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보내며 / 김효순

2000-09-17     연합뉴스
북한이 23일 남쪽 정부가 통보한 송환대상 비전향 장기수 63명 전원을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해옴에 따라 우리는 곧 또하나의 극적인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전향의사를 밝혔다가 나중에 철회한 사람이나 가족의 동행 여부 등이 해결되지는 못했지만, 분단사의 큰 비극 하나가 정리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한겨레> 23일치 6면에는 북송 희망 63명의 평균적 모습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정치공작원 또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70년 이전부터 30년 이상 옥살이를 한 70대 이상의 노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수감기간을 합치면 2045년이니 한 사람당 평균 32년6개월을 철창 안에서 보낸 셈이다. 남쪽 사회에서 오랫동안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이 거론되고 송환에 이르게 된 과정은 민주화·분단체제 극복 운동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에 저항하다 수감된 이들이 장기수들과 함께 감옥생활을 하면서 이들의 삶의 역정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 이들의 삶과 마주치는 개인적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시기적으로 초겨울 무렵이라 더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수용소는 음습하고 썰렁했다. 모든 사물이 정지한 듯 기분 나쁜 정적만이 감싸고 있었다. 전부 독방에 수용하는 시설이라 평소에 말을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너명씩 조그만 공터에 불러내 `운동`을 시킬 때도 서로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하게 했다.

하루는 운동 나갔다가 돌아오는 틈을 이용해 누군가 나직한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학생이냐`, `왜 들어 왔냐` `몇년 받았냐` 등의 신상에 관한 기초적 물음이었다. 그래서 같은 투로 `몇년 됐느냐`고 한 마디를 건넸다. 그러자 `27년째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뭔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머리 전체가 웅하고 울렸던 느낌과 함께.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말을 걸어온 사람의 이름이 강동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자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아주 젊은 나이에 들어와 그대로 갇혀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그가 90년대 초반 옥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긴 옥사한 사람은 강씨만이 아니다. 병고로 감옥에서 숨을 거둔 장기수가 한둘이 아니다. 이들이 `테러공작`의 시기라고 부르는 70년대 전반기에는 고문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람도 적지 않다.

장기수 문제의 연원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남쪽 사회의 관용성 증대와 떼놓을 수 없다. 남북이 동족상잔을 되풀이하던 한국전쟁 초기에는 오로지 처형밖에 없었다. 남쪽의 경우만을 보면 전쟁발발 전 좌익활동 협의로 수감돼 가벼운 형을 받았거나 재판 대기중에 있던 사람들은 전쟁이 터지자 대부분 집단처형이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전황이 고착돼 `여유`가 생기면서 재판이 열리고 사형 아닌 무기형, 20년형 등이 선고돼 장기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때는 800여명으로 불어났던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시련이 닥쳐왔던 것은 공교롭게도 역사적인 7·4 공동성명 체제가 무너진 직후였다. 남쪽에서는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북에서는 국가주석제 도입을 빼대로 하는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돼 유일체제가 확립되면서 내부 다지기가 강화됐다.

남쪽 사회에서 `간첩` `남파공작원` `출소 공산주의자` `미전향 장기수`란 호칭으로 불려왔던 이들이 북으로 돌아가면 어감이 전혀 다른 호칭들이 들려올 것이다. 대우도 크게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인생의 황금기를 대부분 조그만 감방에서 보낸 이들의 개인적 삶을 생각하면 씁쓰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들의 송환에 대해 남쪽 정부가 너무 양보를 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온다. 그러나 사회의 관용도는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관용은 여유를 가진 쪽에서 먼저 해야 다른 쪽에서 따라오는 법이다.
(김효순 편집국 부국장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