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세운 추모비와 햇무리'

한국교회인권센터, 효순.미선 5주기 추모예배.시낭송회 가져

2007-06-12     정명진 기자

주한미군이 세워 놓은 추모비, '미2사단 장병 일동'의 화환

▲ 12일 정오,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효순이 미선이 추모비 앞에서 추모예배와 시낭송회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예지금부터 5년전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에서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열다섯 살 효순이 미선이는
한반도를 짓밟는 미 제국의 살육전쟁 놀이에
눈이 먼 미친 개 같은 미군 장갑차에 깔려
                          ......
미군 군홧발에 짓밟히는 들꽃의 아픔으로
미군 포탄에 멍들어가는 우리강산의 아픔으로
오십년을 넘은 분단된 조국 한반도의 아픔으로
민족의 아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채상근, 피어나라 신효순심미선 통일의 꽃이여 中-효순 미선 5주기 추모식에 부쳐)

▲ 56번 지방도를 군용 차량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굽어진 양주시 56번 지방도를 트럭과 자동차가 쉼 없이 오고가는 가운데, 10여명의 기독교 목회자들과 시인들이 5년 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두 여중생의 넋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12일 정오 효순.미선 추모비 앞에서 한국교회인권센터 '인권지킴이' 열번째 기도회로 추모예배 및 '우리시대의 시인들' 시낭송회가 열렸다.

효순.미선 5주기를 하루 앞둔 추모예배였지만, 주한미군이 세워놓은 추모비 앞에서 그네들의 넋을 기려야 하는 상황이 썩 편치 않아 보였다.

추모예배가 진행되는 도중에 '미2사단 장병 일동'이라는 글자가 붙은 화환이 놓이자 참가자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한 참석자는 "이 추모비는 우리가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한다"며 "당시 국민들의 반대여론이 올라오니까,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지어놓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두 여중생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아랫돌에는 두 여중생의 사진과 함께 '2002년 9월 21일, 미2사단 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고현장을 선점해버린 주한미군의 추모비 주위로 각계 시민단체의 추모 푯말이 곳곳에 꽂혀 있을 뿐이다.

"여전히 이 땅에서 저들의 전쟁 연습은 이어지고"

▲이날 행사는 목사이기도 한 이적 시인이 시낭송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사회를 본 최재봉 목사는 "효순이.미선이 5주기를 맞아 더 이상 안타까운 일들이 없도록, 한반도에 주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평화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기도로 추모예배 시작을 알렸다.

 
참석자들은 두 여중생이 떠난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주한미군 범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을 한탄하기도 했다.

김성윤 목사는 기도를 통해 "참으로 꽃다운 생명이 떠나고, 우리 모두 누구보다도 분노하고 어린 생명과 함께 평화를 위한 마음을 모았지만, 여전히 이땅의 평화를 짓밟고 저들의 전쟁 연습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효순이.미선이 5주기를 맞아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민통선의 애기봉 평화교회에서 시무중인 이적 목사는 설교에서 "효순이 미선이 죽은 뒤 소파개정 문제가 나왔다. 이는 죽은 자보다 살아 있는 자를 편히 해주는 것"이라며 "살아 있는 우리가 대신 죽은 자의 멍에를 이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우리시대의 시인들' 시낭송회에서 박민규 시인은 사고 차량의 선탑자였던 미군이 현재 미국으로 돌아가 교도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인터뷰 요청에 미화 1000불을 요구한 내용을 시로 꼬집었다.

시끄러운 펑키 틀어놓은 채 뒤에서 웃기만 하던 그 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 제 나라의 간수가 되었구나
너희들이 매일 이 할미를 향해 외쳐대던
왜, 왜, 왜를 물으러 찾아간 네 오래비들 앞에
천불만 주면 가르쳐주겠다고 흥정을 했다니 이 할미
화증으로 천불이 나서 못배기겠다
그런 놈이 인간백정이 아니고 무어겠느냐
인간백정이 지키는 데가 지옥이 아니고 무어겠느냐
(박민규, 진혼가 中-효순이 미선이 5주기 추모식에 부쳐)

효순.미선 추모비를 비춘 햇무리

▲효순이 미선이 추모비 위로 햇무리가 졌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행사를 마치고 참석자들은 추모비에서 내려와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처참히 짓이겨졌던 현장을 둘러봤다. 참석자들은 뒤따라오던 장갑차와 이를 피하려던 여중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훈련 때만 되면 미군 장갑차가 이동하는 56번 지방도는 두 여중생의 사고 이후에 좁다란 인도가 생겼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그 인도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기도를 올렸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창휘(30)씨는 사고현장을 둘러보면서 슬픔 감정이 올라왔다면서 "이같은 역사가 또 다시 반복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며 "그런 것들을 우리가 잘 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길에 효순이.미선이 추모비 위로 햇무리가 졌다. 참가자들은 "보기 귀한 건데", "우리에게 열심히 싸워달라는 뜻인 것 같다"며 한 마디씩 던진다.

 주한미군이 세워놓은 추모비, 여전히 계속되는 미군들의 훈련, 그리고 범죄들. 참가자들은 무거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싸워달라'는 두 여중생의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한국교회 인권센터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주한미군은 효순 미선 사건 이후에도 동두천 미용실 방화사건, 한국인에 대한 폭행사건, 여성에 대한 성추행 사건, 심지어 한국 경찰관에 대한 성폭행 미수 사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범죄를 일으키고 있다"며 불평등한 한미주둔군지위협장(SOFA) 개정을 촉구했다.

아울러 "효순이와 미선이의 희생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것은 한반도를 미군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한국교회는 생명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