서 우리에게 후의를 베풀어주신 분들의 사연을 낱낱이 자식들에게 남기고, 북쪽동포들에게도 그 정성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분들에 대해 고마운 정을 끝까지 간직해 역사의 한 장으로 새겨놓겠다는 것은 나 개인만의 다짐은 아닐 것이다. (말/2000년 8월)


<북 여동생, 장기수 한장호씨 기다려>

오는 9월초 북한으로 가게되는 비전향장기수 한장호(78)씨의 여동생 한명희씨가 오빠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비전향장기수 한씨는 함경북도 나진 출신으로 지난 57년부터 95년까지 39년간 복역했으며 현재 대전 `사랑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여동생 명희씨는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2동 제14인민반에서 남편과 아들.딸 손자 등 여섯식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평양방송이 16일 보도했다.

평양방송에 따르면 명희씨는 최근 집을 찾은 평양방송 기자에게 자기 고향이 함경북도 나진이라며 "오라버니를 만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의 하루하루가 1년, 10년 맞잡이로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말 꿈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한씨의 북송)소식을 들을때부터 저는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지내고 있으며 금시 오라버니가 들어서는 것만 같다"고 오빠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밝혔다.

한씨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명희씨의 남편도 "빨리 만나고 싶은 심정을 억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씨의 조카인 이철원씨와 이선영씨는 "신념과 의지를 굳건히 지키고 돌아올 장한 외삼촌을 하루 빨리 만나고 싶다"며 아직 보지못한 외삼촌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도 그렇게 간절한 데 어머니 심정은 어떠하겠냐고 말했다.

이들은 어머니가 자신의 생일인 음력 4월 보름이면 외삼촌을 더욱 그리워 했다며 "밖에 나가 보름달을 보면서도 어머니는 너의 외삼촌도 저 달을 보고 있을지 모를 것이라고 말하며 외삼촌을 그리워했다"고 전했다.

명희씨는 지난 37년 여름 남매들이 찍은 사진을 평양방송 기자에게 보여주고 큰오빠는 한장원으로 장호씨와는 쌍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곳 형제들과 친척들은 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되자 형제, 조카, 사촌들이 모두 모여서 얼마나 기뻤했는지 모른다"며 "우리들은 오라버니 오실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오빠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연합 2000/8/10)


북송포기각서 강요받은 한종호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10일 북송포기 각서를 강요받았다고 보도한 비전향장기수 한종호(83.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씨 가족들은“북송포기 각서를 강요받지는 않았지만 처음 조사에서 통일부 직원 등이 북송을 희망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자료를 허위 작성했었다”고 말했다.

한씨의 아들(33)은 10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지난 1일 오전 10시30분께 통일부, 대한적십자사 직원과 경찰 등 3명이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에게 북송의사를 물었다”며 “내가 없는 자리에서 당시 아버지는‘가능하면 북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한씨 아들은 또 “나도 아버지를 상대로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적십자사 직원 등에게 ‘아버지가 북한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었다”고 말했다.

한씨 아들은 “그러나 잠시 뒤 어머니가 ‘그 사람들이 조사서류에 아버지가 북에 가는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대한적십자사 직원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으며 이후 3시간여만인 이날 오후 3시께 직원들이 다시 나와 ‘북송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조사를 다시 받아갔다”고 설명했다.

한씨 아들은“당시 항의전화를 받은 적십자사 직원은‘업무착오로 서류가 잘못 작성됐다.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이후 이틀 뒤인 지난 3일 한씨를 다시 방문, 방북신청서 등을 받아 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당시 한씨 조사에 참석했던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직원 마모(34)씨는 “지난 1일 1차 조사서류에 한씨가 북송을 희망한다고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북송을 희망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됐던 것은 사실”이라며 “서류를 작성했던 통일부 직원으로부터‘업무착오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마씨는 “당시 통일부 직원이 상부의 북송의사 조사 지시를‘한씨가 북송대상자(88년 이후 출소자)가 아니므로 북송을 원치않는다는 확인서를 받아오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해 이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노동당 당원이었던 한씨는 6.25전쟁당시 피난길에서 국군에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15년형으로 감형된 뒤 지난 64년 만기 출소해 광주에서 아내(74), 아들과 함께 생활해 왔다. (연합 2000/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