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길을 여는 평화체제를’

<이활웅의 시시촌평 69>

2007-10-31     이활웅
이활웅 (본사 상임고문)

‘종전선언’이란 괴물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하던 청와대와 외교부가 타협점을 찾았다한다. 먼저, 북핵 불능화 시점에 남.북.미.중의 6자회담 수석대표 또는 외교장관급 4자회담을 열어 평화협상 개시를 선언하고 추후 협상과정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감안하여 4자 정상회담을 추진키로 했다는 것이다. 결국 종전선언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을 한반도에서 열기로 하자던 10.4 남북정상선언 제 4항은 헛다리를 짚은 꼴이 되었으니 남북 두 정상의 체면이 우습게 됐다.

한편, 북한 핵시설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신고가 연말까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그에 대응하는 미.일의 대북 관계 개선조치들과 아울러 중유를 포함한 대북 경제지원도 예정대로 제공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인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외교장관급 회담도 잇따라 열릴 것으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특히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윤곽이 어떻게 잡힐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난 10월 26일 외교안보연구원 주최로 열린 학술회의에서 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이 평화체제 수립 후에도 주한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보도는 우리를 매우 당혹하게 만든다. 그런 말을 미국 국무장관이 했다면 그렇게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수장이 험난한 일이 예상되는 평화체제 협상을 바로 앞둔 시점에 그런 무모한 발언을 공개석상에서 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은 한반도의 나라가 아닌 미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와서 한반도의 나라인 북한을 50년 이상 위협하고 있는 비정상적 상태를 끝내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남한에 미군이 그대로 남아 단독이든 남한과 합동이든 전쟁연습을 하는데 북한이 어떻게 긴장을 풀거나 군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미군을 내보내는 일이야말로 평화체제 협상의 가장 으뜸가는 과제이어야 한다.

주한미군은 지금까지 북한의 위협을 핑계로 한반도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지금 남북 간의 실력 격차로는 남한이 북한에게 위협이 될지언정 북한이 남한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공연한 엄살이다. 그리고 2000년 6.15 선언 이후 남북 간에 추진되고 있는 화해협력 사업이 성과를 올릴수록 남북 간의 상호위협 가능성은 계속 감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송 장관은 ‘새로운 동북아안보 환경에 맞는 역할’이란 모호한 개념을 주한미군 계속주둔의 필요성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런 역할을 맡는 군대의 필요여부는 물론, 필요한 경우에도 그 성격, 구성, 규모, 배치 및 임무 등 모든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 일방적 혹은 쌍무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북아의 유관국들이 공동으로 검토하고 결정할 문제이다.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은 지역 안보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며 그런 미군을 두고 있는 한반도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나 다름없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는 한미방위조약도 그 전문에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이 발달될 때까지’로 조약의 사명을 한정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은 9.19 공동선언 제4항으로 한반도의 평화체제와 지역안보증진책의 두 가지를 병용하는 쌍두마차 방식으로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도모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6자회담의 최종 타결과 더불어 동북아 안보협력 방안이 강구되면 한미방위조약은 스스로가 정한 유효기간 만료로 소멸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같은 외교통상부의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같은 날 같은 모임에서 ‘북한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데 유엔사를 그대로 두고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평화체제는 분단 상황을 고착화하고 영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협력과 교류를 증가시켜 통일로 가게 하는 징검다리로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정부 당국자들의 발언이 ‘종전선언’ 때와 마찬가지로 엇박자를 보이고 있어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밑의 사람이 그른 말을 하고 장관이 옳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한반도에는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중국군대를 불러들인 후 오늘까지 줄곧 125년 동안 외국군대가 주준하고 있는데 그 동안 한 번도 진정한 평화가 제대로 자리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 땅에서 외국군대는 내보내야 한다. 곧 다가올 한반도평화체제 협상은 125년만에 처음으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앞으로 적어도 수십 년을 또 군사정체상태로 고정화된 분단체제 하에서 외국군대를 섬기며 제 나라에서 2등국민으로 살아가야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 분단을 끝내고 통일의 길을 열어주는 평화체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