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박세일,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민경우의 민족이야기> 민족, 민족주의에 대하여

2006-04-12     민경우

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박세일 씨는 그의 책 『대한민국 선진화전략』(박세일, 21세기북스, 2006)에서 대한민국이 선진화하기 위한 사상으로 ‘공동체 자유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한나라당이나 이른바 뉴라이트 등이 채택하거나 즐겨 애용하는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할 듯 하다. 본 글에서는 일차로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논해 보겠다.

박세일 씨는 위 책 136쪽에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지만 모든 민주주의가 반드시 자유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비자유주의와 결합하는 민주주의” 가령 “히틀러의 나치즘, 계급독재로서의 인민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등의 비자유민주주의" 등은 문제라고 주장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선진화를 가로막는 5대 사상으로 수정주의(신좌파적) 역사관, 결과평등주의, 집단주의(전체주의), 반법치주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 대중조직주의) 등이 있고 이 중 집단주의에는 민족주의, 계급주의, 지역주의가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는 근대 영국에서 발원한 사상이다. 모든 사상에는 이를 체현하는 역사적 주체가 있게 마련인 데 초기 자유주의의 주체는 영국의 ‘꼬마’ 부르조아였다. 이들 ‘꼬마’ 부르조아들의 주장은 주로 경제적 자유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제도로서의 입헌군주제와 제한선거(재산이나 교육정도에 따라 선거권이 제한되는 당시 부르조아들의 시각에서 보면 노동자나 민중은 선거할 자격을 갖지 못한 일종의 우민<愚民>이다)였다.

19세기 산업화에 대한 폐해가 심해지고 노동계급의 밑으로부터의 투쟁이 강화되면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주로 보통선거)를 채용하여 자유민주주의가 된다. 이 때의 자유민주주의는 노동자(후에 여성)들에게도 선거의 자격을 두되 이를 사유재산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온건한 수준에서 묶어 두자는 일종의 ‘개량화’ 정책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에 도입되어 일종의 국가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이름할만한 너그러움(?)이 있는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대한민국 특히 보수세력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유민주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민주화운동 시기 민주화 세력 또한 자유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에 상당한 무게를 두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한국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그것이 보수 세력의 체제 이데올로기이든 민주화 세력의 저항 이데올로기이든 일종의 공인된 사상이었다.

그런데 왜 박세일 씨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사상을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것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왜 자유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거세하려 하는 것일까?

첫째, 현재 전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모슨 사상에는 사회역사적 맥락과 실체가 있다. 영국의 초기 자유주의가 영국안에서 사유재산을 강조하는 ‘꼬마’ 부르조아였다면 지금 시기 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은 세계패권 국가 미국과 민족국가 단위를 뛰어 넘는 초국적 자본이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모두 “개인의 존엄과 개성....” 운운한다고 해서 이를 같은 것으로 오인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결국 현 시기 민주주의를 거세하고 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이유는 영국의 초기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채용하면서 노동계급과 타협했던 것과는 반대 방향에서 초국적 자본이 그나마 남아 있는 계급타협(?)적 요소를 거세하려는 공격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둘째는 민주주의가 갖는 위험성 때문이다.

민주주의, 특히 대의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회가 안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대체로 기득권층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가 불안정할 경우 특히 최근처럼 신자유주의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될 경우라면 민주주의, 특히 국민의 직접 투표로 이루어지는 대통령 선거는 대단히 역동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중남미 베네주엘라에서 차베스 대통령이 승리하고 차베스 대통령이 강도 높은 개혁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것,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등은 모두 민주주의 특히 보통선거가 갖는 역동성을 잘 보여 준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갖는 이러한 위험성(?)을 제어하기 위해 몇 가지 제어 장치를 두곤 한다.

첫째, 최대한 직접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라 대의적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것이다. 영국 의회가 상, 하원으로 분리된 것,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주 선거를 이긴 정당이 주 단위의 표를 모두 독점하는 방식 등은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폭발력을 완충하기 위한 일종의 통제 장치이다. (이를 정치 교과서 등에서는 견제와 균형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위 책에서 박세일 씨가 양원제의 도입이나 비례대표제의 확대를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세일 씨는 시종일관 전문가 집단의 중요성과 ‘공화주의적 시민의식’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대중 정치인과 이에 결합하여 기득권 위주의 정치 구도를 일거에 뒤집는 ‘거리 정치’ 방식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적 정치인과 결합된 민중의 정치 참여를 이른바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박세일 씨가 꿈꾸는 세계는 세계화된 경제 속에 편입된 잘 훈련된 엘리트집단과 이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발탁하는 각종 제도적 장치(가령 위에서 언급한 비례대표제), 그리고 공화주의적 의식으로 무장한 시민(포퓰리즘에 현혹되지 않는)이다.

반대로 세상은 어떠한가? 엘리트 집단 사이에 고만고만한 논쟁 대신에 대중적인 참여와 직접 민주주의가 보다 중요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중남미의 좌파 정권들, 중동아랍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세력의 약진, 한국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 등은 모두 세계화/엘리트/대의제(또는 법치주의)와 구분되는 민족/민중/직접적인 정치 참여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크게 보면 노동정책에 반대하는 프랑스 국민의 저항, 이민법에 반대하는 미국의 갈등도 비슷한 현상이다.

결국 박세일 씨는 민주주의의 거세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데, 재미있는 것은 한나라당이나 월간조선처럼 거칠고 과격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포장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