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죽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이력서(1)
2000-09-17 연합뉴스
장기수 아버지의 기일에 결혼한 신부
1991년 11월 9일 종로4가 종묘공원 옆에 자리잡은 종로성당 안에는 조촐한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신부대기실에는 이제 막 화장을 마치고 화사한 백색의 드레스에 싸인 신부(신동선씨)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신혼에 대한 부푼 희망과 설렘으로 홍조를 띠어야 할 신부의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축하를 하기 위해 미리 와 있던 몇몇의 노인들이 잠시 자리를 떠 신부에게 다가갔으나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신부와 마찬가지로 눈시울만 붉힌 채 침울하게 서 있다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돌아섰다.
신랑 신부 두 사람에게 있어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어야 할 이날은 바로 83년 대전교도소에서 옥사한 신부의 아버지 신창길씨 기일이기도 하다. 머리 희끗한 노인들은 신창길씨와 함께 모진 옥살이를 해왔고, 그 죽음을 통한의 한으로 가슴에 담고 출소한 장기수들이다. 당시 시신을 거두러 왔던 어린딸은 8년 만에 신부가 되는 길에서 아버지의 못다 이룬 뜻을 잇고자 그 기일에 맞춰 결혼날짜를 잡고 지금 앉아 있는 것이다.
일제 때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던 신창실씨는 8·15 해방 후 그러던 해방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과 분단의 고착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남녁과 북녘의 민중에게는 `통일`이라는 필연의 과업이 던져졌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한 인간에게는 형극의 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창길시는 59년 정치공작원으로 북에서 서울로 내려왔다. 그는 결혼을 한 뒤 정미업을 경영하다 73년경에 체포되었으며, 15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신시는 전향공작담당반의 살인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몸이 쇠약해졌으며, 고질적인 `탈장`으로 고생을 했다. `전향`을 하면 치료해주겠다는 담당교회사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한 탓에 신창길씨는 변변한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83년에 옥사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옥중사망은 전향공작담당반에 의한 `살인`
우리의 역사 저 뒤편에는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민족과 조국의 운명을 자기 생명보다 우위에 두고 해방의 기치아래 삼천리 방방곡곡 더 나아가 만주벌판 눈바람 속에서도 쉼 없이 싸워온 민중들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그리도 갈망하던 해방의 날을 맞이 했건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곧 외세에 의해 분단은 확정되어갔고, 분단을 거부하는 민중과의 싸움은 분명해졌다. 이때부터 하나의 흐름으로 빨치산활동은 시작되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지리산·화문산·태백산맥을 거점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그 후 종전이 되는 과정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체포가 되어 투옥되거나 월북을 하게 된다.
이때 체포된 빨치산을 비롯한 소위 좌익수는 수만명에 이르고 대부분이 당시 포로수용소와 형무소에 수감되어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학살 내지는 기아와 질병으로 숨지거나 아니면 `앞줄 사형, 뒷줄 무기`식의 요식적인 군사재판에 의해 죽거나 용케 뒷줄에 선 덕택으로 무기 또는 유기형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이때부터 훗날 `장기수`라는 이름을 달게 된 이들의 감옥생활이 시작된다.
현재 옥중에 남아 있는 장기복역 정치수는 90명, 그 중 대전 교도소에는 44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있다. 최근 들어 장기수의 실태가 조금씩 알려지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운동의 성숙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들에대한 역사적 규정이 조금씩 바뀌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장기수, 이들은 모두 반민중적, 반민족적인 것에 대해 가장 어려운 곳에 서서 한치의 타협과 양보도 없이 굴욕을 거부하면 역사의 필연적 진보에 대한 낙관성과 바다와 같은 민중의 힘에 절대적 신뢰를 갖고 한 평도 되지 않는 관 속 같은 감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955년 법무부 통감에 의해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제국주의 유지와 식민지 민중의 해방운동에 대한 탄압의 무기였던 `사상전향제도`가 부활되어 내부분열을 획책하고 개인의 양심에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 `전향공작담당반`이 생기는데, `전향공작담당반`의 시설 후 이마에 권총을 들이대며 전향을 강요하는 살벌한 시기에 특히 많은 장기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죽음은 흔히 `병사`나 `자살`로 처리되었는데 실제로는 독재정권의 명백한 `살임`임이 틀림없다.
`병사`로 처리되는 경우, 장기수들이 병을 얻는 계기는 전향공작을 위한 폭력과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처우 때문이었다. 독재정권을 장기수들이 병을 얻게 되면 고의적으로 병세를 악화시키고 병치료를 미끼로한 전향공작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장기수들은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되는 것이다. `자살`인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때문이 아니라 처우나 사상전향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와 다른 동지들을 살려내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항의` 자결한 것이다. 그 이외에 살인을 자살로 위장한 경우도 허다했다.
"너는 간첩이기 때문에 죽어도 좋다"
1976년, 전향공작테러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고문과 탄압으로 많은 장기수들이 죽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광주교도소 수감중에 심장병으로 신음하면서 약을 청구하는 최한석씨에게 간수는 "너는 간첩이기 때문에 죽어도 좋다"고 비아냥 거렸다. 그는 단숨에 "내가 북에서 내려온 것은 내고향 경북 상주를 찾아 외세를 몰아내고 부모 형제와 함께 통일의 날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자 함이다. 이일을 해내는 것이 내 사업이다. 내가 간첩이라면 남과 북은 적대국이며 한 민족 한 조국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너도 통일을 원한다면 네 놈의 머리속에 있는 반공사상부터 씻어내라."고 응수했으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열려지고 긴 복도로 질질 끌려갔다. 최씨는 한참 후에 소지의 등에 업혀서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것을 빌미로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76년 5월 19일 아침 일찍 교무과로 불려나갔다. 최한석씨는 이날도 저녁 늦게야 소지의 등에 업혀서 사방에 누이게 되었다. 얼마 후 비명소리와 쿠당탕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은 옆 방 사람이 담당을 부르고 소란을 피웠으나 1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의무과 직원앞에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최한석씨는 평시 이불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심장이 약해서 이불에 끈을 달아 양벽에 길게 매달고서야 잠에 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교도소측은 오랜 병에 북어같이 마르고 겨우겨우 징역을 이어가던 분을 전향공작테러로 죽이고, 심장병으로 병사한 것으로 처리해 시신을 가족에게 인수했다. 이 일은 주위 동료들이 애석함을 시로 한수 남겨 전해지고 있다.
장쾌승 멋진노래 불러주마 뻐기더니
옥싸움 비명터져 작별조차 못 나눈 님
붉은 뜻 그 사랑을 길이길이 모시리
서울 성북구 출생으로 대구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최한무씨는 복부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독방에서 산더미같이 부풀은 배를 안고 신음하면서 지냈는데 단 한번도 제대로 약을 지급받은 적이 없었다. 보다 못한 주위 동료들이 쥐꼬리만한 비상영치금을 털어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구입한 약으로 생명을 유지했으나 결국 69년 8월 싸늘한 독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40년 징역 살고 통일기원 남겨두고
한태갑씨의 경우는 더욱 비참하다. 충청도가 고향이고 교원출신인 그는 오랜 옥중생활에서 얻은 고혈압과 고문으로 정신이상까지 되었다. 그럼에도 격리 치료와 전향을 맞바꾸자는 관의 교활한 회유책을 끝까지 거부하면 독방에서 생활하였다. 물론 간병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항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 교도소측은 무려 6개월 동안 계속 중만 식구통으로 넣어주었다. 한태갑씨는 독방에서 혼자 신음하다 똥 오줌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몰골로 굶어 죽었다.
서울 중구에서 출생한 박정대씨는 사돈이 이병철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연좌제법과 관계없이 다른 장기수가족과는 달리 그의 아들은 사회생활이 평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좋은 뒷배경도 6척 담 안의 비전향장기수에게는 썩은 지푸라기와 같았다.
박정대씨는 감옥에서 얻은 결핵을 앓으면서도 주위동지들에게 폐를 끼치기는 고사하고 매사에 희생적이며 원칙을 고수해, 모든 이로부터 작풍이 좋고 모범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75년 4월 20일 전향공작 담당관의 폭행과 악랄한 처우에 항의하기 위하여 벌인 집단 단식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위 동지들이 환자의 몸으로는 위험하다고 만류하자 박정대씨는 "눈앞의 투쟁을 비켜가는 사람은 통일꾼이 될 수 없다"며 한마디로 묵살한 채 단식투쟁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5일간의 단식이 끝나고 난 다음날 휴유증으로 결국 독방에서 사망하였다.
충남 서천이 고향이 최주백. 조부께서 종손인 그에게 큰 기대를 거시고 주역을 백독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주백이라 지어주셨다고 한다. 해방 후 지하당 사업을 하면서 두 차례 징역을 살기도 했다. 1952년 총각으로 체포되어 40여년을 징역을 살면서 고질적인 위장병이 87년에는 결국 위암으로까지 발전했다. 교도소측은 비전향을 이유로 병보석 치료는 고사하고 암에 걸린 환자에게 까지 강제전향을 강요했다. 결국 최주백씨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자 어거지로 병사에 데려가 기력이 떨어져 사경을 헤메는 사람의 팔을 강제로 끌어당겨 백지에 지장을 찍게했다. 멋대로 전향서 문구를 만들어 놓고 "이제 전향한 것"이라고 심사하면서, 정치적 순결을 `강간`한 것이다. 그때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최씨는 기어이 운명을 달리했다. 입관 하향식에는 누구 한 사람도 참석하지 못했고 철창속에서는 동료들의 슬픔과 분노 속에 시 한수가 전해지고 있다 .
세상일 환하거니 주역백독 못했어도
진솔한 농투성이 외곬으로 나라사랑
사십년 징역살고 통일기원 남겨두고
식물인간에도 전향강요
`적에겐 호랑이 동지에겐 양, 옥중투사 강장군`으로 불리던 강동찬씨는 전남 강진 출생으로 동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을 했으며, 3학년 재학중에 위용군으로 입대했다가 51년 체포되었다. 전향공적테러에 격렬하게 맞싸워 몸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던 강동찬씨는 고혈압에 시달렸는데 심할 때는 혈압기 눈금이 다 차도록 올라가 의무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전향공작반에서 비전향자에게는 약 지급을 중지하라는 지시로 일체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그는 80년 11월 운동장에 나가 서성거리다가 혈압이 터져 그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
모든 동지들의 슬픔과 분노로 집단 단식이 시작되고 뒤늦게 병사로 입병하였으나 병간호는 더욱 불량했다. 잡범들 속에서 똥 오줌을 가려주는 사람도 없고 밥 한숟가락을 제대로 먹여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번엔 다시 특별사동으로 되돌려 달라고 집단 단식을 하였다. 이리하여 동지들 곁으로 돌아온 그날 옷을 벗기고 보니 엉덩이엔 똥 오줌으로 물집이 잡히고 앙상한 뼈만 남은 송장이었다. 주위사람들이 들며 날며 극진한 간호로 몰골은 갖추어 놓았으니 말도 못하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 판국에도 전향공작은 더욱 심해져 전담반원들이 이틀이 멀다 하며 시찰구에 붙어 서서 전향을 하라고 보챘다. 식물인간이 된 강동찬씨도 포한을 누를 길이 없었는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고개를 완강히 흔들고 눈을 부릅뜨곤 했다. 이렇게 6년을 버틴 86년 4월 18일, 그는 21세 총각으로 들어와 36년간의 옥중생활에서 그렇게도 고대하던 통일의 날은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서야 겨우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손문규. 전북 정읍이 고행이고 소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나주에 부안에서 교원생활을 했다. 전쟁당시 빨치산이 되어 53년 체포와 참께 긴 장기수 생활을 시작했다. 76년 전향테러에 윤희보씨와 함께 10여명의 교도관에 둘러싸여 몰매를 맞으면 싸우던 중 `너희들은 전향을 하든지 죽든지 둘중에 하나다`라는 교회사의 엄포에 "내 몸에 상처 없는 곳이 있으면 더 때려라"고 60세 노인답지 않게 쩡쩡 호령을 하며 버텼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양다리를 잡혀 꼼짝 못한 채 강제로 전향서에 지장을 찍게 된다. 소지들의 등에 업혀 간신히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그날부터 강제전향서를 내손으로 찢게 하라고 요구하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온몸은 무차별하게 두들겨 맞아 구겨 놓은 종이 뭉치 처럼 말이 아니었고, 8일이 지나자 생명이 위독함과 주위 사람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못이겨 의무과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강제급식을 시키고 수액을 꽂았으나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손문규씨는 즉사했다. 이유는 냉장고에 보관중이던 수액의 온도를 적절히 조절하지 않은 채 그대로 꽂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자 윤희보씨에게는 스스로 강제 전향서를 찢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모든 사람들의 죽음이 병사로 처리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쥐까지 잡아먹어
60년대의 징역살이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세숫물을 마시는가 하면 영양실조로 내려앉은 잇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장기수들은 담밑의 부드러운 풀은 모두 씹어 삼켰으며 먹을 수 있는 아니 먹어서 죽지 않는 모든 것은 심지어 쥐까지도 전부 잡아먹어야 했다.
수년째 계속되던 탄압은 조금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73년 전향공작반이 생기고 난 후 더욱 가중되어 "엄정독거 기아급식 운동시간 말소 추위엔 독거 더위엔 혼거"라는 조치가 착실히(?)지켜졌다. 조그만 꼬투리로 위협 공갈 구타가 계속되고 면회금지, 영치금 사용금지 등을 통해 신경을 자극하고 환자치료를 이용하거나 우매정책(책 압수)등을 통해 장기수들을 괴롭혔다.
자살로 처리되어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처참했다. 충남 보령 출생의 신충복씨는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결핵환자로 맨 끝 방에 수용되었으며 약지급을 받지 못해 항상 교도소측과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소모성 질환자는 영양섭취를 충분히 해야 된다는 것이 상식인데 무의탁자였기 때문에 늘 곯은 배를 채울 수조차 없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검은 꽁보리밥을 완전히 소화시키기 위해 식사를 하는 데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다. 신충복씨는 전향테러의 살벌한 기간에도 동지들이 몰래 변소 공기통으로 넣어준 버터 반조각을 주워들고 이것이 "내 생명의 연장이다"며 귀하게 섭취했다.
늘상 테러의 마수는 몸이 쇠약한 사람부터 먼저 뻗쳤다. 75년 연일 계속되는 테러에 결핵이 악화되어 아침 저녁마다 뱉어내는 핏덩이를 보며 개죽음은 하지 말아야 될텐데라며 염려하곤 했다. 75년 11월 2일 교무과에서 주최하는 반공강연을 들으러 모두 소집된 적이 있었다. 엄중독거 속에서 옆방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감시를 피해가며 서로 염려의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충복씨는 `통방`을 하다가 들켜 강연이 끝나자 불려가서 저녁 늦게까지 매타작을 당하고 돌아왔다. 이른 새벽 다급한 발자국소리에 잠이 깬 앞방 사람은 열려있는 문으로 창틀에 메달린 사람을 보게 되었고 각 방 벽으로 자살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나중에 그 방으로 전방 간 사람은 감방벽에 애국구호와 "나는 먼저 갑니다. 동지들은 통일의 그날까지 힘차게 싸워주십시오"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분을 위한 시조 한 수가 전해진다.
충성을 못다하고 먼저 간다, 말 남기고
희생을 무릅썼네 박쥐만행 폭로했네
끓는 피 그 뜻 갚으오리 님의 깃발 덮으로리
(1992년 3월 월간 말 / 권낙기 민가협 장기수가족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