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노재봉,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와의 관계
<민경우의 민족이야기> 민족, 민족주의에 대하여
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는 통일성과 집단성을, 자유주의는 개별성과 다원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배타적, 대립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근에는 점차 이런 생각들이 확산되고 있는 듯 하다. 과연 그럴까?
노재봉 교수는 『한국민족주의의 이념』(서울 아세아 정책연구원, 양호민외, 1979)에 실린 논문 「한국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근대적 정치체의 통일성 원리이며 동시에 포괄적인 정치명분인 민족주의는......역사적인 국가형태의 하나에 관련되는 범주임에 대하여, 앞서 든 다른 주의(가령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은)는 그 국가형태 안에서의 정치형태 또는 통치형태에 관련되는 범주의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자유주의란 것은 민족을 명분으로 하는 근대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문제되는 사회기술적인 또는 법적인 장치나 방법의 범주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범주상으로 민족주의와는 다른 범주일 뿐 아니라 또 하위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므로 다소 해설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근대적 정치체란 ‘민족(국민)국가’를 의미한다. 이것은 전근대 시대의 왕조 국가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전근대시대의 왕조 국가가 특정 가문, 특정 세력의 사유물 같은 것이었다면 근대시대의 국가는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의 동의와 지지 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의 동의와 지지, 충성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전근대시대의 왕조 국가라면 왕권신수설과 같은 봉건적 이념이면 충분하겠지만 근대적 정치체는 국민 모두를 하나로 결속하고 나아가 권력의 정당성을 구하는 근대적 정치이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 동원되었던 이념이 민족주의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노재봉 교수의 말처럼 민족(국민)국가(즉 근대적 정치체)가 내부의 구성원을 민족(국민)국가로 강하게 결속하는 ‘통일성의 원리’이고 민족(국민)국가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구성원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는 ‘포괄적인 정치명분’이라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는 그렇게 형성된 민족(국민)국가가 그 내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와 관련된 사회기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양자는 범주가 다른 문제이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가 있어야 근대적 정치체인 민족(국민)국가가 형성될 수 있고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민족(국민)국가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자유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이념이 민족(국민)국가 내부에서 가동될 수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자유주의보다 상위의 범주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소개한 바 있는 김영명 교수의 저작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김영명, 오름, 2002)에도 흥미있는 설명이 있다.
보통 아담 스미스하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자유방임주의의 시조쯤으로 불린다. 그런데 자유방임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을 설파했던 아담 스미스의 저작 『국부론』의 정식 명칭은 『국가의 부(富)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고찰(考察)』(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결국 아담 스미스가 말하고 있는 자유주의도 영국이라는 나라를 전제하고 그 내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한 것이다. (위 노재봉 교수의 논문도 김영명 교수의 책에 소개되어 있다. 필자는 김영명 교수의 책을 통해 노재봉 교수의 논문을 접하고 이를 국회도서관에서 구해 보았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위의 글을 쓴 사람이 노재봉 교수라는 보수적인 인물이라는 점과 이 논문의 발간 시점이 197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다.
노재봉 교수의 글을 비롯하여 필자가 읽어 본 1970년대 후반 무렵에 쓰여진 민족, 민족주의의 저작물에서 민족, 국가와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글은 찾아 보기 어렵다. 대부분 민족과 국가, 민족주의가 출현한 역사적 맥락을 소개하고 그것이 자유주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떤 시기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어떤 유형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해명하는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경향에 비하면 균형감있고 상식적인 논지를 펴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인권과 존엄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가치’라느니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라는 등의 난폭한 주장을 하고 있다. 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이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성을 떠나 관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의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과 1990년대 이후의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이 다른 이유는 해당 시기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70년대 후반에는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친미적이면서도 일정한 영역에서 민족과 국가, 공동체와 사회가 차지하는 영역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이른바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이들 영역이 구조적으로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적 차이만큼 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