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취재기2> '오랜만의 100미터 달리기'

2006-12-28     김치관 기자

지난 18-22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의장성명을 발표하고 휴회했으나, 북미간 타결점을 찾지 못해 다음 회담 일정마저 정하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북한의 '선 금융제재 해제'와 미국의 '선 북핵포기 및 상응조치'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이번 회담를 취재하며 기사에 담지 못했던 몇몇 가벼운 주변 이야기를 전해본다.

<차별받는 외신 기자>

사람들이 살아가며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일 중의 하나는 차별을 받을 때일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면 누구나 즐거운 마음이겠지만 누구에게는 큰 선물을 주고 자신에게는 초라한 선물을 준 것을 알게 된다면?

그러나 일상적으로 차별을 받으며 취재에 임해야 하는 기자들도 많다.
6자회담 한국측 브리핑룸이 설치된 베이징 메리어트호텔 2층 옆방에는 서울 주재 외신 기자들의 기자실이 따로 마련돼 있다. 이들은 한국측 당국자의 공개 브리핑이 진행된 뒤 백그라운드 브리핑(배경설명)이 시작되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이번 회담에서 한국측 당국자들은 처음으로 외신 기자들을 위한 별도의 배경설명을 '적절한 수위'에서 다시 해줬다. 또한 한국측 수석대표가 내신 기자들과 비공개 오찬을 가진 시간에 차석대표가 외신 기자들과 비공개 오찬을 진행하는 세심한 배려도 돋보였다.

그러나 내신 기자들을 상대로 한 당국자의 배경설명의 내용 역시 연합뉴스나 통일뉴스 등을 통해 상세히 보도되는 편이어서 굳이 이같은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느냐는 목소리도 계속 커지고 있다. 인터넷 매체 기자로서 '비상주 기자'의 차별을 받아본 기자에겐 백번 타당하게 들린다.

당국자 여러분! 다음 회담에서는 외신 기자들에 대한 차별의 문턱이 더 낮아질 것으로 기대해도 되겠죠?

<북한대사관 앞, ‘뻗치기’는 옛말>

6자회담이 열리면 기자들이 기자들을 취재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회담장인 댜오위타이(釣魚臺) 앞은 물론 북한 대표단이 묵고 있는 북한대사관 앞, 한국과 미국 대표단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비에 가면 언제든지 뭔가를 기다리며 '뻗치기'를 하고 있는 일군의 기자들을 만날 수 있다.

현장에 도착한 기자들은 먼저 '뻗치기' 중인 기자들을 한 컷 사진에 담고 나서 기자들을 상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취재하게 마련이다.

특히 북한대사관 정문 앞 뻗치기는 '악명'이 높다.
한국이나 미국측 수석대표들은 회담 기간 동안 호텔을 드나들며 기자들에게 그날 그날의 상황을 브리핑해주지만 북측 단장은 회담 기간 중 좀체로 입을 여는 법이 없다. 더구나 예고 없이 대사관으로 들어가다 덜컥 몇 마디를 쏟아놓게 마련이다. 이 장면을 놓치게 되면 그야말로 '물을 먹게' 되는 판이니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더구나 차가운 베이징의 겨울 날씨 탓에 호텔 로비에서의 뻗치기와 북한대사관 앞 대로변에서 추위에 떨며 무한정 기다리는 뻗치기는 '노동 강도'에서 가히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지난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때부터 북측은 댜오위타이호텔에 마련된 6자회담 프레스센터나 북측 대사관에서 미리 시간을 알려주고 정식 기자회견을 했고, 이번 회담에서도 회담을 마무리하고 나서 김계관 단장이 6자회담 프레스센터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베이징의 추운 날씨에 두툼한 옷을 껴입은 채 북한대사관 앞에 진을 치고 뻗치기를 하는 풍경도 이번 회담을 고비로 이제는 박물관에 보내지게 되길 기대해본다.

<"남측 통일뉴스 기잡니다">

회담이 시작되기 이틀전인 16일, 베이징에 도착한 기자는 제일 먼저 회담장인 댜오위타이와 북한대사관을 찾아 회담장 주변을 사전 취재했다.

북한대사관 앞은 4차회담 당시와는 달리 차량을 통제할 수 있는 낮은 철책문이 한겹 더 둘러쳐져 있었다. 당시 북한대사관에서 김계관 단장이 공식 기자회견을 가질 때 기자들이 북한대사관 담벼락에 물밀 듯이 떠밀려들어 사고가 날 뻔한 경험 탓이리다.

민족의 반쪽인 북측의 대사관 앞까지 간 기자가 그냥 발길을 돌리기가 허전해서 북측 관계자와 차라도 한잔 나눌 수 없을까 해서 정문 앞 경비병에게 명함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는 북측 경비병이 아닌 중국 '공안'(경찰)이었고, 중국말로 휴일이므로 내부에 근무자가 없다고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설명해줘 허탈하게 돌아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면 기자정신에 흠집나는 일.
다음날 다시 북한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남측에서 온 통일뉴스 기잡니다"라고 밝히고 관계자를 수배해 김계관 단장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당찬'(?) 제안을 전했다. 물론 김 단장은 회담 마지막날 내외신 기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공식 기자회견을 가짐으로써 이 같은 제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오랫만의 100M 달리기>

원래 회담 취재는 좀 심심하다.
회담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접촉과 협상 내용은 결과물이 나와 봐야 그 내막을 알 수 있지 막상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은 프레스룸에서 당국자들이 간간이 전해주는 몇 쪼가리의 정보를 토대로 소설이나 써야하는 신세인 것이다.

18일, 회담이 공식 개막됐지만 회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북미간 양자협의도 진행되지 않았고, 북측은 모든 초점을 북미간 BDA(방코델타아시아) 금융제재 문제를 다루는 'BDA회담'에 맞추는 협상전술을 절묘하게 펼쳐나갔다.

19일 오전, 북측 BDA회담 대표단이 베이징 서두우(首都)공항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레스룸에만 틀어박혀 있던 기자도 모처럼 카메라를 꺼내들고 공항으로 나갔다.

그러나 도착한 공항에는 귀빈 전용 출구와 일반 출구로 나뉘어져 있고, 북측 BDA 대표단이 어느 출구로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귀빈 전용 출구를 지켜서고 있던 기자는 후다닥 달음박질 소리에 본능적으로 일반 출구로 대표단이 나왔다고 판단하고 100미터 달리기에 돌입, 젖먹던 힘까지 짜내 공항 2층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아뿔사! 북측 대표단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고, 다시 기자들은 몇 덩어리로 나뉘어 공항 1층과 2층을 100미터 달리기로 휩쓸고 다니며 술래잡기에 나섰다.

10여분간의 수차례 100미터 달리기로 다리에 힘이 빠질 때쯤 드디어 2층 바깥에 대기중인 북측 대사관 차량이 목격됐고 차량을 덮치다시피 달려든 기자들이 발견한 건 텅빈 좌석. 다시 한번 기자들이 몰려들고 소란함이 일더니 마침내 북측 대표단장 오광철 조선무역은행 총재의 모습이 설핏 보였다. 결사적으로 몸을 던져 차량에 탑승한 오 총재를 차 유리창에 플래시를 터트리며 마침내 촬영에 성공!

오 총재를 태운 차량이 곧바로 떠나버리자 기자들은 오 총재가 빠져나가도록 길을 터준 북측 관계자들에게 다시한번 돌진하기 시작했다. "몇 명이 왔나요?", "오늘부터 BDA회담이 열리나요?", 한국말, 중국말, 일본말, 영어가 섞이면서 다시 한번 아수라장이 벌어졌고 기자들에 둘러싸인 북측 관계자는 "나는 관계가 없시오", "몰라요"를 연발했지만 마침내 "나는 운전수야요!"라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로써 상황은 끝났고, 그를 붙들고 어떻게든 취재를 해보려던 기자들의 다리도 마침내 맥없이 풀려내렸다.

<70대 8대 1>

4차회담 당시에 국내 주요 언론사들은 보통 2명의 취재기자를 파견했고, 중국 현지 특파원들이 결합해 3명정도가 한팀을 이뤄 취재에 임했다. 이번 회담은 당시에 비해 회담에 대한 기대감이 적어진 탓인지 보통 1명의 외교통상부 출입기자가 취재에 임했고 특파원들이 결합해 각 사당 2명정도가 취재에 임했다. 물론 사진은 연합뉴스와 뉴시스에서 제공해주므로 이들은 전적으로 '펜기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 되는 형국.

그러나 인터넷 매체에서 온 기자들은 특파원이 없으니 당연히 한 명인데다 사진도 직접 찍어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

가장 부러운 것은 연합뉴스의 경우 통신사답게 총 8명의 기자가 투입돼 요소요소에서 새소식을 실어나르고 다양한 기사를 내놓을 수 있는 시스템이 돼 있다는 점. 그러나 이것도 외신들에 비하면 조족지혈. 일본 NHK의 경우 이번 회담 취재를 위해 무려 70명의 기자가 투입됐다고 하니 가히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는 판.

김계관 단장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싶으면 외신들을 통해 물어보면 몇시 몇분에 어디를 떠나 몇시 몇분에 어디에 들어가 있다는 정확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나온다.

70:8:1의 구도에서 그래도 인터넷 독자들을 위해 프레스룸에만 머물지 않고 발로 뛴 인터넷 기자들에게 그나마 선배로서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특별한 된장찌개>

언제부턴가 육식을 멀리해온 기자에게 외국 출장취재는 고역이다. 취재도 힘들지만 음식을 가려먹기가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기자는 종종 우리나라는 채식주의자의 천국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딜가도 밥과 김치는 대강 나오기 때문이다. 고깃집을 가도 공기밥에 김치 얻어먹는 정도는 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된장찌개 한 종지도 딸려나온다.

그러나 미국에서 '베지테리언(채식주의자)' 노릇을 하기란 쉽지 않다. 주로 야채샐러드 외에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프기 마련이다. 김치는 언강생심이지만 쌀밥 한번 챙겨먹기도 힘들다.

다행히 숙소인 메리어트호텔 지하에는 서라벌이라는 한식 체인점이 있어서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우리 음식이 싸지는 않지만 먹을만하게 나온다. 그러나 이들 찌개에도 어김없이 소고기 몇점은 나오게 마련이다. 언제부터인지 된장국에도 고기를 넣는 것이 유행처럼 된 것이다.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메뉴를 고를 때 반드시 '부 야오 로우'(不要肉)라고 말해야 고기를 빼고 음식이 나온다. 그러나 사실은 미리 대량으로 준비해둔 찌개에서 그냥 고기만 골라내고 주는 것임을 환히 알고 있는 기자에게는 결국 '원초적'으로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콩나물김치해장국'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러나 회담이 일주일을 넘기는 판국에 매끼 빠짐없이 콩나물김치국만 열심히 먹어댄다는 것도 보통 고역은 아니다. 3차례 회담 취재차 이 식당을 애용하다 보니 봉사원 아가씨들은 물론 주방장까지 나는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제법 알려졌고 의례 콩나물김치해장국이 식탁에 올랐다.

어느날 점심, 기사 마감에 쫓겨 늦게서야 혼자 점심을 먹으러 지하 식당에 내려가자 주방장 아저씨가 일부러 나와서 정중하게 고기 안 들어가는 다른 메뉴를 한번 만들어주고 싶다고 메뉴를 골라보라고 권했다.

"된장찌개!"를 주문한 기자의 목소리를 누군가 유심히 들었다면 감격에 겨워 약간의 떨림이 감지됐을 지도 모른다.

잠시후 된장찌개가 나왔으나 웬걸 어김없이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나는 그나마 주방장 아저씨의 친절을 기억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밥과 김치만 묵묵히 먹고 있었다.

한창 식사중에 주방장 아저씨가 커다란 뚝배기에 특별히 새로 끓인 된장찌개를 들고 '친히' 식탁으로 오더니 "아니, 누가 이걸 갔다놨어?" 쌍심지를 켜며 일반 된장찌개를 잘못 배달한 종업원들을 나무라고 "고기를 안 넣어 맛은 덜 하지만 특별히 끓인 것이니 맛을 좀 보라"고 권하며, 성적표를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맛 있네요". 밋밋한 기자의 한 마디에도 주방장 아저씨는 정말 아이처럼 기뻐했다.

한국이 채식주의자의 천국이라면, 한민족이 사는 곳은 세계 어디라도 기자처럼 고기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도 훈훈한 인정이 느껴질 수 있는 곳으로 변하게 마련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