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통일동행

구순맞은 통일원로 박정숙 선생의 고향방문

2006-10-04     데스크
강인옥 통신원(tongil@tongilnews.com)


▶9월 24일 구순을 맞은 박정숙 선생이 고향을 방문했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박정숙 선생이 올 여름 아흔번째 생신을 맞이하셨다. 박 선생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10대 어린시절부터 일제에 맞서 싸웠고 어느덧 구십이 되어버린 지금도 조국통일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투쟁의 현장에 나오신다.

지난 9월 24일 손마디는 굽을대로 굽었고 발바닥의 굳은 살은 더 이상 굳을 것이 없어 쩍쩍 갈라질 만큼 모든 것을 바쳐 뛰고 투쟁하신 노 여선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선생들의 말대로 젊은 시절 옥살이를 함께 했던 여성동지들이 몇 년간 별러왔던 그 계획을 드디어 현실화한 것이니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 가장 '큰 언니'이신 박 선생의 고향을 방문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박 선생의 고향 강원도 양양을 찾아가는 길에는 여성 동지들이 함께 했다.
왼쪽부터 김선분, 류금수, 박정숙, 한기명, 박순자 선생.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그럼에도 한켠에는 투쟁 사안이 많은 시기에 여행길에 오르게되어 무척이나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평생을 바치고도 순간의 짬조차 홀가분하지 못하신다.

강원도 양양, 그 곳이 아흔살 박정숙 선생이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공립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소풍을 다녔던 낙산사와 5,6학년 고학년 시절 다녀오셨다던 설악산 초입의 신흥사를 방문했다.

또한 당시 여성으로서 1회 졸업을 했다는 대포초등학교(당시에는 여학생은 4학년, 남학생은 6학년제였다고 한다)를 방문해서 80년 후배들에게 환대를 받았고 박 선생이 태어나신 곳인 외물치를 들렀으나 선생의 생가터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죽기전에 꼭 한번 와봐야겠다는 마음만 가득했는데 내 고향을 우리 동지들과 함께 오게 되어 기쁘고 좋은 만남들도 갖게되어 뜻밖입니다"라며 마지막 날 밤 조용히 말씀하시던 박 선생의 잔잔한 눈빛을 보며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는 속마음만 품었다.

▶대포초등학교 1회 여학생 졸업생인 박 선생이 구순에
다시 교정을 찾았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바닷가를 거닐면서도 박 선생은 내내 조용하고 조금은 쓸쓸한 모습이었다.

강원도 산자락의 고개를 넘는 동안 아버지 생각이 그리도 나셨다고 한다. "19살 먹은 우리 큰언니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괴나리봇짐을 싸가지고 550리나 되는 이 령을 넘어 서울까지 언니 면회를 다니셨어. 아들도 아니고 딸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옥에 갇혀있는데 닷새밤을 걸어 면회를 다녀오시던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 그게 벌써 75년 전이야"라는 이야기를 할 때면 눈가가 축축해지는 박 선생이셨다.

20대 시절부터 허리통증을 앓고계신다는 박 선생의 밤은 고통의 선잠뿐이다.
신호등 파란불이 깜빡일 때면 바쁜 여고생마냥 뛰시는 모습에 선생의 건강은 청신호라고 장담하고 있었는데 철없는 후배의 자족이었다는 것을 반성하는 이틀밤이었다. 선생의 척추는 마치 마디 굵은 대나무로 만든 활 시위처럼 심하게 바깥쪽으로 굽어서 등을 대고 눕는 것 자체가 심한 통증이었다. 때문에 10분 이상 바로 눕지 못하고 힘겹게 일어나서는 앉은 채로 때로는 두손 모아 무릎꿇고 기도하듯 엎드린 자세를 번갈아 가며 주무신다. 행여나 옆에 잠든 어린 후배가 자신의 뒤척임 때문에 깨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신음을 삼키시는 모습에 어린 후배는 동이 틀 때까지 마음만 시름시름 앓고 말았다.

▶박 선생 일행은 대포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박 선생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서 꼭 조국의 큰 일꾼이 되라"고 당부했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남강원도와 북강원도로 갈라져 조국분단의 한 징표가 되어버린 강원도 출신이신 박정숙 선생. '고향의 봄'을 조용히 읊조리시던 박 선생은 어린 '정숙이'가 되어 아버지와 일찍부터 의식이 깨어있었던 두 언니 그리고 저녁밥을 지어 놓고 막내딸을 기다리시는 어머니를 만나는 아련한 눈빛이다.

분단은 땅도 갈라놓고 가족도 갈라놓았지만 어린 소녀는 통일애국투사가 되어 고향의 봄을 그리워만 하지 않고 고향의 봄, 민족의 봄을 앞당기기 위해 가냘픈 다리에 힘을 주고 오늘도 싸우신다.

▶설악산을 오르며 '그림자'와 같은 김선분 선생과 함께.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그 동안 박정숙 선생의 90 한 생을 돌아보기 위한 작업에 수 차례 도전하였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라며 만류를 하셨다. 항상 앞장서 모든 투쟁에 임하시면서도 언제나 묵묵히 뒷자리를 지키시는 박 선생은 9월 24-26일 고향방문 역시 기사화를 극구 만류하셔서 설득을 거듭해야만 했다.

박정숙 선생 고향방문길에는 그림자처럼 함께 생활하시며 박 선생님을 모시는 동생이자 동지인 김선분 선생(82세, 범민련 서울시연합 고문)과 류금수 선생(80,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한기명 선생(78, 범민련 대구경북연합 의장), 박순자 선생(76, 범민련 남측본부 중앙위원)이 함께 동행했다.

[이모 저모]

▶강릉휴게소에서 동심으로 돌아간 여 선생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80년만에 걸어보는 교실 복도.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 '대포공립국민학교 학생'이
된듯하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기자]
▶설립 90년이 된 학교의 여성 1회 졸업생을 만난 교감이
서류를 뒤져봤지만 전쟁으로 초기 졸업생들의 명단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예절반 '후배'들에게 차대접을 받았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지금까지 만나본 졸업생중 가장 오래된 선배라며 감탄하는 교감 선생.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박 선생이 대포초등학교 시절 소풍다녔던 낙산사에서.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고학년이 되면 소풍을 왔다던 설악산 신흥사에 다시 섰다.
그때는 산에도 뛰어올랐는데 이젠 조용히 거닐며 옛시절을
떠올린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700미터 높이에 오른 선생들. 귀가 먹먹하다며 사탕을
찾으신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강산이 여덟번이나 바뀐 후에야 다시 오른 설악산.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고향방문길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신 한기명 선생과 막내이신 박순자 선생이
바닷가에서 환담을 나누고있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젊은 시절 지리산자락에서 싸움을 하며 불렀던 노래들을 고스란히 기억하며 합창을
하신다. [사진 - 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