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행 -『김정일』을 통해 북한사회를 규명하고자 ①

2001-07-06     연합뉴스

일시 : 2001. 6. 26. 오후 2시
대담 : 이계환 기자
사진 : 조성현 기자
정리 : 김명숙 기자


▶한반도의 코드, 통일의 파트너 <김정일>을 쓴 저자 이찬행
[사진 - 통일뉴스 조성현 기자] 


대하소설에 버금가는 사회과학 연구서가 나왔다. 그것도 한 인물에 관한 책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구한 『김정일』.
한반도의 코드, 통일의 파트너 『김정일』을 쓴 저자 이찬행(李璨行). 그를 만나기 위해 마포에 있는 연구실 겸 거처를 찾았을 때, 기자는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대한 책들의 숲이었다. 사방 벽이 온통 책으로 덮혀 있고 모든 칸막이는 책장으로 되어 있었다. 책들의 숲속에 『김정일』이 있었다.



□ 최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관한 책 『김정일』을 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파격적인 내용이나 방대한 양에 궁금해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나 목적은?

■ 동기나 목적을 바로 얘기하기 이전에 약간의 상황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994년 가을에 『인간 김정일, `수령` 김정일』이란 책을 냈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바로 책이 나온 상황이었다. 처음에 내 관심영역 자체가 북한의 인물변동 연구, 권력구조에 관한 연구였었고, 그 연구과제는 후계문제로 집중되어 있었고 당연히 나는 90년대 초반부터 후계문제를 연구해 왔다. 그때는 짧은 기간 안에 책을 냈었고, 낸 책 자체에 대해 나 자신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목적은 북한사회 자체가 독특한 사회주의 현상을 담고 있었고, 당시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김정일 위원장으로의 권력승계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이론적으로 규명해 볼 필요성을 느꼈었다. 또한 다른 여타 사회주의 국가에서 후계승계가 상당히 어려웠었고 지도부 자체가 부인되거나 숙청되거나 하는 상황이었는데, 사회주의권의 1990년 붕괴 이후에 북한이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이고 그 변화 양상은 차기정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변화 양상은 김 주석의 노선이 이어질 것인가, 인물변동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분야로 연구영역이 집중되어 있었다.

북한사회를 실사구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접근하고자

두 번째는 남쪽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 당시에는 권력중심의 접근방법이 많았었고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윤색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때문에 북한사회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탈색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탈색시켜야 할 것을 탈색시키기 위해 실사구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접근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한 입장에서 접근한 내 연구방법론 자체는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방법과 거의 유사하고 같은 방법론이다. 나는 그 당시에 과연 그러한 연구방법론에 어떠한 이름을 붙일 것인가, 지도자의 목적과 의도 더 나아가 가치판단이나 행간을 읽어내는 방법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내 자신이 개념정의를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새롭게 `내재적 독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것을 연구자와 일반 독자에게 밝힌 것이다.

세 번째로 우리가 민족통일이라는 관점에서 한반도 오천년 역사를 볼 때 불과 50년은 짧은 기간이다. 통일을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우리가 통일을 바란다면 북한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 이해의 핵심, 즉 키 워드(key word)는 `당과 대중의 집단주의적 통일전략`이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일심단결`이고 단결의 사상이 바로 `주체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최고 지도자에 대한 분석,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전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목적으로 이 책이 발간되었다.

또한 가능하면 지식 자랑은 안 하고 겸손하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하다보니까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래서 원고지 양도 많아졌다. 내 자신 스스로도 의문점이 많았고 일반인들은 더 더욱이나 모르고, 기존 연구들은 나와 견해가 너무 다르고 또 그 기존 연구들 자체가 자기 입맛에 맞는 것들만 골라서 연구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올바르게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것이 네번째 이유다.

다섯 번째로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94년에 발간한 『인간 김정일, `수령` 김정일』이란 책이 부족한 점이 많았고 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일종의 인생에 있어서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빚일 수도 있고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의 빚일 수도 있었다. 고민 속에 그 빚을 갚기로 했다. 3년 정도의 리딩 작업 끝에 글쓰기 작업은 한 8개월 정도 걸렸다. 집필기간은 짧았으나 연구기간은 길었다.

□ 충분히 독해를 한 다음에 압축적으로 쓰신 거군요. 원고지 9천 2백매에 각주만도 2천 5백여개인데, 소설로 치면 대하소설인데 이것을 8개월만에 썼다니 가능한 일인가요. 식음을 전폐하셨는지?
  
■ 집필 후 8kg 정도 빠졌다. 서문은 빨리 썼고 서문을 썼을 때 1차 원고가 끝난 상태로 8천매 정도 되었다. 후반기 2차 집필하면서 추가로 연표 등이 1천 2백매 정도 불어난 것이다. 8개월만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정리를 해둬서 따로 발췌한 부분들을 다 정리해둔 상태로 노트화 된 원고들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했다.

□ 지금 이 연구실에만 해도 7,000여권의 책들이 있는데 실제 집필하면서 참고로 한 책들은 얼마나 되는지?

■ 이번 『김정일』 책에 모든 문헌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빼기도 했다. 어쨌거나 김정일에 관련된 국내외 자료를 섭렵했다고 보아야 하고 김정일에 관한 책은 거의 다 보려고 노력을 했다.

□ 책을 쓰기 전의 초기 목적을 달성했다고 스스로 평가하시는지?

■ 이 책 자체에 대해서는 미진한 부분이 많다. 살아있는 인물 또는 역사속의 인물을 분석하려면 있는 그대로를 분석해 주어야 하고 또 숨겨진 이야기들을 같이 소개해 주어야 하는데, 지금 남북관계의 현실을 고려하면 아직은 북한 인물에 대한 분석이 없는 상태에서 그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많은 부분들은 이 책에서 누락시켰다고 보면 된다. 또한 각 쟁점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 현실과 이론을 오가며 분석하는 것 등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 몇 가지 점에서 내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앞으로 좀 더 깊이있게 연구를 해야 할 부분이다.

□ 김 위원장은 현존인물이고 북의 최고 지도자이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점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는가?

■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그것은 남쪽에서도 역사인물 예를 들면 조선시대의 특정인물을 연구할 경우 그 인물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쓸 경우, 그쪽 가문에서 들고 일어나 욕을 한다든지 또는 문중에서 집중적인 항의, 심지어 법원에 가처분 신청까지 하고 그러는데, 하물며 나는 만나보지도 않은 인물이고 더구나 역사속의 인물도 아닌 현존하는 인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더구나 정보가 한정된 상황속에서 연구한다는 것이 어렵고 우리 사회에서 김정일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 하나 없는 상황이고 있다하더라도 증언채록 정도이다. 첫 번째인 신상옥 최은희의 증언채록을 시작으로 10여년 동안 50여권의 증언채록이 나왔는데, 한 두 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부 다 다큐멘타리든지 아니면 자료 미비와 미확인된 정보에 입각해서 쓴 어찌보면 연구서가 아니었다. 

현존하는 인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

내가 94년에 단행본으로 낸 『인간 김정일, `수령` 김정일』이 김정일 연구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에 단편적인 논문들이나 쭉 발표되다가 중앙일보의 정창현 기자가 쓴 신경완 선생의 증언채록집이 나왔다. 김정일 연구에 대해서는 이 책 『김정일』이 이론을 중심으로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바로 그 점에 있다. 한 인물을 희화화한다던가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윤색한다던가 하는 부분을 가능한 한 배제하면서 순수하게 이론적 차원에서 규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 현존 인물에 대한 연구에 부담감은 없었습니까?/ 만난 적도 없고
역사속의 인물도 아닌 현존하는 인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사진 - 통일뉴스 조성현 기자]      

그게 우리 남북관계의 현재 수준이 아닌가? 따라서 가능하면 탈북자들의 증언이나 미확인된 정보는 여기에서 배제했다. 설사 사용한 문헌이라도 확인 가능한, 추적해서 `맞다`라고 확인된 것만 실었다. 신경완 선생의 증언채록도 역사속에서 문헌으로 검증해 보고 또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확인해 보고 하는 작업을 수없이 했다. 『김정일』은 이런 작업과정을 거친 과도기적 연구이다. 완결판이 아니다. 완결판을 내려면 시간을 두고 앞으로 1-2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 이 책이 개인을 연구한 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 인간에 대한 연구인데, 한 인간을 깊이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도 되고 또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할텐데, 집필 후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애초의 생각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 연구영역 틀에서는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규명하는 차원이었다. 개인의 인물이나 그 삶을 따라간 전기가 아니다. 정확한 제목을 붙인다면 `김정일과 현대북한`이 맞다. 북한의 역사속에서 김 위원장이 한 역할이 무엇인가, 그 역할을 규명하는 차원의 것이었고 이것을 이론적으로 밝히는 것이었다. 북한역사에는 논쟁적 쟁점이 많다. 그 속에서 수령과 후계자의 관계, 후계자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그 후계자의 역할이 근 30년간 지속되었을 때 그 안에서 김 위원장이 어떠한 역할을 한 것인지, 이러한 것들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개인의 인물을 따라서 북한의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북한의 역사속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역할을 보고자 한 것이다. 김정일 본인이 후계자의 지위와 역할을 갖고 어떻게 북한의 목표와 의도를 추구하고자 했는지를 규명하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큰 틀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한 개인에 대해 부정적이다, 긍정적이다라는 `판단`을 하지 않았고 또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성`을 설정한 것도 아니다. 북한이 설정하고 있는 목적자체를 꾸준히 진행을 하다가 그 속에서 이론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물론 사회과학 연구자로서의 가치판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또 어떤 이론을 선택할 것인가에서부터 연구자의 가치판단은 개입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방법론적인 차원일 뿐이다. 이 책은 김 위원장을 `옹호`하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차원을 떠나서, 한 개인의 삶과 북한이 의도한 목적과의 관계에서 그 결과물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즉 의도된 결과물 속에서 김 위원장이 북한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려고 했는가를 찾고자 한 것일 뿐이다.

□ 북한연구에는 여러 가지 연구방법론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 책의 연구방법론인 `내재적 독해(contextual reading)`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 한마디로 인식론적 틀이라고 보면 된다. 기본적 인식론의 틀을 내재적 독해라고 한 것이다. 북한 연구를 할 때 좀더 `깊숙이` 들어가려고 할 경우, 글을 쓴 사람의 어떤 의도와 행위에 대해 그 행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행위자가 사용한 언어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한 신년사의 경우 두 가지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데 하나는 기존의 평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지시적 언술이 있다. 평가적 언술과 지시적 언술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인데 이 혼재된 상황을 우리는 거꾸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내재적 독해`란 행위자를 `평가`하기에 앞서 `이해`하는 것

즉 두 가지를 뭉뚱거려서 `북한은 이렇다`고 우리는 말한다. 예를 들면 `생활도 학습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가 나왔을 경우, 이건 상당히 의도된 목적의 구호이다. 그 의도속에 담긴 행위자가 사용한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 그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시대적 맥락, 그리고 그것을 사용한 행위자가 의도한 목적, 행위자의 마음과 의도, 그 당시의 처했던 맥락,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나는 내재적 독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해`의 방법의 차원이다. 이것을 먼저 `이해`해야 평가가 나온다. `이해`란 연구자가 한 행위를 평가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예를 들면 남한의 경우 가부장적 경향이 남아 있다고 해서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을 가부장적 대통령중심체제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북한의 경우 북한사회의 고유한 특징이 있고 또 우리 민족의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을 뭉뚱거려 북한사회를 봉건체제라고 한다면 이것은 한 면만 보는 것이다. 문화적 양상 하나만 보는 것이다.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문화적 양상도 중요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의도된 목적물인 사회적 양상, 즉 사회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 있는 것이고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보아야한다. 나는 이것을 수령체제라고 보는 것이다. 북한은 스스로 규정하기를 `수령-전사 공동체사회주의`라고 본다. 이것은 80년대 들어 `수령-당-대중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 재독 학자인 송두율 교수는 북한연구를 위한 방법론으로 `내재적 방법(immanent methodology)`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차이는?

■ 나는 그 차이점을 크게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송두율 교수는 송 교수 나름대로의 방법론이 있는 것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 송 교수의 방법론을 계승 발전하고자 했다. 전혀 동떨어진 개념은 아니다. `내재적 독해`는 `내재적 방법론`의 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북한 연구방법의 틀을 인식론적 틀로 규정한 것이다. 사회과학에서 특히 통일학, 북한학이 종합학문으로 갖추어지기 위해서는 분석틀과 이론이 필요한데 이론적 틀의 개념화를 시도한 것이다. `내재적 방법론`은 북한연구에 대한 선입관을 배제하기 위한 연구자의 노력이었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때 그 행위자의 의도를 정확히 분석하고 이해하기 전에, 그 의도나 목적물에 대해서 서술하거나 설명하면 분석이 잘못될 경우가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 『김정일』 책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평가`가 아닌 `이해`를 추구한다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 이해가 `옹호`의 느낌으로 읽히는 대목들이 드물지 않다"는 일부 견해가 있다.

■ 잘 알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책에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을 하는데 나는 거꾸로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떠한 기준에서 내 책을 평가하고 비판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북한사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와 분석틀을 가지고 이해하느냐 라고. 이 책 자체가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그 사람의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책 자체가 양비론으로 흘러가지 않을 만큼의 비판은 가해져 있다. 북한사회에서 역사적인 의도된 결과물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이나 북한의 경제가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면, 북한 사회주의의 내적 모순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이고 또 북한사회가 지니고 있는 내부적 한계, 국제적 한계, 남북관계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여러 문제점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설명 자체가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와 비판을 하지 말아달라. 이 책에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7년 5월 갑산파 사건 이후로 북한사회가 `수령체제 사회주의`로 변화되는데 그 부분을 이해하지 않고 수령제 사회주의를 단순히 김일성의 혁명사상이라거나 김일성 일인독재로 흘렀다며 김일성 비하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수령제 사회주의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은 정확한 이해속에 해야 되겠지만, 갑산파 사건 이후 북한사회가 수령제 사회주의로 변화된 양상은 북한이 이루고자 했던 의도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김정일』에는 양비론으로 흘러가지 않을 만큼의 비판은 가해져 있어

이것은 한국사회가 지금 권력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데 대통령중심제를 내각제로 한다던가 또는 이원집정부제로 바꾸려고 한다던가 등 권력구조의 변화된 양상을 놓고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논의를 해온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사회도 권력구조의 문제를 놓고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다. 반종파 투쟁, 반수정주의 투쟁 경험을 갖고 있는 북한사회가 권력구조를 어떻게 변화하려고 했었는지, 그 의도된 결과물로 나온 것이 수령제 사회주의 체제이다. 그러니까 그걸 배제한 상태에서 `김일성 권력`이라는 하나의 형태로만 놓고 보면 1인 중심으로 가는 것이다. 왜 북한사회가 1인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었나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비판은 무의미하다.

그런 속에서 70년대 오면 수령과 후계자의 문제가 김정일 분석의 모든 분석이 되고 또 그것도 권력 중심의 분석이었다. 그러나 수령과 후계자의 관계를 놓고 볼 때 후계자는 제1 덕목이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즉 수령의 사상을 계승 발전하는 것이다. 지도권을 먼저 갖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 발전하기 위해 북한이 목표로 했던 수령제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 후계자의 과업이었다. 그 후계자의 과업을 김정일은 어떻게 했나, 이 부분을 70년대부터 보는 과제였기 때문에 권력중심으로 본다면 힘들다는 것이다. 즉 수령제 사회주의의 완성 자체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되는 유일지도체제 구축과정이다. 그것은 동시진행형이다. 자연스럽게 수령제 사회주의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 후계자의 유일지도체제의 확립과 구축으로 가는 것이니까, 이를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이 70년대 김정일이 당적 지도권의 장악 과정으로 보는 것은 일면적 분석일 뿐이다.

▶이 책에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면 거꾸로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내 책을
비판하는지 되묻고 싶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현 기자]
즉 전체구조 속에서 보려 하지 않고 그것을 권력의 차원에서 후계자가 어떻게 당.정.군의 지도권을 행사하는가 라는 것만 보는 것이다. 당.정.군에 관한 지도권 행사는 큰 틀에서 보면 수령제 사회주의의 수령이 영도권을 강화, 완성하는 과정속에서 후계자가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다. 남쪽으로 이야기한다면 체제가 다르기 때문에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지만 어느 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한다면 같은 당 속에서는 당을 이탈하지 않는 이상 선대의 지도자에 대한 계승은 분명히 있다. 그 속에서 후계자가 비판 계승도 할 수 있다. 북한사회는 선행 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후계자가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북한은 "노선과 정책을 100% 그대로 계승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선대 지도자가 후계자에게 이양해야할 의무와 역할이 있는데 남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력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

□ 다시 묻고 싶다. 내재적 독해는 `평가`에 앞서 `이해`를 요구한다. 결국 이해란 `옹호`아닌가?

■ 나는 남한사회를 분석하는데 미국의 이론을 갖고 남한을 분석하는 것이 미국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그 사회를 분석하려면 보편이론도 존재하지만 특수이론도 존재하는 것이고 내재적 독해라는 것이 북한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남한사회의 정치적 틀도 내재적 독해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문의 행간을 읽을 때, 기자가 사실만 적는 것도 있지만 논설이나 특집에서 보면 분명히 행위자가 의도하는 목적이 있다. 그 행간의 의미를 모르면 `옹호`의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비판에 대해 나는 북한사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나서 옹호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냐 아니면 그 사람의 기준의 잣대가 혹시 남한의 잣대로 본 것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나는 결코 옹호를 하려 하거나 한 경우는 없다. 내가 볼 때는 그 분들이 관점의 기준을 정확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그 분들 자체가 실사구시적이지 못하고 역지사지하지 못하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하면서 옹호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는, 거꾸로 북한사회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다.

□ 이제 『김정일』 책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김정일 위원장의 출생설에 관해서 소련 출생설과 백두산 출생설이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 결과는?

■ 백두산 출생설에 대한 반대 견해로 소련 출생설이 4-5개 정도로 분류되고 있다. 1942년 2월 16일 태어났다는 견해와 일부에서는 1941년, 43년 이렇게 생일이 나누어진다. 이 생일이 나누어지는 것 자체는 북한의 책임도 있다. 왜냐하면 81년 노동신문에서 40돌 기념식을 했었다. 그 기준이 서양식으로 만 나이로 할 것인지 조선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정리가 없었고 82년 2월부터 40돌 행사를 다시 치룬 것이다. 40돌 행사를 두 번하다 보니까 생일에 혼선이 있었던 것 같다. 또 하나 생일에 혼선이 있었던 것은 연도와 관련해서 여러 증인들 사이에서 혼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밝혔고 나도 확인했지만 김정일 생일은 1942년 2월 16일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혼선의 과정이었다.

백두산 출생설은 가짜 김일성론과 연관된 문제이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했냐 안했냐라는 것은 북한정권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 문제는 논의가 안되다가 80년대 중반부터 논의가 된 것이다. 이것은 김일성의 행태론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출생설은 분명히 북한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윤색하기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김태서의 논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여기서 소련 출생설이 나왔다. 여타 분들이 `블라디보스톡 시내 병원 출생설`, 또는 `브야츠크 출생설`, `보르실로프 출생설` 등을 말하는데, 이런 것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은 북한정권의 생태적, 생래적 한계를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가짜 김일성론을 부정하시는 분들도 역시 다시 백두산 출생설을 부정하고 있다.

북한도 그것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지만 우리가 기본적인 전제로 깔아야 할 것은 과연 지도자가 어디서 출생했느냐 하는 문제가 정말 중요하냐 이다. 서양에서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연못의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한다는 농담이 있듯이 정기의 문제인데 풍수지리적 발상이다. 우리의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고 백두산을 신성시 취급했기 때문에 또한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였고 만주와 더불어 철옹성을 구축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소수였던 다수였던 간에 관계없이 투쟁을 했던 곳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데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한 많은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그것을 우리는 높이 사야하는 것인데, 아직 우리 남한사회가 민족문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일제의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하나의 한계라고 본다.

현재적 자료검토로 볼 때 백두산 출생설 타당성 높아

김정일의 출생지는 중국측이나 소련측의 자료를 보면 김일성 본대의 이동경로, 월경경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어디에 있었나 하는 것만 밝히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중요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출생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 위원장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고, 어떠한 생활방식 속에서, 어떠한 교육체계 속에서 세계관을 형성했는가, 여기에 연구를 좀 더 매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출생설을 가지고 연구논문을 발표한다던가 부인한다던가 하는 것은 내가 볼 때는 거꾸로 우리의 지도자가 경상도에서 태어났는지, 전라도에서 태어났는지, 산악지대에서 태어났는지 해변가에서 태어났는지를 가지고 따지는 불필요한 논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래적 정통성을 부인하려다 보니 북한사회가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구호화, 신화화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분야라 부정하는 것인데 북한이 계몽, 신화화하는 것을 우리가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북한사회의 체제와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그 부분을 우리가 굳이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북한사회로서는 체제수호의 문제이고 체제보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부분들을 우리가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체제문제와 관련해서는 남북이 기본합의서에서도 상호비방하지 않겠다고 했다. 남한에서 출생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예를 들면 거꾸로 북한정권이 남한정권에 대해서 왜 지역색을 가지고 싸우느냐, 이런 것과 같은 문제이다. 그렇다면 지금 호남정권은 정통성이 있고 영남정권은 정통성이 없는 것이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사회 자체가 지방주의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기관본위주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또 관료주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다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분석해 볼 때 백두산 출생설이 맞다. 당시 김정숙이 소련에는 없었다. 김정숙의 행적, 임신시기 등을 조사하면 김정숙은 당시 백두산에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1942년 2월을 전후해 김일성의 전령 전문섭, 조명록 등 어린 전령병들이 백두산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부대가 이동해서 백두산에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백두산에 `김정숙 수호부대`가 있었다는 것이 자료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소련 출생설을 우리가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김정숙이 1943년 4월부터는 소련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그쪽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증언자들은 출산을 목격한 것이 아니고 김정일을 본 것만을 이야기한 것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김정일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런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출생설은 연구자가 한번은 파헤쳐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정권적 차원에서 북한사회의 정통성을 깨겠다는 목적성을 가지고 한다면 반드시 실패한다라는 경고를 하고 싶다. 보다 진전된 연구를 하기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연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고 본다.

□ 유년기의 성장과정이 한 인간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김정일의 어린 시절 성장과정은 어떠했나?

■ 밀영이라는 빨치산들의 활동근거지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자체가 김정일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밀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호전적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우선 끈끈한 유대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항일 빨치산 활동이라는 것이 오늘만 있을 뿐이지 과거나 미래는 없는 것이다. 한시간 후의 자기목숨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끈끈한 우정이 존재하는 것이고 일제라는 엄혹한 시절에서 빨치산 활동이라는 것은 조국의 독립에 관한 문제이다. 조국애 하나로 뭉친 통일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음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애가 있다, 생명의 핏줄이 있다는 것은 이는 곧 조국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엄혹한 시절 한정된 공간에서 조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몇몇 아이들이 자기들 아들 딸 같고 조카 같고, 또 나이 어린 빨치산들에게는 자기 친동생 같았을 것이다. 항일빨치산 세력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생명의 고귀함도 느꼈을 것이고 또 끈끈한 유대관계도 형성했을 것이다. 북한정권의 모체인 항일빨치산 세력들이 북한정권을 장악하고 북한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영도그룹으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린 김정일에게 애정을 쏟고 또 끈끈한 유대의식이 형성되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요소들이 만경대 혁명유자녀 가족과 같은 형식으로 나아가면서 세대간의 통일성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린 김정일은 항일빨치산 세력과 끈끈한 유대관계 맺어

그 과정에서 김정숙이 사망했다는 것 자체는 김일성의 동료들이 김정일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애정을 쏟고 깊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과정에 방해되는  요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부, 편모 슬하의 자녀들이 가질 수 있는 고독감, 심적 부담감, 김일성의 둘째 부인인 김성애의 출신성분이 자기 어머니의 비서이자 수상관저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새 어머니로 들어온다는 것에 대한 불만감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여기에서 오는 인간적인 고뇌와 일탈심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본인이 어떻게든 극복해 나갔고 또 이 극복과정에서 항일빨치산들의 영향력이 컸고 이 과정에서 개별교육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어린 김정일은 정상적인 교육체계속에서 주체의
세계관이 형성됐다.[사진 - 통일뉴스 조성현 기자]
일부에서는 황태자 수업, 제왕학 수업이라고도 하는데 분명히 특권층으로서의 배려가 존재했었고 이북사회에서도 고급당 간부들의 자녀에 대해서는 개별교육이 존재한다고 본다. 봉건시대, 서양사회를 막론하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그러한 과외는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수상의 아들이기 때문에 유별나게 이루어지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부분에 대해서 김정일의 경우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재질을 갖추고 있고 또 그 의지가 강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본다.

어린 김정일은 한국전쟁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북한사회가 미국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잿더미 위에서 복구사업을 해야하는지 자연스럽게 익혔을 것이다. 또 아버지 옆에 있으면서 집안의 장남으로서 청소나 심부름 등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고, 아버지가 새벽에 나가서 들어오지도 않고 늦게 들어와서도 잠도 안자고 문건을 보고 하는 것을 보며 왜 그럴까 하는 부분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56년 8월 종파사건을 통해 50년대 중반부터 58년 사이 북한사회의 정권의 변화를 느끼면서 권력의 무상함이나 또는 왜 권력이 중요한지 권력에 대한 의지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일으킨 쿠데타 즉 김일성이 해외원조를 받으러 갔는데 쿠데타가 일어나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면서 권력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향성도 느끼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것들이 50년대 말 천리마 운동, 천리마 작업반운동이라든지 이런 것과 맞물려 진행되면서 자기의 사상의지가 형성이 되는 것이고 이런 것을 `정상적인` 교육체계속에서 느꼈다는 것이다. 주체의 세계관이 거기에서 형성된 것이고 나는 그게 오히려 일하는 노동의 의미, 일하면서 교육하는 의미보다도 하나의 정치적 인간으로서 커가는 김정일의 성장과정에서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일이 권력지향적으로 가지 않았나 하고 보는 것은 동전의 양면중 한 면만 보는 것이다. 두 면을 다 본다면 북한사회의 건설과정에서 형성되는 주체의 세계관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남한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 승계문제를 두고 `아버지 때문이다, 능력 때문이다`라는 논란이 많았다.

■ 두 가지 다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버지의 후광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전부 다는 아니다. 김정일은 64년 당에 들어가서 당사업을 시작하면서 많은 역할을 했고 그게 북한식의 검증과정이었다. 67년에 수령체제가 확립된 이후부터 70년대의 전과정, 약 14년 동안의 전과정이 북한식의 검증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은 터였고 또 북한사회도 후계자 문제를 놓고 스스로 고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60년대 후반부터 후계자 검증과정을 거쳐

후계자 문제는 북한 내부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사회주의권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 사후에 수많은 사건들 즉 임표사건이나 4인방사건도 있었고, 소련에서는 스탈린 사후에 후르시쵸프가 나타나면서부터 피의 숙청이 있었다. 주지하듯이 중국이나 소련 모두 후계자가 선행 혁명집단이나 지도부를 완전히 부인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 지도부내에서도 다음 세대를 염려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국제적인 영향도 받으면서,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내부적으로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던 것이다. 그게 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김정일은 60년대 후반부터 검증과정을 거쳐 주목받은 사람들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혁명 1세대로 할 것이냐, 혁명 2세대로 할 것이냐, 아니면 완전히 떨어져서 다음 세대로 갈 것이냐를 놓고 수많은 혁명원로 세대들이 논의를 했을 것이고 또 논의와 고민을 하는 과정속에서 김정일이 능력이 있고 또 검증을 받았으니까 되었을 것이다.

□ 1990년대 중반 북한 붕괴론이 널리 유포될 당시, "북한의 붕괴는 없다. 어렵지만 `당적 원칙`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정치체제 또한 대단히 안정적일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예측한 근거와 실제로 그 어려운 시기를 북에서는 어떻게 극복했는가?

■ 하나는 1980년 10월에 6차 당대회가 열린 이후 북한의 당대회가 생각외로 지금까지 열리고 있지 않고 있다. 아마 내년 정도에 당대회가 열리지 않을까 한다.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80년대 이후의 변화과정을 보면 북한사회가 큰 진폭의 인물변동이 없다. 세대교체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따라서 권력 엘리트의 순환과정은 분명히 거치고 있지만 또 그게 당대회를 거치며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처럼 급작스럽게 변동을 한다든지 변화를 모색한다든지 이러한 과정은 없었다. 노장청의 간부 배합이 정확하게 잘 배합되어 이루어진 과정속에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또 하나는 사회주의권의 붕괴과정 속에서 85년 중반 이후부터 북한사회가 변화모색을 해왔다. 과학기술문제 같은 경우도 87년부터 강화를 해왔고, 인민생활 향상을 위해서도 84년부터 진행을 해왔고 경제문제도 관심을 가져왔고 그러면서도 북한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적 내적 모순으로 인해 최대투자에 대해 최소생산이 나오니까 굉장히 비효율적인 면이 존재한다. 그걸 극복하려고 북한사회는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노력을 해왔다.

개혁개방속에서도 `당적 지도`는 안 변할 것

비효율성의 문제는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기본 한계이다. 이것을 김 주석도 알고 김 위원장도 문건속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왜? 실제로 존재하니까. 관료주의 병폐, 지방주의, 기관본위주의, 개인이기주의 이런 것들을 지도자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인센티브 문제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속에서 많은 노력을 해 왔는데 한가지 변하지 않고 강조하고 있는 게 있다.

50년, 60년대 소련이 가치법칙을 적용한 수정주의로 가거나 중국이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과정으로 가거나 할 때 북한은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결합해서 자기식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이 78년부터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과정속에서, 북한도 합영법을 도입하고 특구도 만들고 하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적 지도`이다. 이것은 변함이 없다. 중국에서는 특구에서의 당적 지도를 포기한 상태다. 그것에 대한 병폐, 부패문제가 수없이 나타난다. 북한사회는 그러한 과정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을 잘 들여다보면 분명히 보인다.

▶운동은 내 힘으로 해야 한다. 남한의 민주화, 통일운동은 우리식으로
해나가냐 한다.[사진 - 통일뉴스 조성현 기자]

92년부터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또 핵문제로 북미관계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도 내가 `북한은 붕괴되지 않는다`라고 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북한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주의 수호 문제의 차원으로 바라보고 있구나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문건이 나오고 `교훈과 경험`이라는 여러 가지 문건이 나오는 과정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당적 원칙이다. 개혁개방과정을 거치면서도 변화는 하되 우리가 원하는 식의 변화의 진폭은 없을 것이다. 단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혁명주의적 발전전략이라든지, 3대 혁명제일주의라는 과정속에서 자기식의 변화과정을 모색할 것이다.

결국에는 핵문제 등으로 인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화 과정, 자연재해 등이 중첩되면서 식량난이 오는 것이고 먹는 문제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 그 어려움 자체만 가지고는 붕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구호가 바로 `제2 천리마고조 운동`이라든지, `고난의 행군`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90년대 중반 북한 붕괴론이 나오면서 남한의 통일운동 내부에서도 혼선이 많았다. 당시의 느낌은?

■ 나는 직접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통일운동가, 통일전문가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었다고 해서 운동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굉장한 실망감을 가졌었다. 그것의 원인은 운동자체를 남에게 의지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남한을 민주화 해주고, 통일운동의 모국이냐 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 해야 한다. 남한의 민주화, 통일운동은 우리식으로 따로 해나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우리의 동포임에는 분명하지만 혁명의 기지는 아니다. 북한이 남쪽을 혁명전략화 한다고 해서 혁명의 모국이 아닌 것이다. 남한의 통일운동은 북한이 모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남한식의 통일운동이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반기였고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었다. 북한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좀더 자기 틀에 맞추어서 우리식의 통일운동을 해야만 한다.

남한의 통일운동은 `남한식`으로 해야

예를 들면 북한이 붕괴한다면 오히려 붕괴에 대한 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당시에 TV토론에 나와서 3년 안에 북한이 붕괴한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 언론사 사장도 하고 또 모 연구소 소장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자기 반성을 했는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이것은 극좌와 극우는 통하는 것처럼 황장엽이 넘어와서 주장한 봉기론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상호주의도 그렇다. 조선노동당의 규약을 바꾸라고 주장한다면, 남쪽은 헌법을 바꾸고 국보법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이처럼 엄격한 상호주의를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국가적 내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타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당국자간의 문제이다.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의 통일운동은 당국자간의 회담과 분리해서 사고해야 한다.

요즘 일부 통일운동가들 속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북한의 인권문제인데 북한 정치수용소에 북한의 지도자가 가느냐, 안 간다, 이거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남한의 지도자가 청송교도소를 가느냐 하는 것이다. 가고 안가고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식의 사고방식으로 북한의 인권이 안되어 있다거나 북한 민주화운동을 해야 한다거나 해서는 곤란하다. 상호비방하지 말자고 해놓고 상호비방하는 것이다. 북한사회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고, 우리가 이것을 먼저 `이해`하자는 것이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내재적 독해의 의미이다.

이찬행 -『김정일』을 통해 북한사회를 규명하고자 ②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