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장기수들의 글(5) / 유연철, 윤용기, 이병호, 전창기
2000-09-17 연합뉴스
“통일꾼으로 여생 바칠터”〈윤용기·75〉
< 비전향장기수 재북 가족 > 임병호씨
"사실상 나도 이산가족이 되는 셈입니다" - 전창기
비전향장기수 아들 유연철씨 소식듣고 감격
오는 9월초 북한에 갈 비전향장기수 60여명 가운데 한 사람인 유연철(89.부산시 서구 부민
동 3가 54-99)씨는 12일 거의 반세기만에 북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김씨 가족들의 소식은 북한 평양방송이 유씨의 둘째 아들인 유동남 국립희극단단장의 근황
을 전했고 서울에서 이를 청취한 연합뉴스가 11일 밤 이를 보도함으로써 유씨에게 전달됐
다. 유씨는 꿈에도 그리던 자녀들이 북한 사회의 중견 간부로 성장해 있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너무 흥분된다"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경북 안동 출신의 유씨는 또 "평양방송에서 아내(김봉희씨)의 소식이 없느냐"고 묻다 끝내
목놓아 울었다.
20년 형기와 7년의 `감호` 생활끝에 지난 82년 석방된 이후 부산에서 혼자 힘겹게 생활하고
있는 유씨는 북한에는 부인과 세 아들(상인, 상철, 상락)과 두 딸(영자,상화)이 살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유씨는 둘째 아들 이름을 `상철`로 기억하고 있지만 평양방송은 `남조선의비전향장기
수 유연철의 아들인 국립희극단 유동남 단장`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유동남씨가 평양방송에서 밝힌 나머지 형제와 누이들의 이름은 유연철씨가 밝힌 이름과 일치한다.
유동남씨는 "형님(상인)과 누님(영자), 그리고 상락이는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중앙기관
들의 중요한 직책에서 일하고 있으며 저와 상화는 희망대로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하고
예술부문의 기관책임자로, 대학강좌장으로 어엿한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평양방송에서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유연철씨의 부인김봉희씨는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남에 있는 유연철씨가 큰 아들 상인씨에게 보내는 편지내용이다.
『상인아 오랜만이다. 애비가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앞으로 며칠 있으면 만나볼 것으로 믿는다. 모두 몸 건강히 잘 있다니 기쁘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조국은 반드시 통일될 것이며 그 통일된 마당에서 전 민족이 기쁘게 살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너희 어머니가 살아 있는지 그게 궁금하구나.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이만 그친다.
잘들 있거라』 (연합 2000/08/12 )
“통일꾼으로 여생 바칠터”〈윤용기·비전향장기수·75·관악구 봉천동〉
이제 며칠 있으면 수십년간 목숨걸고 지켜왔던 신념과 조국통일이라는 희망을 찾아 북으로 떠난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할 일은 왜 이리도 많은지…. 고향에도 들러야 하고 가족, 친지들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도 다 만나뵈어야 한다. 아무래도 70대 노구에겐 벅찬 일이다.
8·15해방 무렵 당시 20살이던 나는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경찰을 도와 농민들이 피땀흘려 수확한 곡식을 빼앗고 강제징용 사업에 앞장섰던 무리들이 해방후 요직을 차지하고 애국을 부르짖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이후 개인자격으로 귀국해 미군정을 등에 업고 단독정부를 수립한 뒤 반민특위를 해체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보면서 또 한번 실망감을 느꼈다.
6·25전쟁이 터진 1950년 10월 나는 고향인 경기 강화를 버리고 북으로 갔다. 북에서도 3년여의 참혹한 동족상잔 비극 속에서 ‘사리원 폭격’‘신천 대학살’ 등을 목격하면서 ‘왜 우리민족은 이렇게 강대국의 야욕에 놀아나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외세가 싫었다. 전쟁도 싫었다. 오직 머리속에 분단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59년 7월 남하해 98년 출소할 때까지 39년간 복역하면서 한번도 그 신념을 버린 적은 없었다.
이제 ‘통일역꾼’으로서 남은 생을 바치고 싶다. 민족통일을 위해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남과 북이 지난 날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다. 북이나 남이나 통일을 원하고 있고 분단의 아픔과 국토분열의 설움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도 이번에 북으로 올라가면 민가협 어머니들과의 아름다웠던 기억,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 인권 시민·종교단체들과의 추억을 얘기하며 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7천만 겨레와 전 세계가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함께 울었다. 후세들에게는 이런 슬픔을 물려주지 말자. 세계 속에서 우리 민족이 당당히 나서려면 남과 북이 하나되는 길 밖에 없다. 이런 역사적 사명에 남녀노소가 어디 있으며 좌·우익이 어디 있겠는가. 경향신문을 비롯한 언론에도 당부하고 싶다. 분단된 역사를 종식하려는 남북화해의 고요한 물줄기를 비틀거나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나라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동안 이 아비로 인해, 분단조국의 현실로 인해 받은 상처를 이제는 그만 잊고 웃음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자. 그리고 평생 남편 옥바라지만 하다 저 세상으로 간 마누라! 내 무슨 말을 하겠소. 북으로 가기 전에 당신이 묻힌 곳에 꼭 들르겠다는 말 밖에. (경향 2000/08/25)
< 비전향장기수 재북 가족 > 임병호씨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날 누이들과 매부들, 아버지의 며느리와 손자.손녀들과 함께 마중가겠습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빨리 돌아오십시오.`
태어난지 14일만에 집을 떠난 아버지와의 상봉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임병호(86)씨의 외아들 광재씨는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비전향장기수 임씨는 충남 보령 출신으로 지난 59년부터 91년까지 32년간 복역했으며 현재 서울 `혜명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임씨의 아들 광재씨는 방송에서 `아버지가 집을 떠날 때 그 어디에 가있든 함경남도 광천군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갓 태어난 자신의 이름을 광재라고 지었다`며 부친의 색바랜 사진 한장을 가슴에 품고 44년의 긴긴세월을 살아왔다고 애타는 그리움을 토로했다.
광재씨는 이어 자신이 정준택원산경제대학과 평양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한뒤 현재 중앙기관의 중요 직책에서 일하고 있으며 아내 함옥희씨와 아들 국철, 딸 철옥. 은옥과 함께 평양시 선교구역 장충 2동의 3칸짜리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2명의 손위 누이도 국가의 보살핌속에서 모두 잘 있다며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40년 넘어 고생하신 아버지의 여생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연합 2000/08/29)
"사실상 나도 이산가족이 되는 셈입니다" - 전창기
46년만에 북녘 땅을 밟게되는 비전향 장기수 전창기(83) 씨는 북녘 땅에 남겨놓고 온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요 며칠 잠을 설쳤다.
전민자(57), 종욱(55), 종국(50), 용숙(48) 그리고 아내 윤순종(82)씨, 이들이 북녘 땅에서 전씨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다.
"우린 감옥 안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북송을 신청해 놓은 뒤 제일 먼저 학생들이 쓰는 볼펜을 사러 다녔다. 그를 기다리는 아들과 딸이 대부분 50을 훌쩍 넘어버렸기에 분명 손자, 손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손자, 손녀에 애착을 갖는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노동당에서 일했던 전창기 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평양에 가족을 남겨둔 채 1955년 남녘 땅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5달을 넘기지 못하고 연행되어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전씨의 고향은 본래 충남 천안이다. 하나 밖에 없는 전씨의 동생이 죽고, 부모님도 감옥에 있는 동안 돌아가셨다. 모두 합쳐 23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했을 때 그를 반겨줄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 데려다 밥 주고, 도와주면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전북 전주에서 문병학이라는 학생이 나를 데려다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전씨는 처음에 문병학 씨를 믿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나서 곧 함께 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같이 먹으면서 살자고, 통일되는 그날까지..."
하지만 3년이 지났는데도 통일이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문씨는 결혼을 해서 딸아이까지 있으면서도 전망 좋고 큰방은 전씨에게 주고, 자신들은 좁은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30대 초반의 젊은 두 부부를 보면서 이렇게 지내면 안되겠다 싶어 동료 장기수들과 상의해 거처를 지금의 전북 군산 돌베게 교회로 옮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함께 살 때 두 살이었던 아이가 지금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아이가 어려서부터 전씨하고 지내왔기 때문에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까지 있으면서도 전씨를 자신의 친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그 아이의 친할아버지에게는 죄송스럽지만 이젠 내가 그 아이를 못 보면 보고싶어 미치겠어요." 전씨는 군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그 아이를 보러 간다.
"가족들끼리만 이산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남녘 땅에서 맺은 인연으로 저는 새로운 이산가족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통일이 돼서 북남 간에 철도가 복구되면 남녘에 있는 내 가족들을 찾아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파란색 재킷과 파란색 넥타이 때문인지 나이에 비해 유난히 건강해 보이는 전씨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마이뉴스 2000/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