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위기가 여성문제를 영화화시켰다?

<유영호의 북한영화 바로보기> 연구자들의 왜곡 ⑨

2009-03-06     유영호
“국가가 집단적으로 가사와 육아를 사회화해 여성을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은 경제난과 국가위기 상황에서 공수표가 되고 있는 한편 사회주의 하에서도 강하게 유지되던 가부장성은 여성이 가족경제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그 동안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은 이미 성취한 것으로 보면서 언급조차 안 하던 여성문제를 영화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밑줄 필자)” … “물론 이러한 솔직한 재현 자체는 하나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북한영화들은 완벽한 사회주의 제도 보장으로 여성이 노동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듯이 재현해 왔기 때문이다.(밑줄 필자) … 그것은 바로 주체영화 자체가 매우 남성적 관점에서 생산돼 왔고 주체는 남성 또는 무성주체로서 간주돼 온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이명자, 『북한 영화와 근대성』, 역락, 2005)

위의 글에서 이명자의 주장을 보면, 북은 경제위기로 여성문제가 심각해졌으며, 그 징표로 최근의 영화 속에서 ‘그 동안 언급도 안 하던 여성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그는 북이 경제위기로 “초기의 여성정책이 제시한 혁명성과 달리 국가가 어려울 때는 여성정책을 다른 무엇보다 먼저 바로 반동적 성격으로 전환”해 버렸다고 주장한다.(이명자, 「북한 주체영화의 여성성 재현에서의 변화 연구」, 『영화연구』제23호, 한국영화학회, 2004. 6)

이명자는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예술영화로 <엄마를 깨우지 말아>(2002 : 3부작, 텔레비죤련속극)와 <해운동의 두 가정>(1996) 등을 예시한다. 이들 영화 속에서 여성은 가사와 육아문제로 자기의 사회적 노동(앞의 두 영화 속에서는 여자 주인공들은 각각 전문연구사와 예술단 가수로 등장)과 갈등을 일으키며 또 이 문제로 남편과 대립된다. 즉 북이 사회주의 초기는 어느 정도 안정되게 여성문제를 해결하였는데,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가장 먼저 반동적으로 바꾼 정책 가운데 하나가 여성문제이고,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동안 영화 속에서 언급도 안 하던 여성문제의 등장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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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영화 <해운동의 두가정>(1996) : 아내 연희가 옆집 남편의 가정적인 모습과 비교하며, 일밖에 모르는 남편에게 화를 내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 텔레비죤련속극 <엄마를 깨우지 말아>(2002:3부작) : 아내 연순이 연구일로 가사일에 소홀한 것에 대하여 남편 성호가 화를 내며 집을 나서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필자는 여기서 북의 여성문제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학자나 여성문제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객관적 자료에 근거하고 있는가와 논리적 완결성을 갖고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이명자는 ‘그 동안 북한영화들은 완벽한 사회주의제도 보장으로 여성이 노동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듯이 재현해 왔다.’ 하지만 ‘국가가 어려울 때는 여성정책을 다른 무엇보다 먼저 바로 반동적 성격으로 전환해 버린다’며 그러한 것은 최근 영화 속에 나타난 가사 및 육아문제로 부부갈등이 나타나는 것에서 자기 주장의 근거를 찾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난 시기의 영화들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그럴 때 만이 최근 영화의 경향과 비교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명자가 위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서적에서 그가 인용하고 있는 북의 초기 영화인 <신혼부부>(1955)에서도 새색시 은실은 결혼 후 집에만 머무르다 평양관광을 나섰다가 그곳에서 전후 복구에 모든 사람들이 너나 없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를 반성하게 된다. 그 뒤 기관사인 남편 영철에게 “벽돌 한 장 쌓아 올리지 않은 내가 어떻게 발전된 조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냐?”며 자기도 그 건설현장의 일원으로 공장에 나가 일을 하겠다고 제기한다. 하지만 남편 영철은 부부 모두 일을 하면 가정이 망가진다며 반대한다. 이처럼 이미 1950년대의 북한영화에서도 여성 노동력의 사회화로 부부갈등이 벌어지는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 예술영화 <신혼부부>(1955) : 은실이 자신도 밖에 나가서 일하겠다고 따지며, 이를 반대하며 가정에만 머물 것을 요구하는 남편 영철과 말다툼하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또 <결혼 후 첫해>(1984)에서도 남편 진규는 아내인 현옥이 양식장의 종자미역을 키우는 문제로 시아버지 식사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여 아내에게 일을 그만 두고 집에 머무를 것을 요구하자 현옥은 어찌 총각 때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냐며 항의하는 등 이명자가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의 부부갈등은 벌어지고 있었다.

▲ 예술영화 <결혼 후 첫해>(1984) : 남편 진규가 아내 현옥에게 양식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신경쓰라며 꾸짖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물론 이들 영화 속 결론도 이명자가 인용한 두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에 반대하던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거나, 아내는 가사일에 무관심했던 남편의 진심을 이해하며, 그 동안 그러한 남편에 대하여 지나치게 비판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이로써 부부 모두가 더욱 사회활동에서 열심히 일하고, 결코 집단과 개인의 이익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려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즉 이러한 류의 거의 대부분 영화들은 가정이란 개인적 집단과 조국이라는 민족적 집단이 결코 둘로 나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임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들이다. 그야말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 그 자체를 영상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북한영화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성들의 사회적 노동참가와 가사노동의 문제로 부부갈등이 존재하고 있으며, 결국 여성들의 사회적 노동참여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가정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그렇게 할 때 오히려 가정은 더욱 활기차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왜 이명자는 지난 영화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최근의 영화 몇 편으로 북의 사회를 통째로 재단하려 하는가 의문스럽다.

필자의 판단으로 볼 때, 위에서 이명자는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항상 사회적 약자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자본주의 일반논리를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사회주의국가인 북에 적용하면서 이러한 오류를 범했으며, 또 탈북자들 특히 여성탈북자들의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면서 이런 잘못된 분석이 나오지 않았나를 생각해 본다.

한편 이명자의 글에서는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논리를 너무도 쉽게 북한영화 연구의 기준으로 들이대는 행위는 다른 글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례로 <가정>에서 첫 부인과 이혼을 하고 재혼한 기사장은 두 번째 부인이 바깥일로 바쁜 것에 못마땅하지만 두 번째 꾸린 가정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가사일을 한다. 빨래를 하고 밥을 지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대체로 남편인 기사장의 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첫 부인에게는 폭력을 휘두를 정도로 위압적 가부장이었지만 기사장인 그보다 월급이 많은(혹은 부수입이 많은) 호텔지배인인 현재 부인에게는 거의 쥐여 사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사실은 북한에서도 경제권에 따라 남편과 부인의 관계가 영향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이명자, 『북한 영화와 근대성』, 역락, 2005)

▲ 텔리비죤련속극 <가정>(2001:9부작) : 두 번째 부인 란실은 결혼 기념일이라고 남편 강필주의 사무실까지 찾아와 자신이 관리하는 호텔로 데려가 결혼기념 3주년을 기념하는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즉, 위에서 주장하는 바는 북에서도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경제위기 이후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돈이 중요한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누가 더 많은 수입을 올리냐가 가족이란 집단 속에서 중요한 힘의 원천이 된다는 것인데 필자는 이러한 분석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물론 북이란 사회에서 화폐가 갖는 실질적 위력을 필자는 경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부정적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최소한 영화라는 매체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전제로 한 것이다.

위의 인용글에서 이명자는 부인이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남편이 부인에게 '거의 쥐여 산다'고 하였지만 이는 영화를 잘못 본 것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보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 북한영화에서는 가정, 마을, 공장 등 모든 집단 속에서 주도적인 사람은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선점한 사람이다. 최근 '실리'라는 것이 등장하지만 그것 역시 대의명분을 좀더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하나의 방법론이지 그 자체가 최근 남쪽에서 이야기하는 '실용'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북한영화는 단 한편도 예외 없이 모든 영화에서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 즉 주인공은 대의명분에서 양보하지 않고, 당 정책을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일례로 예술영화 <부부지배인>(2001)을 보자. 이 영화는 오랜 세월을 지배인으로 활동해온 아내 옥녀와 이제 막 새롭게 지배인이 된 남편 석근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아내는 새롭게 지배인이 되어 경험이 부족한 남편을 지도하듯 이끌려고 하지만 남편은 마구잡이로 실속 없이 성과만을 내는 아내의 형식주의적 경영방식은 당 정책에 반하는 것이라며 실속 있는 경영방식을 조용히 새롭게 창안해 내어 결국 남편의 공장이 당으로부터 인정받고, 그 동안 형식적으로 실적위주로 일을 전개해온 아내 옥녀의 공장은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최근 북에서 거론되고 있는 '실리사회주의'의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남편 석근은 지배인이 되기 전에는 기사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위에서 언급한 수입문제에서 지배인과 기사장 누가 더 많이 버는지 필자는 모른다. 하지만 기사장에서 지배인으로 그 직위가 변경되어 최소한 지배인으로서의 경력은 아내인 옥녀가 훨씬 많았다. 그러하기에 아내가 남편의 일을 도와준다는 명분 아래 그를 지도하려 하였지만 새내기 지배인인 남편 석근은 아내의 공장 운영방식이 오랜 경험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지배인 경험이 많은 아내의 지도를 따르지 않고 새롭게 당 정책을 관철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다.

▲ 예술영화 <부부지배인>(2001) : 처음 지배인이 된 석근은 여러 공장들의 중간경쟁총화에서 꼴찌를 했고, 그의 아내 옥녀는 1등을 하였다. 그 후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푸념을 듣는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이처럼 북한영화에서 등장인물 가운데 누가 이야기를 주도하느냐는 당 정책이라는 대의명분과 그것을 실속 있게 수행해 내느냐의 문제이지, 수입이나 경험의 다소에 좌우되지 않는다. 필자가 판단컨대 이러한 영화 이야기의 구성은 북의 최초의 예술영화라는 <내고향>(1949)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 것이며, 또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위의 인용글에서 이명자는 최근 북이 경제위기 이후 수입의 다소에 따라 부부 관계가 바뀌고 있다는 주장은 남쪽의 잣대를 무분별하게 북에 들이 댄 결과이며, 또 북이란 사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즉, 자본주의로 변했으면 하는 기대가 객관성을 유지해야 될 학술논문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가정>에서 강필주가 아내에게 잡혀 사는 모습은 이들의 경우 북이 내세우는 당 정책에서 어긋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집단의 이익에 앞서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개인주의자라는 악역을 맡은 역할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부 사이에서는 대의명분보다 물질이 앞서는 장면을 연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북한영화 전반에 나타나는 부부관계로 보편화하는 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