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사인은 '다발성 장기손상'.. 북 조문단 파견 여부 주목

2009-08-18     고성진 기자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했다. 향년 85세.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 씨가 있다.

고인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며, 15일부터 합병증이 겹쳐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세브란스병원측은 “김 전 대통령이 오늘 새벽부터 병세가 악화돼 오후 1시 35분쯤에 심장기능이 멈췄으며 오후 1시 43분에 끝내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장기손상과 호흡곤란증후군인 것으로 알려졌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향토예비군 폐지 등의 혁신적 정책을 내걸고 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과 맞섰으나 95만표 차로 석패했고,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과정에서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는가 하면 80년 5월 17일 신군부 등장과 함께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는 등 숱한 고초를 겪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직시 외화위기를 극복하는 한편 햇볕정책을 추진해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하고 6.15공동성명을 발표해 남북화해의 시대를 연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퇴임 후에도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주실현과 남북화해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아 국가 원로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고인이 생전에 치료를 받아왔던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측은 곧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 사인을 밝힐 예정이며, 병원 주변에는 권노갑 전 의원과 박지원 민주당 의원 등 고인의 측근과 여,야 정치인들이 조문차 몰려들고 있다.

한편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김 전 대통령 서거에 북한이 조문단이 파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6.15공동선언의 주역인 김 전대통령의 서거에 또 한 명의 주역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대의 예우를 갖춘 조문단을 파견할 것이며, 이는 막혀도 있는 남북 관계을 위해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연보>

1924. 01 전남 신안군 하의면(荷衣面) 후광리(後廣里)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둘째 아들로 출생.
‘後廣’은 그의 아호가 되었다

1933 하의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37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로 전학

1939 목포상업학교(5년제, 현 전남제일고등학교)에 입학

1944 목포상업학교 졸업

1944. 03 목포상고 졸업과 함께 목포상선회사에 취업. 이후 회사 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 사업가로 활동

1945. 0408 8.15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이자 곧 탈퇴

1946. 04 목포 신민당 지부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여 탈퇴

1946. 04. 9. 차용애 여사와 결혼, 슬하에 홍일, 홍업 두아들을 둠

1948. 10. 목포일보 사장으로 1950년 10월까지 활동

1950. 06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사업관계로 서울 출장중에 6.25를 맞아 걸어서 목포로 귀가

1950. 09 공산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에 탈출 (첫 번째 죽을 고비)

1951. 03. 목포해운회사(흥국해운) 사장에 취임.
같은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

1961. 05. 13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민의원 보궐선거 출마, 당선. 4번째 도전에 성공하였으나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함

1962. 05 이희호 여사와 재혼. 슬하에 홍걸

1962. 07 소위 ‘이주당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

1963. 07 민주당 재건에 참여, 대변인

1963. 11 6대 국회의원 선거, 목포에 출마 당선, 민주당 대변인

1964. 04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

1965. 05 민중당 대변인

1966. 08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 겸 정무위원

1967. 02 통합야당 신민당 창당. 신민당 정무위원, 대변인

1967. 06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의 집중적인 ‘김대중 낙선 전략’에도 불구하고 목포에서 당선

1967. 08 ‘분노의 메아리’ 출판

1968. 06 신민당 원내총무로 지명되었으나 의원총회에서 부결. 김영삼 의원 원내총무 당선

1970. 01. 24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 선언

1970. 09. 29 신민당 전당대회 후보 경선에서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

1970. 10 16 대통령 후보 기자회견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미소중일 4대국 보장, 비정치적 남북교류 허용, 통일론, 예비군 폐지’ 제창

1970. 11. 13 ‘내가 걷는 70년대’ 출간

1971. 02 미국 방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풀브라이트 상원 외교위원장 등 미 정계 지도자들과 회담. 귀국길에 일본 방문

1971. 04. 18 장충단 공원 유세

1971. 04. 27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46% 득표), 박정희 당선

1971. 05. 24 8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차 지방 순회중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함(두번째 죽을 고비)

1971. 05. 25 8대 국회의원 전국구 당선

1971. 12 저서 ‘대중경제론’ 출간

1972. 07. 13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외신 기자회견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제창

1972. 10. 13 신병치료차 일본 체류중, 유신 계엄선포로 망명생활 시작

1972. 10. 18 일본 동경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 발표

1773 미국, 일본 언론과 한인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 반대 활동을 전개

1973. 07. 13 미국에서 일본 방문

1973. 08. 08 ‘동경납치 살해미수 사건’ 발생. 중앙정보부 요원에 일본 그랜드 호텔에서 납치 당해 수장될 위기에서 극적 생환(세번째 죽을 고비)

1973. 08. 13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함

1973. 12 저서 ‘독재와 나의 투쟁’ 일본어판 출판

1974. 08. 22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반독재 선명야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적극 지원

1974. 11. 27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

1975 선거법 위반 혐의(63년 대통령 선거 관련)로 1년형 선고

1976. 03. 01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8년 선고

1977. 03. 23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옥고

1977. 05. 07 진주교도소 수감중 접견제한에 항의, 단식투쟁

1977. 10. 31 진주교도소 수감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

1977. 12. 22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 수감

1978. 09. 06 서울대병원 이송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제한, 운동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

1978. 12. 27 옥고 2년 9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

1979. 04. 04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선생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 공동의장으로 반독재투쟁에 앞장, 3차례 연행

1979. 12. 08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 사태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자택연금에서 해제

1980. 02. 29 사면, 복권

1980. 03 YWCA에서 9년만에 대중연설. 그후 사회단체, 대학의 초청으로 전국 순회 시국강연

1980. 05. 13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시국성명을 통해 학생 시위 자제 호소

1980. 05. 16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공동기자 회견, 시국수급 6개항 제시(계엄령 해제, 정치범 석방, 정치일정 연내 완결 등)

1980. 05. 17 동교동 자택에서 체포, 구속, 고문 조작 수사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 민주화 운동 발발

1980. 09. 17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네번째 죽을 고비)

1980. 12. 04 2심에서 사형 확정

1981 부루노 크라이스키(Bruno-Kreisky) 인권상 수상

1981. 01. 23 국제적 구명 여론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

1982. 03. 02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

1982. 12. 16 복역중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

1982. 12. 23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집행정지로 미국 망명

1983. 01. 08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월세 아파트에 일가족 정착

1983. 01. 31 ‘뉴스위크’지 회견,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

1983. 02 미국 방송, 신문, 잡지 회견, 교민초청행사 참석
재미 ‘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창설, 교포사회의 모국 민주회복 운동 주도
망명중 미국 학계, 종교계, 사회단체들로부터 초청 강연

1983. 05. 16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

1983. 06 워싱턴, 뉴욕 등에서 김영삼 단식투쟁 지원 데모

1983. 09 하버드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

1984. 01 미국 유니언 신학대학교 국제위원회 고문(뉴욕)
미국 국제고문자 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미네아폴리스)

1984. 12 전두환 대통령에게 귀국의사를 밝힌 서한 발송
(전두환,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4자회담 제의)

1985. 02. 08 망명 2년 3개월만에 당국의 반대와 주위의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 김포 공항에서 대인접촉이 봉쇄된 채 격리, 가택연금
2.12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 돌풍의 중심 역할

1985. 03. 06 정치활동 규제자 추가 해금(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등 16명). 사면 복권이 안돼 여전히 정치활동 금지

1985. 03. 18 김영삼씨와 야권통합을 합의하고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수락

1985. 06. 17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과 민주화 요구 공동 발표문 채택

1985. 11 저서 ‘대중경제론’(한 영어판) ‘행동하는 양심으로’ 출간

1986. 02. 12 신민당민추협 중심 대통령 직선제 개헌 청원 1백만인 서명운동 시작

1986. 07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 되었으나 당국에 의해 저지

1986. 11. 15 전두환 정권이 자진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대통령 선거 출마하지 않을 용의가 있음을 선언

1987. 04. 08 김영삼씨와 신당 창당 선언

1987. 04. 10 가택연금(동교동 자택 외부인 출입금지, 집 주위에 12개의 초소와 기관원 감시 사옥 설치)

1987. 06. 25 장기연금 해제

1987. 07. 09 사면 복권(‘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자 등)

1987. 09. 08 17년만에 광주 방문, 망월동 참배. 28년만에 고향인 목포와 하의도 방문

1987. 10 각계 대표들의 지지와 추대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

1987. 10. 27 미국 AFL-CIO에서 수여하는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 수상

1987. 11. 12 평화민주당 창당대회에서 총재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87. 12. 16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노태우 당선

1988. 04. 26 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당선(사상최초로 여소야대 국회, 평민당 제1야당)

1988. 05. 18 야 3당 총재 회담, 5개항 합의(5공비리 조사, 광주학살 진상규명 등)

1988. 11. 18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 증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조작극이었음을 입증

1989. 08. 03 서경원 방북사건 관련 혐의로 강제구인되어 심야 수사 받음. 불구속 기소

1990. 01. 08 지자제 전면실시 등 4개항 요구하며 단식

1990. 01. 23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야합 반대 투쟁 시작

1990. 07. 27 평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 총재 재선출

1990. 10. 08 ‘지자제 실시, 내각제 포기, 보안사 해체’ 등을 요구하며 13일간 단식투쟁. 신촌 세브란스 병원 후송

1991. 04. 09 평민당, 이우정씨 등 재야 구야권 출신등을 영입, 신민주연합당(신민당)으로 재출범

1991. 09. 10 이기택 민주당 총재와 신민당-민주당 통합 선언

1992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1992. 03. 24 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당선

1992. 05. 25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

1992. 12. 18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김영삼 후보 당선

1992. 12. 19 정계은퇴 선언

1993. 01. 26 영국으로 출국, 케임브리지 객원교수로 연구활동 시작

1993. 07 귀국

1993.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출판

1994. 미국 내쇼날 프레스 클럽(NPC), 북핵해결을 위한 ‘일괄타결’ ‘카터방북’ 제안

1994. 09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초청으로 ‘강한 의지에 입각한 태양정책’ 주제의 연설

1994. 12 아시아 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설립, 상임공동의장 취임

1995. 07 정계복귀 선언

1995. 09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1997. 05 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1997. 10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합의

1997. 12 이회창 후보, 이인제 후보와 대결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

1998. 02. 25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취임

1998 UN 인권협회 인권상 수상

1999. 07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수상

2000. 01 새천년민주당 총재

2000. 06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회담. 남북공동선언 발표

2000. 12 노벨평화상 수상

2002. 02. 24 제15대 대통령 퇴임

2003. 08. 08 만해대상 수상

2003. 11. 03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개관

2003. 12. 09 칠레 대십자 훈장 수상

2003. 12. 15 ‘춘사 나운규 영화제’ 공로상 수상

2004. 01. 29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심판결에서 무죄 선고

2004. 05. 10 ~19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순방, OECD,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

2004. 06.15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한 6.15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특별연설

2004. 06. 29 중국 방문(장쩌민 군사위 주석 등 중국 지도자 면담)

2004. 11. 06
~14 유럽 방문(스웨덴, 로마)
페르손 스웨덴 총리, 참피 이탈리아 대통령과 회담
노벨평화상 수상자 세계정상회의 연설(로마)

2004. 12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방문
2차 동아시아포럼(EAF) 총회 특별연설

2004. 12 주요연설 대담집 『21세기와 한민족』(국영문) 출판

(출처=김대중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