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장기수들의 글(2) / 김선명, 김영달, 김우택, 김인서

2000-09-17     연합뉴스
비전향장기수 김선명씨의 네 형제들에게
북누리 곳곳마다 남누리 심으소서-북 송환 장기수 김영달
[남기고 싶은 이야기] 부산지역 최장 장기수 김우택씨
<비전향 장기수 재북 가족> 김인서씨


비전향장기수 김선명씨의 네 형제들에게

고통받았던 과거사 모두 잊고 이젠 상봉의 기쁨 누리시길

오늘자 어느 신문에서 김선명 씨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세계최장기수라는 거창한 명칭답게 4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갇혀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북쪽으로 귀환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더군요. 얼마전 지리산 산행에서 볼 수 있었던 장기수들의 환한 웃음과 그 속에 감춰진 애환이 그를 인터뷰한 글 속에서도 나타나 있었습니다.
다음은 동아일보에 난 그의 기사 중 일부입니다.

민가협 `장기수 환송의 밤` 열어

김선명씨(金善明·76).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서도 무려 45년을 복역한, 이름하여‘최장기수’. 그는 이제 2주일 후(9월 2일)면 우리 정부가‘아무런 조건 없이’북쪽으로 보내는 62명 중 한 사람이다.

김씨의 요즘은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나름대로 남한생활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전향 장기수로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감회가 없을 수 없다.

6·25전쟁 중 9·28수복때 월북해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다가 51년 10월유엔군의 포로가 된 그는 52년 8월 서울고등군법회에서 15년형이 확정됐다. 53년 4월 다시 ‘인민군 정찰대가 아니고 간첩부대인 526군부대에서 남파됐다’는 혐의로 간첩죄가 추가돼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됐다.

96년 8·15 특사로 45년만에 대전교도소를 나왔다. 자유를 되찾았지만 이미 늙을 대로 늙고 ‘비전향 장기수’란 딱지가 붙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형제들도 그를 외면했다.

“남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누이 말고도 동생 4명이 더 있지요. 하지만 감옥을 나온 지 5년이 넘었지만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요. 그들 입장에서 저는‘화근덩이’였거든요. 이제 북으로 가렵니다. 출옥한지 보름만에 만난 어머니도 3개월만에 돌아가셨고요….”

이쯤에서 우리는 얼마전 있었던 이산가족 상봉장면들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들에게서 이미 사상과 이념은 설자리를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한 내의 이산 아닌 이산이 되어 45년이나 헤어져 살아온 김선명씨의 형제들 앞에는 아직도 사상과 이념의 거대한 장벽이 아직도 살아 있더군요.

아마도 김선명 씨의 형제들은 후환이 두려웠을 겁니다. 평생을 따라다닌 `연좌제`의 올가미가 그들을 옥죄었을 겁니다.

그분들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친형제 중의 한 명이 45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음에도 주변의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눈초리가 무서워서, 서슬퍼런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탄압이 두려워 면회는 커녕 자신들의 안위를 돌보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곧 김선명 씨는 이북으로 떠납니다. 같은 한반도에 태어나 자랐음에도 오직 머리속에 "빨갱이물"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요당했던 한많은 40여년의 반도남쪽 생활을 걷어치우고 말입니다. 이제 떠나면 아마 통일이 된 후에나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김선명 씨를 잃어버린 4분의 형제분들께 바랍니다. 70세가 훌쩍 넘어버려 언제 흙으로 돌아가야 될지 모를 형제가 여러분들 곁을 곧 떠나려고 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억세던 `연좌제`와 `빨갱이`의 사슬도 어느 정도는 느슨해지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당신들도 역시 이제는 잃어버렸던 형제를 되찾고 싶어하고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는 9월 2일이면 어쩌면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를 길을 당신들의 형제가 떠나갑니다. 그전에, 형제로 인해 고통받았던 과거사일랑 모두 잊어버리시고 제발 상봉의 기쁨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과거의 설움과 아픔은 모두 날려버리십시오.

그리고 부둥켜 우는 당신들에게 누군가 그 이유를 묻거든 이렇게 답하십시오. `내가 바로 빨갱이 김선명의 형이요, 동생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아니 이제부터는 더이상 당신들 혈육들의 상봉을 `사상과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막아서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오마이뉴스 2000/08/26)


북누리 곳곳마다 남누리 심으소서-북 송환 장기수 김영달

"아내 두고 떠나는 내 맘이 좋을 리 없지" 그는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아내를 찾아 달려오겠다고 했다.

"부모, 형제와 50여년 넘게 헤어져 있었으니 이제라도 꼭 가야지. 여긴 친척도 없고... 아내를 두고 가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떠나는 내 맘이 너무 아파"

9월 2일 북송을 희망한 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62명, 꿈에서만 그리던 또 하나의 조국을 찾아 간다는 설렘도 컸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제2의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김영달 씨(67)는 "결혼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아내를 남녘 땅에 남겨두고 북송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송환을 신청했다. 그에게는 50여년을 생사도 모른 채 헤어져 살아야 했던 부모, 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엔 더 더욱 아내 백학년 씨(65)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25일, 전북 부안에서 살고 있는 김씨는 송환절차에 필요한 신체검사를 마치고 오후 3시가 다 되어서 전주에 도착했다. 물론 옆에는 이제 곧 이별을 해야 할 아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전주고백교회에서 준비한 `북송 희망 장기수 송별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지만 떠나기 전에 남녘 땅에 남게 될 장기수 동료들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김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가족들과 함께 만주 하얼빈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957년 남녘 땅으로 내려와 활동을 하다 23세 때 수감되었고 32년의 수감생활 끝에 1989년 출소했다.

1991년 논산에서 박씨를 만나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살면서 김씨는 늘 만주 하얼빈에서 헤어진 부모, 형제를 잊지 못했다. 막내 여동생이 죽지 않고 생존해 있다면 벌써 48살이다.

김씨는 "아버지께서는 올해 104살이 되셨으니 돌아가셨을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92살이므로 다행히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며 희망을 가지고 있다. 생존도 확인되지 않은 가족을 위해 그는 시계며 카메라 등 선물도 준비했다.

하지만 김씨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김씨는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쁘지만 아내 놓고 가는 맘이 많이 아프다"고 말한다.

송별회 내내 교회당 한 쪽 구석을 지키고 앉아 있던 백씨는 행사가 끝나자마자 김씨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김씨의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사진을 함께 찍었으면 좋겠다는 기자의 부탁을 한사코 거절하면서 박씨는 고개를 돌렸다.

"간다고 하는 사람 잡을 수는 없잖아요. 보내 줘야죠. 그저 가족도 함께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힘든가 봐요." 그의 주름진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떠나시기 전에 아내에게 정표로 남겨 주신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아내를 한번 돌아보고는 "내 마음 주고 가면 됐지 더 뭐가 필요하겠어?"라며 미소를 띄웠다.

김씨는 "이대로 간다면 머지 않아 북남 간에 면회소도 만들어지고 서신교류도 될 것"이라며, "몸은 헤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늘 남녘에 있는 아내와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북송되는 6명의 장기수를 위한 송별회에 약 20여명의 장기수가 참석해 기쁨과 이별의 아쉬움을 나눴다. (OhmyNews 2000/08/27)


[남기고 싶은 이야기] 부산지역 최장 장기수 김우택씨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정치.경제 이념은 분단된 조국현실 앞에선 2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40년이란 감옥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통일에 대한 염원과 제 신념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부산지역 비전향 장기수 중 최장기간 감옥생활을 한 김우택(80.부산 해운대구 반송2동)씨.
40년동안 교도소를 옮겨다닌 김씨는 북송을 앞두고 기대 반 아쉬움 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일생을 떠받들어온 제 신념을 정리. 결산하는 공간으로 북을 선택했고 그곳에서 통일을 위해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김씨의 얼굴엔 북쪽 생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숨어있다.

남쪽의 가족(며느리와 손자)들을 버려두고 피붙이 한명 없는 북으로 가는 김씨. 고향을 등지고 채 2년도 머물지 않았던 북으로의 송환을 그는 원했다.

왜 북으로 가느냐는 질문에 "두 달동안 고민을 많이 했다"며 "북쪽의 사회상이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북쪽은 청년시절부터 간직해온 제 신념의 고향입니다." 김씨가 밝힌 북송 이유였다.

경북 안동 출신인 김씨는 일제시대 농업기술자인 "농업기수"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해방과 함께 지역농회 회장으로 활약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가담,지난 50년 7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됐다.

지난 52년 1월 강원도 설악산자락인 가리산에서 미군 해병대 토벌대에 검거된 김씨는 군법회의 1심과 2심에서 간첩죄 등으로 사형을 선도받았으나 54년 삼일절 기념으로 감형혜택을 받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군신분임에도 비정규군으로 분류돼 포로교환에서 제외됐으며 이후 김씨는 대구.대전.목포교도소로 옮겨다니며 39년 1개월을 복역하고 지난 91년 석방됐다.

지난 80년 부인을 잃은 김씨는 석방후 아들(94년 사망)내외와 손자가 사는 울산에서 잠시 거주하다 보안관찰과 가족들이 당하는 이웃의 냉담한 시선을 견디지 못해 93년 홀로 부산으로 이주해왔다.80대라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모습에서 그간 질곡의 세월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누구나 신념을 갖고 생활한다면 낙천적인 기질이 몸에 배고 여유를 갖게 된다"며 "신념은 정신건강의 최고 덕목"이라고 말했다.

또 "남쪽의 젊은이들이 통일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지적한 그는 "통일을 향한 의지가 굳다면 우리민족은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있다"며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토로했다.
(부산일보 2000/08/24)


<비전향 장기수 재북 가족> 김인서씨

"할아버지, 제가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하는 손자 철진입니다."

내달 2일 북한으로 송환될 비전향장기수 김인서 노인의 맏딸인 김화심씨의 둘째 아들 철진씨는 최근 평양시 모란봉구역 북새동의 자택에서 북한이 대남 지하당으로 주장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 기자와 만나 외할아버지의 송환을 앞두고 자신의 애절한 심경을 밝혔다.

그는 "우리 온 가족이 얼싸안고 함께 모여 살날이 해와 달로부터 날짜와 시간을 꼽아 기다리도록 줄어들었다"면서 외할아버지에게 "부디 상봉의 그날까지 최대한 건강에 유의해 주십시요"라며 건강에 유념할 것을 부탁했다.

철진씨는 특히 비전향장기수 송환이 결정된 지난 6월 중순 이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외할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담아 시를 쓰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 노인의 딸 화심씨도 "제일 걱정되는 것이 아버지의 건강"이라면서 "삼복더위에 아버지의 건강이 더욱 불안스러웠는데 6월과 7월 복더위를 무사히 넘겨 한시름 놓인다"고 그간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화심씨는 또 일본, 중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에 가서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한 것이 5번이나 되고 김 노인의 건강이 악화됐던 지난 4월 말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6번째로 전화상봉을 했다면서 민민전 기자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의 배려에 `감사`의 뜻을 밝혔다.

화심씨는 요즘 쇄도하는 축하전화와 방문객을 맞는데 여념이 없다. 집과 사무실을 찾는 축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고향인 평남 북창과 여러 지방에서 보내온 축하전화와 축하전보가 이어지고 있으며 인근 아파트 주민들도 화심씨에게 김 노인을 맞기 위해 건강을 잘 지키라는 안부인사를 하고 있다.

김 노인은 지난 50년 남파돼 전남 장흥지구 유격대 참모로 활동하다 52년 검거돼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3차례에 걸쳐 24년간 복역하고 지난 81년 출소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