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통일동행
구순맞은 통일원로 박정숙 선생의 고향방문
2006-10-04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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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4일 손마디는 굽을대로 굽었고 발바닥의 굳은 살은 더 이상 굳을 것이 없어 쩍쩍 갈라질 만큼 모든 것을 바쳐 뛰고 투쟁하신 노 여선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선생들의 말대로 젊은 시절 옥살이를 함께 했던 여성동지들이 몇 년간 별러왔던 그 계획을 드디어 현실화한 것이니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 가장 '큰 언니'이신 박 선생의 고향을 방문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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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 그 곳이 아흔살 박정숙 선생이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공립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소풍을 다녔던 낙산사와 5,6학년 고학년 시절 다녀오셨다던 설악산 초입의 신흥사를 방문했다.
또한 당시 여성으로서 1회 졸업을 했다는 대포초등학교(당시에는 여학생은 4학년, 남학생은 6학년제였다고 한다)를 방문해서 80년 후배들에게 환대를 받았고 박 선생이 태어나신 곳인 외물치를 들렀으나 선생의 생가터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죽기전에 꼭 한번 와봐야겠다는 마음만 가득했는데 내 고향을 우리 동지들과 함께 오게 되어 기쁘고 좋은 만남들도 갖게되어 뜻밖입니다"라며 마지막 날 밤 조용히 말씀하시던 박 선생의 잔잔한 눈빛을 보며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는 속마음만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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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자락의 고개를 넘는 동안 아버지 생각이 그리도 나셨다고 한다. "19살 먹은 우리 큰언니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괴나리봇짐을 싸가지고 550리나 되는 이 령을 넘어 서울까지 언니 면회를 다니셨어. 아들도 아니고 딸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옥에 갇혀있는데 닷새밤을 걸어 면회를 다녀오시던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 그게 벌써 75년 전이야"라는 이야기를 할 때면 눈가가 축축해지는 박 선생이셨다.
20대 시절부터 허리통증을 앓고계신다는 박 선생의 밤은 고통의 선잠뿐이다.
신호등 파란불이 깜빡일 때면 바쁜 여고생마냥 뛰시는 모습에 선생의 건강은 청신호라고 장담하고 있었는데 철없는 후배의 자족이었다는 것을 반성하는 이틀밤이었다. 선생의 척추는 마치 마디 굵은 대나무로 만든 활 시위처럼 심하게 바깥쪽으로 굽어서 등을 대고 눕는 것 자체가 심한 통증이었다. 때문에 10분 이상 바로 눕지 못하고 힘겹게 일어나서는 앉은 채로 때로는 두손 모아 무릎꿇고 기도하듯 엎드린 자세를 번갈아 가며 주무신다. 행여나 옆에 잠든 어린 후배가 자신의 뒤척임 때문에 깨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신음을 삼키시는 모습에 어린 후배는 동이 틀 때까지 마음만 시름시름 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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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은 땅도 갈라놓고 가족도 갈라놓았지만 어린 소녀는 통일애국투사가 되어 고향의 봄을 그리워만 하지 않고 고향의 봄, 민족의 봄을 앞당기기 위해 가냘픈 다리에 힘을 주고 오늘도 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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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숙 선생 고향방문길에는 그림자처럼 함께 생활하시며 박 선생님을 모시는 동생이자 동지인 김선분 선생(82세, 범민련 서울시연합 고문)과 류금수 선생(80,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한기명 선생(78, 범민련 대구경북연합 의장), 박순자 선생(76, 범민련 남측본부 중앙위원)이 함께 동행했다.
[이모 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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